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작별을 고하다
월왕은 그녀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몸을 고쳐 앉고는 팔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목운요를 향한 그의 애틋한 감정이 눈빛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의 아이가 목운요의 배 속에 있었다. 아홉 달만 지나면 세상으로 나와 만날 수 있으리라.
목운요를 꼭 빼닮은 눈매를 가진, 자신을 아버지라고 부를 아이를 상상하니 심장이 마구 뛰었다.
그렇게 넋이 나간 채 있다 보니 마차가 금세 목적지에 당도했다.
우항이 나지막한 소리로 아뢰었다.
“전하, 그리고 마마. 왕부에 도착하였습니다.”
목운요가 살며시 눈을 떴다. 흔들거리는 마차에 있다 보니 어느새 잠든 듯했다.
월왕은 일부러 창백하게 분칠한 목운요의 머리를 부드럽게 정리해 주었다.
“요아, 도착했다.”
“네.”
목운요는 자신을 번쩍 안아 든 월왕의 목을 팔로 감쌌다.
마차 문이 열리는 순간, 월왕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자리에는 서늘한 표정만이 드러나 있었다.
대문을 지키던 시위들은 그 기세에 넙죽 바닥에 엎드려서는 월왕이 멀어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월왕부를 염탐하던 세작도 그 모습을 보곤 도오에게 은밀히 서신을 전달했다.
서신을 확인한 도오의 표정이 석연치 않았다.
“대인, 뭐가 잘못됐습니까?”
북강 사신의 물음에 도오가 고개를 들었다.
“궁에 있는 세작의 전언에 의하면 월왕과 황제가 몸싸움까지 벌였답니다. 거기다 소양궁 주변에 금위군 병력을 배로 늘렸다고 해요. 이게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십니까?”
북강 사신들이 일제히 생각에 잠겼다. 그중 하나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앞뒤 정황을 보면 황후가 월왕비의 아이를 유산시켰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월왕과 황제가 몸싸움까지 한 게 아니겠습니까? 소양궁에 병력을 늘린 건 혹시라도 월왕이 홧김에 황후를 해할까 두려운 게 아닐는지요.”
자리에서 일어난 도오가 방을 서성거렸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실치 않습니다. 하나 월왕과 황제가 완전히 등을 돌린 건 틀림없어 보이는군요. 제가 쓴 서신을 월왕부로 보내야겠어요. 월왕부 인근에 황제가 심어 놓은 감시자들이 수두룩하니 눈에 띄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 * *
목운요는 집으로 돌아오자 긴장했던 심신이 나른하게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유구가 찾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마마, 모든 게 마마의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북강의 세작이 이쪽의 상황을 도오에게 알렸습니다. 도오가 이곳으로 서찰을 보내오고 있으니 곧 받아 보실 겁니다.”
“알겠네. 서찰을 전하는 이가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단단히 단속하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한편 월왕은 탕약을 마시는 목운요를 보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요아, 우리 아이가 아주 기특하지 않느냐? 어머니 입덧도 안 시키고 말이다.”
목운요는 임신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는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애써 빙그레 웃었다. 월왕의 빛나는 눈을 보니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아주 기특하죠. 이리 얌전히 있는 것 보세요.”
“그래. 난 가서 계획을 살펴보고 올 테니 좀 쉬고 있거라.”
이 연극은 조금의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각도로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했다.
월왕이 나가고 잠시 뒤 목운요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요 며칠 황궁에서 하도 쉬란 소리를 많이 들어 잠기운이 멀리 달아나 버렸다.
“금란.”
부름을 들은 금란이 얼른 문을 열고 들어왔다.
“마마, 부르셨습니까?”
“며칠 궁에 있는다고 이곳을 비웠는데 별일은 없었나요?”
“특별한 일 없이 평온했습니다. 다만 입을 함부로 놀린 하인 둘을 붙잡아 성 공공께서 벌한 뒤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육냥이 마마를 한차례 찾아왔습니다.”
육냥?
얼마 전 육냥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었다. 목운요와 선령이 세심히 보살폈지만 아직도 완쾌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가 마음 편히 몸을 치유하도록 근래 일은 알리지 않은 참이었다.
“육낭을 불러 줄래요?”
“네, 마마.”
별채 정원에서 육냥은 검술을 쉴 새 없이 연습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종종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채의가 차와 간식을 탁자에 놓고 있었다.
육냥은 동작을 멈춘 채 차갑게 말했다.
“이럴 필요 없소.”
채의는 냉담한 그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드시고 안 드시고는 당신의 소관이고, 가져오고 말고는 제 소관입니다. 서로 간섭하지 않는 걸로 하죠. 그리고 오늘은 알려 드릴 일이 있어 온 것입니다.”
채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월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셨어요.”
순간 육냥의 손에서 검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버렸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육냥의 눈에 맑게 갠 하늘 같은 산뜻한 기운이 스쳤다.
채의는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한쪽으로 치웠다.
