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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77화 (377/442)

377화 그녀의 선택

양국 교전 시 행군할 때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바로 날씨, 지형, 인심이었다.

날씨는 불가항력적인 것이고, 인심도 어떻게 통제하느냐에 달려 있어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유독 지형은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달라져 굉장히 핵심적인 요소였다.

북강과 대력조가 여러 차례 교전 끝에 결국 대치 국면에 이르게 된 것도 접경 지역에 위치한 고원 지대 때문이었다.

이 고원 지대에 가로막혀 양측 모두가 섣부른 공격이 어려웠고, 쉽게 매복당할 수 있어 적진 깊숙이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만약 대력조에서 북강의 지형을 꿰뚫었다면 그건 마치 천안(天眼,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환히 보는 신통한 마음의 눈)이 열린 거나 마찬가지여서, 북강에게 있어서는 큰 위협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말에 목운요는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비단 천으로 지도를 다시 덮게 했다.

“제가 만든 지도가 사신 대인의 눈에 거슬렸나 보군요. 저는 단지 자세히 표시한 대력조 지도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북강과의 접경 지역도 자세히 표기한 것뿐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자수는 균형을 중요시하는지라, 뜬금없이 여백을 두면 전체적인 미가 파괴되거든요.”

북강 사신은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갑자기 자수와 여백에 대해 강의하다니?

그때, 황제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심함에 있어 운요를 따라갈 자는 없지. 여봐라, 이 강역도를 짐의 장보각(藏寶閣)에 갖다 두고 병사를 두어 지키되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거라.”

“예.”

“요아. 짐이 몇 년 동안 모아 둔 진주, 비취와 보옥이 있는데 연회가 끝난 뒤 몇 상자 가져다주마.”

그에 목운요가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래. 이만 연회를 이어 나가거라.”

북강 사신은 더 질문하고 싶었지만, 대력조 신하들이 하나둘씩 일어나 서로 술을 권하는 바람에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북강 공주는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목운요와 월왕을 응시하였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술잔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 * *

목운요의 강역도 선물은 마치 큰 바위처럼 북강 사신들의 마음에 탁 걸렸다. 북강으로 돌아가기 전에, 대력조가 북강의 자세한 지형을 알고 있는지 기필코 알아봐야 했다.

좌불안석하는 북강 사신들의 모습을 보고 대력조 관원들은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서로 원수 같던 그들이기에 상대방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겼다.

황제 또한 기분이 좋은 나머지 연회 내내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이윽고 연회가 끝난 뒤, 정전이 다시 적막해졌다.

목운요는 바닥에 꿇어앉은 제 귀비를 보며 낮은 소리로 장공주에게 물었다.

“외할머니, 저희 먼저 갈까요?”

“아니다. 오래된 과거사이긴 하나, 앞으로 너희가 마주해야 할 일일 수도 있으니 들어 보는 것도 나쁠 게 없다.”

유왕과 유왕비도 숨죽인 채 제 귀비의 뒤에서 함께 무릎 꿇고 있었다.

용좌에 기대어 있는 황제의 눈빛이 유난히 깊었다.

“완안(宛顔), 자네 마음에 줄곧 응어리가 맺혀 있다는 걸 짐도 짐작했지만, 한 번도 소홀히 대한 적은 없다.”

황제가 이름을 부르자, 제 귀비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폐하께선 늘 한결같이 신첩에게 잘해 주셨습니다.”

“그걸 안다면 그에 맞게 행동했어야지.”

황제의 말투에서 노여움이 느껴졌다.

제 귀비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폐하. 신첩과 입소가 비록 혼약한 사이지만, 한 번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른 적은 없습니다. 이는 폐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있었다면 부친께서도 저를 후궁으로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위국후의 충성심은 짐도 잘 알지만, 자네의 마음은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신첩…… 폐하께 실망을 안겨 드렸습니다.”

황제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완안, 그만 일어나거라. 자네는 짐의 귀비이자 군유의 생모이기에, 더 이상 마음 가는 대로 할 수 없다. 문입소가 아직 궁에 머물러 있으니, 마지막으로 한번 만나게 해 주마.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과거를 전부 잊고, 더 이상 과거에 얽매여 눈물 흘리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황제도 황후를 깊이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에 빗대어 생각해 보니, 그녀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제 귀비가 황제를 향해 공손히 인사 올렸다.

“폐하의 호의에 감사드리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두 과거일 뿐,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아까 본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결국 그녀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사랑을 위해 온몸을 던지기엔, 그녀의 신경은 온통 군유의 황위 쟁탈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무런 이득도 없는 감정에 몸과 마음을 허비할 여유가 없었다.

