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헤어짐
목운요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침묵이 돌아오자 육냥은 담담한 눈빛으로 다시 발을 내디뎠다. 발이 천 근이나 되는 듯 몹시 무거웠다. 그가 방문을 나서는 그때, 목운요의 음성이 선명히 전해졌다.
“걱정된다.”
육냥은 차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눈에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로 올라간 입꼬리에선 순수한 행복이 엿보였다.
“너를 걱정한다. 그러니 북강에 가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살아남아야 한다. 북강에서 네가 머물 곳이 없으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도 좋아. 네 자리를 비워 두마.”
“……감사합니다, 주인님.”
북받치는 감정을 한참 추스르고 나서야 육냥이 제 목소리를 되찾았다.
목운요도 슬픔을 잠재우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천하가 넓어 재회할 날이 기약 없이 아득하오니 부디 건강하십시오.”
“……잘 가거라.”
육냥이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목운요가 의자에 천천히 기대어 앉았다.
“금란…….”
금란이 얼른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네, 마마.”
“바둑이나 같이 두죠.”
잔뜩 상심한 목운요를 보고 금란은 조심히 입을 뗐다.
“……월왕 전하를 모셔올까요?”
“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
“네.”
이내 금란이 바둑판을 가져와 반듯이 놓았다.
목운요는 바둑알을 집어 바둑판에 툭툭 내려놓았다. 그러고 있으니 조금이나마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육냥에게 남녀 사이의 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알게 된 이후 그를 전적으로 신임했다. 육냥은 언제나 그녀의 한 발짝 뒤에 서 있었다.
그런데 오늘 별안간 작별하게 되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채로…….
* * *
일을 마치고 돌아온 월왕은 울적해 보이는 목운요가 걱정돼 물었다.
“요아, 무슨 일 있느냐?”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목운요가 뻐근한 어깨를 움직여 보았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날도 한낮보다는 한결 시원했다.
“사야, 일 처리는 잘하셨나요?”
“도오가 보낸 서찰이 도착했다. 내용을 보니 저들이 가진 무기와 우리가 가진 역병 처방전을 맞바꾸려는 듯해. 일단 시간을 좀 끌다 답을 할까 해.”
“그게 좋겠어요. 북강에 항상 적대적이었는데 갑자기 승낙하면 저들이 의심을 품을지도 몰라요.”
그러면서 목운요가 무료한 손짓으로 바둑알을 만지작거렸다.
이에 월왕이 그녀의 곁에 다가가 손을 잡았다.
“오늘 뭔가 이상하구나.”
그녀에겐 뭔가 말 못 할 속사정이 있어 보였다.
목운요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나마 안정됐던 마음이 월왕의 걱정으로 다시금 일렁거렸다. 그녀도 이렇게까지 슬퍼하는 제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이미 눈시울은 붉어지고 있었다.
“사야, 육냥이 오늘 작별을 고하러 왔어요. 곧 떠난다고 해요.”
가슴이 철렁한 월왕이 목운요의 얼굴을 감싸고는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무슨 이유가 됐든 떠나는 건 육냥의 선택이다. 너도 그러지 않았느냐. 떠나고 싶을 땐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고.”
목운요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알고 있어요. 그냥…… 걱정이 될 뿐입니다.”
육냥과는 이렇게 작별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하지만 귀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마음 한쪽이 몹시도 공허했다.
“염려 말거라. 북강 쪽에 사람을 심어 두었다. 육냥이 위험해지지 않게 신경 쓰라고 하마.”
목운요가 잠이 들 때까지 옆을 지킨 월왕이 어두운 얼굴로 몸을 일으켜 뒤뜰로 향했다.
“우항, 선령을 데려오거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머지않아 선령이 그를 찾아왔다.
“월왕 전하, 운요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월왕은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얼마 전에 요아가 중독된 환각제가 후유증을 남기는가?”
“운요가 울적해하나요?”
“그래. 오늘 육냥이 작별을 고하러 온 뒤로 계속 기분이 가라앉아 있어.”
“맥을 먼저 짚어 보죠. 그래야 정확히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 좋을 대로 하게.”
목운요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꿈을 꾸는지 미간을 잔뜩 찌푸린 것이, 편한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선령이 조심스레 목운요의 맥을 짚어 보았다. 이내 그녀가 월왕에게 밖으로 나가자는 눈짓을 했다.
“맥은 정상입니다.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월왕의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방금 자네가 맥을 짚었는데도 운요는 깨지 않았어. 워낙에 잠귀가 밝아서 작은 기척에도 잠을 깨는 편이었는데 말이야.”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선령의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럼 당분간 제가 곁을 지키고 있겠습니다. 그래야 이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파악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목운요가 선령을 얼마나 신임하는지 알기에 월왕은 고민 없이 승낙했다.
“그렇게 하게. 그럼 고생 좀 해 주게.”
* * *
이튿날 아침이 됐다. 막 잠에서 깨어난 목운요가 놀란 얼굴로 월왕을 바라봤다.
“사야, 어찌 이리 일찍 기침하셨어요?”
월왕이 목운요의 배를 가볍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이만 생각하면 기분이 들떠 잠이 오지 않는다.”
“그럼 이제 계속 잠을 못 주무시겠네요.”