“옷은 갈아입고 가시죠. 그리고 지금 마마의 건강이 좋지 못하니 주의하세요.”
“주인님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육냥이 다급하게 물었다.
“한동안 이곳에만 있었으니 밖의 일을 모르는 것도 이상할 건 없죠. 마마께서 국상 기간에 회임을 하셨어요. 북강 놈들이 이 일을 빌미로 폐하와 월왕 전하의 사이를 벌려 놓고 있는데, 그 사이에서 마마께서 해를 입으셨어요. 궁중 연회에 가셨다가 누가 미는 바람에 호수에 빠지셨지 뭡니까. 거기다 아이까지 잃으셨으니…….”
채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냥은 곧장 걸음을 돌렸다.
목운요의 처소까지 급히 달려온 육냥의 앞을 시위들이 가로막았다.
그 모습을 본 금교는 얼른 길을 터 주라고 하며, 땀범벅이 된 육냥에게 물었다.
“육냥, 어떻게 이 꼴로 왔어요?”
그때, 인기척을 들은 목운요가 방 안에서 소리를 냈다.
“들어오거라.”
방으로 들어선 육냥의 눈에 핏기없이 하얀 목운요의 얼굴이 들어왔다. 순간 칼이 심장을 파고들어 헤집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인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걱정 말거라. 그저 회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육냥이 그녀의 말을 끊어 내며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를 가까스로 참아 내는 듯했다.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목운요는 금란이 자신의 상황을 전부 전한 것으로 생각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한데 나를 찾아왔었다고? 상처가 또 덧난 건가?”
그에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주인님, 떠나고 싶습니다.”
목운요에게서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어찌 이리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육냥이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장육부가 갈가리 찢기듯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목운요 신변에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었다. 특히 그림자 호위가 따라붙고 난 뒤로는 그가 할 몫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제 그녀에게 자신은 쓸모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북강이 계략을 꾸며 그녀를 힘들게 하고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하찮게 여겼던 제 신분이 가치를 발휘할 때였다.
육냥의 결심이 서린 얼굴에 목운요는 무겁게 허락을 표했다.
“그렇게 하거라. 예전에도 말했지만 널 억지로 붙잡아 둘 생각은 없어. 지난 몇 년 동안 너에게 신세만 졌구나. 그래, 갈 곳은 정했느냐?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얼마든지 얘기하거라. 무슨 일이 있어도 도울 테니.”
사실 지금 이 순간 섭섭함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육냥의 마음을 알기에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육냥이 푹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 실은 주인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해 보거라.”
“북강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목운요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북강으로 가겠다고?”
“마마, 저는 북강의 여섯째 왕자 혁련역지입니다. 어머니의 뜻을 존중해 북강을 탈출했으나 제가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정녕 그게 이유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주인님께선 북강을 오가는 상단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상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육냥의 공허한 눈빛이 차츰 증오심으로 검게 채워졌다.
그에 목운요의 얼굴이 굳어졌다. 항상 두뇌 회전이 빠른 그녀가 이번만큼은 육냥의 말 뒤에 숨은 뜻을 바로 간파해 내지 못했다.
“육냥, 정말 돌아가 복수를 할 참이냐?”
“네. 복수할 겁니다.”
제 개인적인 복수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단 목운요의 아이를 해한 북강에 대한 복수심이 더 컸다. 피는 피로 대갚음하는 법이었다.
“육냥…….”
“주인님.”
육냥이 다시금 그녀의 말을 잘라 냈다.
“짐을 챙겨서 바로 떠나겠습니다.”
“너…….”
목운요가 미간을 좁혔다.
“갈 때 가더라도 짐은 제대로 꾸려서 가거라. 유비무환이라 하지 않던가. 그리고 제명을 데려가도 좋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상단을 이용할 수 있는 증표도 함께 내주지.”
고개를 숙인 육냥의 눈이 벌겋게 충혈됐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육냥, 이제 널 혁련역지라고 불러야겠지? 일어나게. 떠나기로 했으니 앞으로 우린 더 이상 주인과 하인의 관계가 아니야.”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저는 주인님 앞에서는 영원히 육냥입니다. 제가 어떤 신분이 되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육냥의 말투는 단호했다. 그에 목운요도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세상만사 제 예측대로 되는 일이 얼마나 있던가. 때로는 다시 예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도 있기 마련이었다.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으니 좀 더 있다가-”
“괜찮습니다.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떠나겠습니다.”
“너무 서두르는 것 같은데…….”
그러나 육냥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면 결심이 흔들려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내 그가 목운요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육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목운요가 애처로운 마음을 담아 말했다.
“육냥, 항상 조심해야 한다. 절대 무리해서는 안 돼.”
육냥이 어금니를 꽉 물었다. 눈빛에서 복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주인님, 제가…… 걱정되십니까?”
육냥의 목소리가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 속으로만 수백 번은 더 되뇐,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던 말이었다.
이번에 이렇게 떠나지 않았다면 이 말을 영영 가슴에 품고 살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