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376화 (376/442)

376화 회심의 일격

문입소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며 대답했다.

“전하, 예를 거두십시오. 그때 급하게 서릉을 떠나 오랫동안 왕래가 없다 보니, 의부님과의 사이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오늘 급히 오느라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때, 릉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문입소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문입소, 신중하게 말을 뱉으시오!”

분명 제 귀비와의 사이를 밝혀 그녀를 망쳐 버리겠다고 약속했거늘, 이제 와서 딴소리를 하다니!

하나 문입소는 여전히 침착한 얼굴일 뿐이었다.

“릉왕 전하. 이렇게 의매와 재회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당신…….”

릉왕이 곧바로 황제를 향해 아뢰었다.

“부황. 실은 문입소 이자가 먼저 소자를 찾아와 자신이 제 귀비와 혼약을 한 사이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제 귀비가 입궁해 비빈이 된 거라고 일렀…….”

“군릉, 대체 어디까지 짐을 실망시키려는 것이냐?”

표정이 어두워진 황제의 두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릉왕이 똑똑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우매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북강 사신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이렇게 황실의 체면에 먹칠을 하려 들다니…….

릉왕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부황, 소자는…….”

“제 귀비의 과거에 대해서는 이미 위국후로부터 다 전해 들었으니, 이제 그만 내려가 보거라.”

“부황…….”

“썩 물러나라!”

황제가 무서운 기세로 호통치자, 릉왕이 주먹을 꽉 쥔 채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사이 제 귀비는 문입소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서릉에 왔으니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아닙니다.”

문입소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불치병에 걸린 몸이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의매를 마지막으로 한번 보고자 이렇게 찾아온 것뿐입니다.”

“…….”

그녀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문입소는 허리를 굽혀 칠현금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소원을 이뤘으니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이 칠현금은 두 사람이 같이 고른 것이었다. 평생 함께할 줄 알았으나 제 귀비의 입궁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칠현금이 오랫동안 곁에서 위로가 되어 주어, 그와 함께 대력조를 떠돌아다녔다.

제 귀비는 애절한 눈빛으로 눈앞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준수했던 외모는 세월에 뒤덮였고, 머리에는 흰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유독 변함이 없는 것은 청아하고 너그러운 풍채였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예.”

문입소가 뒤돌아서자 궁녀가 길을 안내했다.

릉왕은 독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속인 문입소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리고 제 귀비를 굳게 믿는 부황이 미워졌다. 정말 단 일말의 의심도 없단 말인가? 결국 전부 다 자신의 잘못인 걸까?

이경주는 그런 릉왕을 향해 계속 눈치를 줬다. 이미 심란한 황제의 심기를 더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목운요는 유왕비와 눈빛을 교환하고 난 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유왕비가 제 귀비를 자리로 이끌며 말했다.

“모비. 외삼촌께서 서릉으로 돌아오셨으니 앞으로도 만날 기회가 충분히 있을 겁니다. 그러니…… 우욱…….”

유왕비가 갑자기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제 귀비가 놀라서 물었다.

“방화, 왜 그러느냐?”

“별일 아닙니…… 윽…….”

그에 목운요가 얼른 다가가 유왕비의 맥을 짚어 보았다.

잠시 뒤,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폐하, 유왕 전하, 감축드립니다. 유왕비께서 회임하셨습니다. 두 달이 거의 되어 갑니다.”

유왕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곤 무척이나 기뻐했다.

“회임? 회임이라니! 드디어 나도 아버지가 되는구나!”

유왕의 표정은 감격과 환희를 끊임없이 오갔다. 연회 장소만 아니었더라면 지금 당장 유왕비를 품에 안고 몇 바퀴 돌았을 것이다.

어두운 표정이던 황제도 유왕비의 회임 소식에 얼굴이 밝아졌다. 태자 후보로 생각해 왔던 유왕에게 이제 자식까지 생겼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유왕비가 큰일을 해냈구나. 상을 주마!”

황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원들은 너도나도 축하 인사를 올렸다. 순식간에 연회장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반면 유독 릉왕만이 속이 타들어 갔다. 유왕과 유왕비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웠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환하게 웃고 있는 목운요를 보며 장난스레 물었다.

“운요는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느냐?”

이에 목운요가 사람 마음을 사르르 녹일 듯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앞서 황자 전하들께서 올린 선물을 보니, 제 선물이 턱없이 부족해 보여 내놓기 부끄럽습니다.”

“어디 한번 보기나 하자. 정말 짐의 마음에 안 들면 아주 톡톡히 혼낼 것이다.”

“외할머니…….”

목운요가 억울한 눈빛으로 장공주를 쳐다보았다.

장공주는 그런 외손녀가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의 편을 들어 주었다.