장공주의 굳은 얼굴도 그제야 서서히 풀렸다. 제 귀비가 사랑에 눈이 멀어 군유의 미래를 망치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

한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군주라면 허점 없이 완벽해야 했다. 그런 군주의 모친이 그릇된 선택을 한다면 후궁은 또다시 피바다가 될 게 뻔했다.

유왕, 유왕비가 제 귀비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왕비는 회임 중이니 먼저 력양궁으로 돌아가거라. 군유는 남아서 제 귀비를 모시거라.”

“예.”

황제가 장공주와 함께 떠난 뒤, 유왕도 제 귀비를 부축해 후궁으로 향했다.

목운요도 정전을 나서려던 그때, 바닥에 남아 있는 핏자국이 보였다. 그녀가 이덕을 불렀다.

“이 공공, 이 핏자국은 뭔가요?”

이덕이 바닥을 한 번 보더니 곧바로 내시를 시켜 깨끗이 치웠다.

“아까 다녀간 금사가 남긴 것입니다.”

“폐하께서 금사를 궁에 머물게 하셨다던데, 혹시 어디 있는지 아나요?”

“정전을 나서자마자 피를 토하길래, 소인이 곧바로 태의를 불러 진맥했더니 독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은 숨이 멎었습니다. 오늘같이 좋은 날에 폐하의 기분이 상할까 봐 따로 아뢰지 않았는데, 소인도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독이요?”

목운요의 머릿속에 순간 릉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네. 태의 말로는 단장초(斷腸草)를 복용했다고 하더군요. 태의들이 해독제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극구 거부하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습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목운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월왕이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요아, 혹 그분을 뵈러 가고 싶은 것이냐?”

목운요가 잠시 멈칫했다가 웃으며 답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오늘 일을 겪고 느낀 점이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쓸데없는 참견을 할 생각은 없어요.”

월왕이 그녀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말했다.

“난 그냥 운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에 목운요는 활짝 웃으며 월왕과 손깍지를 꼈다.

“저도 사야와 평생 함께하며 일말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월왕은 밤하늘의 별을 모두 담은 듯한 매혹적인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손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쩜 이리도 잘생긴 거죠?”

순간 월왕의 귀가 빨개졌다. 눈앞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웃고 있는 목운요는 꼭 귀여운 고양이 같았다.

“이 얼굴은 너에게만 보여 줄 테니, 너도 나만 볼 수 있도록 해.”

“좋아요.”

* * *

유왕은 제 귀비의 침전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그 누구도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알 수 없었고, 그 후로 문입소란 이름을 두 번 다시 들을 수 없었다.

목운요가 제 귀비에게 인사드리러 갔을 때에도 눈이 약간 빨간 것 외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고, 세뱃돈도 후하게 받았다.

돌아오는 길에 금란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저, 제 귀비 마마께서 그분의 사망 소식을 들으셨을까요?”

“궁 안은 소식이 가장 빨리 도는 곳이라 당연히 알고 있을 거예요.”

“그럼…… 엄청 슬프시겠네요.”

목운요가 고개를 들어 우중충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세월이 모든 걸 다 바꿔 놓았으니, 슬퍼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시간이란 참으로 냉정하다. 제아무리 굳은 맹세를 한다 해도, 시간 앞에서는 결국 한 자락의 추억으로 남을 뿐, 다신 돌아갈 수 없었다.

금란도 한숨을 내쉬며 탄식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에 목운요가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지난번에 우항한테서 빙등 선물을 받았다면서요?”

“소저, 그건 빙등이 아니라 얼음덩어리였어요!”

둥글둥글한 얼음덩어리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고 그 안에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어찌나 둔탁한지 떨어트리면 발등이 깨질 수도 있었다.

“저런. 처음으로 여인한테 주는 선물인데 어쩜 그런 걸 준비했지? 다음에 왕야께 혼 좀 내라고 할게요.”

금란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소저, 그리 큰일도 아닌데 굳이 혼낼 필요까진 없어요.”

얼음덩어리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촛불을 켜면 반짝이는 게 나름 봐줄 만했다.

“우리 금란 마음도 몰라주고 얼음덩어리를 보냈잖아요.”

“소저!”

목운요의 장난에 금란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그만 놀리세요.”

“금란. 비록 우리 두 사람이 주인과 하인 관계지만, 그간 나눈 정은 자매 못지않다고 생각해요. 전에 사야께서 금란과 금교 두 사람의 배필을 알아봐 주겠다 하셨는데, 기회가 되면 서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요.”

금란이 쑥스러운 듯 낮게 대답했다.

“소인…… 소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급할 건 없으니, 일단 우항을 잘 지켜보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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