23화. 그들은 살아 있었다(2)
“큭! 허윽….”
검을 따라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대로 데니안의 상체가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는 끝내 베를리아의 검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지켰다.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충격 받은 리암의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는 베를리아 리들턴이 그들을 찌를 수 있으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숨도 못 쉬고 질식할 듯한 그 모습을 내버려 둔 채로 베를리아가 명했다.
“재스민, 포션을 가져와.”
“지금 그게 무슨 소용…!”
“허억… 헉, 으윽….”
미세한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스민에게서 포션을 받아든 베를리아가 발로 데니안의 몸을 뒤집었다. 그대로 검을 뽑아내자 커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커흑…!”
“걱정하지 마, 죽지는 않을 테니까.”
잠깐의 규칙을 뒤틀어 무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은 베를리아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재 데니안은 질서대로 찾아와야 할 죽음이 비껴간 상태였다.
‘대신 죽을 만큼의 고통은 느끼고 있을 테지만.’
그게 그녀가 원하던 바였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원작 속의 베를리아는 늘 버림받았고 그렇기에 발악하는 존재였다. 심지어 그녀가 떠올리는 기억들은 베를리아의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어서 지극히 주관적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데니안을 믿을 수 없었다.
목숨이라도 걸지 않는 한은. 이 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메리쉬와 재스민 그리고 카를로스 뿐이었지만 데니안은 검을 피하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데니안은 베를리아를 원망하며 바라보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데니안의 말이 진심임을 인정했다.
재스민이 신전에서 축성한 최상급 포션을 부어 데니안의 상처를 치료하고 다른 하나는 마시게 했다. 그러자 상처가 빠르게 아물며 창백해졌던 그의 혈색이 돌아왔다.
순식간에 수도의 저택 두 채에 버금가는 돈을 쓴 베를리아가 검을 데니안의 옆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사과가 진정성 있다는 건 알겠어. 사과는 받을게. 용서는 하기 싫으니까 안 할 거지만.”
사과는 가해자가 해야 할 당연한 의무였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 그녀가 보답할 것은 없었다. 방법이 잔인했다는 건 알겠지만 솔직히 무얼 보고 그녀가 저 데니안 론델을 믿겠는가?
포션 덕에 말끔히 나았다지만 고통은 잔재하는 모양이었다. 일어나지 못하는 데니안을 두고 베를리아가 돌아섰다. 그녀의 뒤를 메리쉬가 따라왔고 그곳에는 주저앉은 리암과 고통을 삭이고 있는 데니안만 남게 되었다.
***
메리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방금의 일이 일어나지 않기라도 했던 것처럼 태연하게 그녀의 손을 잡아 올 뿐이었다.
“우리 뭐부터 할까?”
그게 정말 개의치 않아서라는 걸 베를리아는 알았다. 메리쉬의 세계는 베를리아였다. 그래서 남들이 어떻든 정말 그는 관심 없었다.
그런 그가 좋았다. 베를리아는 자신이 이 세계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데에는 분명 메리쉬의 역할도 톡톡히 하리라 생각했다.
‘왜 그랬어?’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목소리는 어딘가 울고 있는 것 같기도 분노한 것 같기도 했다. 들어본 듯도 했고 낯설기도 했다. 그녀가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 주변을 휙휙 둘러봤다.
“베릴?”
갑작스러운 베를리아의 행동에 메리쉬가 걱정을 담고 그녀를 불렀다. 순간 편두통이 이는 것처럼 머리 한쪽이 지끈거렸다. 자동적으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데니에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
“베릴?”
머리는 아파져 오고 목소리는 그런 머릿속을 자꾸 울렸다. 그러나 메리쉬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처럼 오직 그녀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시야가 흔들렸다. 어쩐지 땅을 딛고 있는 다리도 붕 떠서 현실감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베릴! 괜찮은 거예요?!”
그녀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그가 베를리아의 양어깨를 잡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베릴, 나 좀 봐요, 베릴.”
메리쉬가 그녀를 안아서 온통 시야를 자신으로 물들였다. 코앞에 존재하는 녹음의 눈동자, 선명하게 맞닿아오는 온기.
“…괜찮아.”
그제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멈추고 발밑으로 현실감이 생겨났다. 메리쉬가 걱정을 한가득 담은 얼굴로 물었다.
“어디가 안 좋은 건가요?”
“아니야, 그냥 잠깐 두통이 일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의원을 부르고….”
그의 표정은 꽤 심각하기까지 했다. 남들은 가질 수 없는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베를리아 리들턴의 육체는 가끔씩 부작용을 일으킬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리들턴과 므시아의 치료를 전담해 온 의원이 아니라면 그녀의 치료를 맡길 수 없는 것 또한 그런 이유였다.
“나 괜찮아, 메리쉬.”
도통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메리쉬의 뺨을 감싼 그녀가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다. 그 녹안에 제 눈동자가 담기는 것을 응시하며 베를리아가 그를 달랬다.