목운요가 장난스레 웃었다. 이제야 원래 그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이내 그녀와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월왕이 당부의 말을 건넸다.
“요아, 오늘 고모님과 함께 능서행궁에 간다지? 나도 오늘 서릉을 떠나니, 거기서도 몸을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알겠느냐?”
고개를 끄덕인 목운요가 안쪽으로 가서는 향낭 하나를 꺼내 왔다.
“시간이 없어서 옷을 짓지는 못했어요. 직접 만든 것이니 이 향낭이라도 항상 지니고 다니세요.”
“고맙다.”
월왕이 깊은 눈빛으로 목운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를 눈에 담아 마음속 깊이 새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동안 선령이 곁에서 지켜 줄 것이다. 따로 부탁해 뒀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
“사야, 아무 염려 마세요. 아이와 함께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 * *
목운요가 장공주와 함께 능서행궁으로 향하던 그때, 도오는 부하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월왕비가 눈에 띄지 않는 마차를 타고 공주부로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장공주가 사람들을 대동하고 서릉을 떠나 능서행궁으로 향했습니다. 대인께서 귀띔해 주셨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들이 탄 마차를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월왕비가 공주부에 갔고, 장공주가 서릉을 떴다라…….”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도오가 눈꼬리를 들썩였다.
“월왕이 오늘 내로 움직이겠군. 잘 듣게. 월왕이 서릉을 빠져나가면 월왕을 습격하게. 하나 절대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되네.”
“알겠습니다.”
“우리의 신분도 발각되지 않아야 해. 혹여 붙잡히면 그 자리에서 자결하도록 명령하게.”
황제가 보낸 자객이라고 믿게 하려면 북강이 배후라는 흔적을 없애야 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도오가 손을 휘저어 부하를 물렸다. 그의 눈에 음흉한 기운이 스쳤다.
모름지기 벼랑 끝에 몰려야 반격의 욕망이 꿈틀대는 법이다. 저 자신도 중상을 입은 데다 월왕비까지 습격을 받으면 월왕은 북강의 제안을 거절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 * *
한편, 뒤숭숭한 마음에 목운요는 마차의 작은 창으로 바깥 정경을 바라봤다.
금란이 따뜻한 물 한 잔을 목운요에게 건넸다.
“비 마마, 물 좀 드시면서 쉬세요. 한참 가야 합니다.”
“고마워요.”
목운요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로 입을 축였다. 하지만 답답한 마음은 풀릴 길 없이 그대로였다.
선령이 손을 뻗어 목운요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운요,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해.”
순간 놀란 목운요가 저도 모르게 손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혹시 내가 아이에게 안 좋은 행동이라도 한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계속 이리 울적해 있으면 그때는 정말 태아에게 좋지 않을 거야. 임신 초기에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해.”
선령이 목운요를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기분 상태가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걱정되는 마음에 선령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전에 내가 환각제에 대해 말한 걸 기억하지? 생각이 많아지게 된다고 말이야. 심한 경우에는 상념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고 해.”
“그 말은 내가 또 그 환각제에 중독됐다는 거야?”
목운요가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래, 틀림없어.”
목운요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 하지?”
“일단 마음의 평정을 찾아야 해. 마음이 편안해져야 환각제가 힘을 못 쓰니까.”
“그래.”
그때, 마차 앞으로 숲이 나타났다.
금란이 작은 소리로 목운요에게 알렸다.
“비 마마, 준비하세요.”
“알겠어요.”
목운요는 마차 벽을 힘껏 짚었다. 머릿속에는 언제, 어떻게 환각제에 중독됐는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미심쩍은 지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마차가 격렬하게 요동침과 동시에 사람들의 매서운 고함이 울려 퍼졌다.
선령은 금란과 금교에게 목운요를 보호하라는 눈짓을 보내며 입을 한쪽으로 비틀었다.
만에 하나 생길 수 있는 위험에 대비해, 장공주와 허연한, 목운요는 모두 다른 마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그리고 각 마차에는 무술이 뛰어난 시위와 독을 능히 다루는 장인을 배치하고, 마차 벽은 화살이 뚫을 수 없도록 특수 처리를 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감히 이들에게 위협을 가하려면 제 목숨을 버릴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죽여라!”
밖에 있는 자객들은 더 목청을 높였고, 화살이 마차에 날아드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안에 타고 있는 이들은 겁에 질려 몸을 바짝 움츠렸다.
그러나 선령은 거대한 산처럼 미동도 없이 입구를 지켰다. 고함이 차츰 잦아들자 그녀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창문을 열어젖힌 뒤 손에 쥐고 있던 약 가루를 사방에 날렸다.
마차를 둘러싸고 몰려오던 북강의 자객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독을 흡입하고 바닥으로 픽픽 쓰러졌다.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은 시간이었다. 목운요 일행을 해치려던 북강 자객 일부가 현장에서 붙잡혔고, 나머지는 모두 죽어 나갔다.
상황을 보고받은 장공주는 마차 창을 열어 차디찬 음성으로 하명했다.
“굳이 살려 둘 필요 없다. 당장 없애 버려라.”
“예!”
생포된 자객 다섯의 머리가 시위의 검에 댕강 잘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