“황상, 절대로 혼내시면 안 됩니다. 요아가 선물을 준비하느라 여간 애를 쓴 게 아닙니다. 저도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렇단 말이지? 운요, 어서 보여 주거라.”

장공주도 놀랐다는 말에 황제는 더욱더 선물의 실체가 궁금해졌다.

이내 내시들이 빨간 비단 천으로 가려진 높다란 물건 하나를 들고 왔다. 언뜻 보면 병풍 같아 보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컸다.

목운요가 비단 천을 벗기는 순간,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병풍은 병풍인데, 이렇게 큰 병풍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병풍을 수놓은 건 식상한 그림이 아니라, 한눈에 봐도 무척이나 정교한 지도였다.

큰 지도 안에는 산천과 고원, 평야, 성지, 도로 등이 각각 다른 느낌의 자수 실로 수놓아져 있었고, 옆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글씨로 ‘대력국 강역도’라 적혀 있었다.

황제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병풍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운요, 이건…….”

대력조는 영토가 하도 넓다 보니 주부(州府) 파악이 쉽지가 않았다. 하물며 지형 지도는 더욱 언감생심이었다.

목운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폐하, 이건 일 년 전부터 월왕 전하와 함께 준비해 온 선물입니다. 각 지역의 지리와 산천, 지세를 통달한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또 수많은 서적과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 낸 것이지요. 폐하의 영명함으로 이루어진 태평성세를 담은 이 강역도를 드림으로써, 저희 대력조가 앞으로 더욱더 강대해지고 폐하께서도 만수무강하시길 기원하는 바입니다.”

지도에 담긴 광활함에 황제는 가슴속에서 자부심이 차올랐다.

“요아, 애 많이 썼다!”

유왕도 이 틈을 타 칭찬을 얹었다.

“이토록 어마어마한 선물을 준비해 놓고 보잘것없다며 겸손을 차리다니, 이에 비하면 소자들의 선물이야말로 내놓기가 부끄러운 것이지요.”

황제도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목운요를 바라보았다.

“운요, 짐이 반드시 상을 내려야겠구나. 갖고 싶은 게 있거든 뭐든지 말해 보거라.”

“폐하,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래도 혼기가 코앞이라, 금은보화 같은 혼수가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직접적인 목운요의 요구에 황제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짐이 듣자 하니, 운요 네가 벌써 누님의 창고를 다 비워 냈다던데, 설마 혼수로 금광이라도 가져가고 싶은 것이냐?”

유왕은 문득, 전에 월왕에게 들었던 목운요의 수입이 떠올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역시, 목운요 자체가 금광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영원히 마르지 않는 금광이었다!

목운요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 혼수가 넉넉해야 시집가서 괴롭힘당하지 않는답니다.”

“걱정 말거라. 혹시라도 군월이 널 괴롭히면 네 외할머니보다도 짐이 먼저 나서서 혼낼 테니.”

황제는 목운요의 선물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생글생글 웃는 목운요를 보고 있자니, 불현듯 그녀 같은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나마 이런 예쁘고 똑똑한 아이가 곧 며느리가 된다는 사실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한편, 북강 사신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 있었다. 결국 북강 사신 중 하나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온한 군주를 뵙습니다. 군주께 뭐 하나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목운요가 경계의 눈빛으로 뒤돌아보며 답했다.

“뭐가 궁금하신지요?”

“강역도 모퉁이에 북강 지형이 그려져 있던데, 보아하니 완전히 그려지지 않았더군요.”

목운요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제가 그리고자 한 건 대력조 강역도입니다. 당연히 대력조 영토를 중심으로 그리는 게 맞지요. 북강도 그려지길 원하시는 거라면 폐하의 동의를 거치셔야 할 것입니다.”

목운요의 말에 관원들이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온한 군주의 대답이 아주 교묘했다. 북강을 지도에 포함시킨다는 건 북강이 대력조에 귀순함을 의미하고, 귀순하고 싶다 해도 황제의 선택에 달렸다고 하니, 듣는 사람들마저 속이 다 시원해지는 대답이었다.

반면 북강 사신의 표정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북강은 대력조의 영토가 아니기에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지요…….”

목운요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럼 뭐가 궁금하신 거죠?”

“온한 군주, 지도를 보니 북강과 대력조의 접경 지역을 유독 자세히 그리셨더군요…….”

사실 그는 지형 관찰에 능한 사람이었는데, 북강의 작은 강에서 뻗어 나간 물줄기마저 지도에 자세히 드러나 있는 걸 보고 크게 놀란 상태였다.

과연 대력조에서 접경 지역의 지형만 꿰뚫고 있는 건지, 아니면 북강의 다른 지형마저 훤히 알고 있는 건지가 내심 궁금했다.

만약 전자라면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을 테지만, 후자라면 굉장히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