“난 지금 돌아가고 싶지 않고 너와 데이트를 하고 싶어.”
“그렇지만….”
“내가 하고 싶다는 데 싫어?”
베를리아가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반박하려던 그는 되묻는 그녀의 행동에 결국 입을 닫았다. 이 관계에서 승자와 패자는 늘 정해져 있는 법이었다.
“…그래도 혹시 어딘가 아프시면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응. 꼭 그럴게.”
웃으며 메리쉬에게 약속한 베를리아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두 사람은 다시 멈춰 섰다.
“…피 냄새?”
진한 피비린내가 코끝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주변은 모두 축제에 빠져들어 있었다. 평온하기 그지없는 이곳 어디에서 이런 냄새가 풍겨오는지 의아함이 들었다. 짙은 향에는 분명 죽음이 진하게 배 있었다.
‘구해야 해.’
그건 목소리였을까, 제 마음이었을까? 이번에는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것보다 어쩐지 이대로 누군지 모를 사람이 죽게 두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메리쉬, 미안한데 잠깐…”
“같이 가요, 베릴.”
그는 마치 그녀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베를리아의 걸음이 다급해졌다. 피를 쏟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혈향이 점차 공기 중으로 널리 퍼지고 있었다.
챙, 챙, 챙.
보통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골목 중 한 곳으로 접어들수록 두 사람의 귀에 쇠붙이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수한 공방이 오가고 있었다. 안쪽에서 여러 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댕그랑!
누군가가 검을 떨어트렸다. 마지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 한 사람을 향해 드리운 수많은 암살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새까만 머리칼이 그녀의 눈에 유독 박혀 들었다. 그대로 그들이 둘러싼 상대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안 돼…!”
베를리아가 그대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검은빛이 강렬하게 일렁였다.
그 검은빛이 암살자들이 들고 있는 암기를 감쌌다. 질서가 무너진 암기들이 제 형태를 잃고 무너져 내렸다. 그 사이에 메리쉬가 강제로 무장 해제된 암살자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모두 기절시켰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베를리아가 홀로 서 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가 말했다. 언제 또 추격자들이 올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니 이 자리에 있는 건 옳지 않았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 반응도 없이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상대로부터 피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어쩌면 움직일 상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이공간 주머니에서 가지고 있던 포션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걸 마셔요.”
남자의 검은 눈이 베를리아의 손을 쳐다봤다가 다시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이봐요, 내 말 들려요?”
그 반응을 보면서 베를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에 당하기라도 했나 싶어 바짝 다가가 사내를 살폈다.
“아, 그…윽, 괜찮, 아요.”
코앞까지 베를리아가 다가오고 나서야 남자가 화들짝 놀라 뒷걸음쳤다. 그래 봐야 움직이기 불편한지 한 걸음 물러난 것뿐이었지만.
“정신 들었으면 이것부터 마시세요.”
사내가 흘린 피로 짐작했을 때 이 상태로 움직이다가는 과다출혈이나 체온 저하로 죽을 가능성이 더 커 보였다. 기껏 살려놓은 생목숨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감사, 합니다.”
포션을 받아드는 상대의 손이 떨렸다. 손에 힘이 없어 당장이라도 놓칠 것 같았다. 베를리아가 남자의 손에 제 손을 겹쳐 잡아주며 그가 포션을 마시는 것을 도왔다.
“그걸로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따라와요.”
흑마법을 이루는 수식들이 리들턴 저택에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외부인을 함부로 데리고 가는 건 곤란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억 상으로는 이럴 때마다 베를리아 리들턴이 향하는 장소가 있었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베를리아에게서 사내를 조금 떼어낸 메리쉬가 말했다. 그에 버금가는 체구를 가진 남자를 계속 붙들고 있는 건 당연히 힘든 노릇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평민들의 주택가였다. 그중에서도 썩 잘 사는 편에 속하는.
주택 간에는 꽤 거리가 떨어져 있었고 늦은 밤이었다. 게다가 건국제가 열렸으니 대다수 사람이 집을 비웠는지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이런, 또인가요? 베를리아님.”
“부탁해, 아실.”
그곳에서 문을 열고 나온 여인이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도 들어올 수 있게 몸을 비켜 주었다. 베를리아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아실이 사내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마탑에 등록하지 않은 마법사였다. 본디 그것은 불법이었으나 베를리아 리들턴의 도움으로 아실은 마탑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그녀의 특기는 치유와 정신계열 마법이었다.
아실은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피가 멎고 당장 죽을 것 같던 상태에서는 벗어났으나 여전히 사내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아실이 잠시 멈칫하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마법이 통하질 않아요.”
아실의 말을 들은 베를리아의 시선이 빤히 남자를 향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였다.
‘태어날 때부터 마력 저항 능력이 강한 경우, 어릴 적 마법을 너무 많이 접해서 내성이 길러진 경우. 그리고 마지막은….’
베를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쩌면 남자를 괜히 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