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오래전의 당부…….
황제의 얼굴에 화색이 번졌다.
“군유의 선물이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크게 상을 내리도록 하마.”
한편, 북강 사신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굳어 있었다. 대력조의 군력이 향상하면 그만큼 자신들에 대한 위협이 커지는 것이기에,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었다.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한 것뿐이라 부황의 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에 황제는 더욱 상냥해진 눈빛으로 유왕을 바라보았다.
“짐의 걱정을 덜어 주려는 그 마음이 큰 위안이 되는구나.”
다음엔 진왕 차례였다. 궁녀들은 진왕을 부축하려다가 그의 지시에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났다.
진왕은 한 손으로 탁자를 지탱하여 조금씩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어느새 스스로의 힘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황. 소자는 손수 불경 백 권을 베껴 부황의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황제의 놀란 얼굴은 곧장 기쁜 기색으로 바뀌었다.
“군진, 다리가 회복된 것이냐?”
“스스로 설 정도는 됩니다. 다만 독소가 아직 남아 있어, 완전히 회복하려면 시일이 조금 더 걸릴 듯합니다.”
관원들도 눈앞의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왕의 다리가…… 곧 회복된다니? 앞으로 조정이 꽤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다행이구나. 널 치료한 의원한테 후한 상을 내려야겠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말투도 한결 경쾌해졌다.
“그래, 군월은 어떤 선물을 준비했느냐?
월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부황. 소자가 준비한 건 속된 금은보화들뿐이라 형님들에 비하면 턱없이 초라합니다.”
그러면서 그가 소매에서 종이를 꺼내 내시한테 건넸다.
그 모습에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서립, 어디 한번 읽어 보거라.”
서립이 목청을 가다듬고 나서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벽옥여의, 취옥배추…….”
그는 한참이 걸려서야 선물 목록을 다 읽을 수 있었다.
황제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웃으며 말했다.
“군월. 이건 선물이 아니라 모든 자산을 탈탈 털어서 주는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냐?”
“저에게는 재산을 잘 굴리는 운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곧 목운요와 혼사를 치를 거라, 앞으로 가난에 허덕일 일은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월왕의 대답에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황제는 헛웃음을 터트리다가, 한쪽에서 가만히 웃고 있는 릉왕을 보며 물었다.
“군릉, 네 선물은 무엇이냐?”
“부황, 바로 보여 드리지요.”
릉왕의 차가운 눈빛이 황제 옆에 앉아 있는 제 귀비를 스쳐 지나갔다.
내시가 릉왕의 지시에 따라 칠현금 한 대를 정전 가운데에 내려 두었다.
“강 금사(琴師), 들어오시지요.”
이내 한 중년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준수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앞을 보지 못하는지, 궁녀의 도움을 받아 칠현금 앞에 자리 잡았다.
“폐하를 뵙습니다. 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드립니다.”
남자를 본 순간, 제 귀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곧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그 모습을 본 목운요는 문득 그녀에게 입궁하기 전 약혼자가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 제 귀비의 표정을 보아하니 분명 눈앞의 남자와 연관이 있을 듯했다.
칠현금 앞에 앉은 남자는 손으로 현을 지그시 눌렀다. 흘러나오는 칠현금 소리가 유난히 듣기 좋았다.
한데 연주곡이 다름 아닌 구봉황이었다…….
궁중 연회에서 구봉황을 연주하다니, 대체 릉왕은 무슨 꿍꿍이로 이 사람을 이곳에 데려온 거란 말인가.
울며 호소하는 듯한 남자의 연주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제 귀비는 침통한 표정으로 눈물까지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릉왕의 입가에는 짙은 웃음이 번졌다. 긴 시간을 들여 남자를 수소문한 게 헛된 일이 아닌 듯했다.
한편, 장공주의 표정에는 불쾌함이 드러났다.
손아랫사람들의 싸움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황위 쟁탈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릉왕이 제 귀비의 과거를 들춰내 공격하는 것도 어찌 보면 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릉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큰일을 할 사람이라면 자신의 희로애락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릉왕은 마치 온 천하에 자신이 꾸민 일인 것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 나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황제가 눈물을 훔치고 있는 제 귀비를 눈치채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제 귀비,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제 귀비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공손히 대답했다.
“구봉황 곡조를 들으니 옛일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그에 릉왕이 끼어들었다.
“부황. 이분은 소자가 우연히 알게 된 금사인데, 평생 한 곡만 연주했다고 하더군요. 바로 방금 들으신 구봉황이란 곡입니다. 듣자 하니 제 귀비께서도 칠현금에 조예가 깊다던데, 평가해 보심이 어떤지요?”
굳어 있는 표정과 달리, 제 귀비의 두 눈에는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릉왕께 실망을 안겨 드려서 어쩌죠. 입궁한 후로 칠현금을 멀리하며 살아서 평가할 만한 주제가 되지 못합니다.”
릉왕이 냉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쉽군요. 여기 계신 강 금사께서 오래전에 귀비 마마로부터 평가를 받은 적이 있어, 언젠가 다시 만나 한 번 더 평가받고 싶은 마음에 오랜 기간 실력을 연마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제 귀비의 머리에 꽂은 봉황 보요가 바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저는 전혀 그런 기억이 없네요.”
“기억력이 아무리 나쁜들 옛 애인까지 기억 못 할 정도인가요?”
“무엄하다!”
참다 못한 황제가 큰 소리로 호통쳤다.
“군릉, 지금 그게 귀비한테 할 소리냐?”
“부황. 오늘 같은 날에 드려서는 안 될 말씀인 줄 알면서도, 부황이 기만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 이렇게 아뢰는 바입니다. 여기 강 금사의 이름은 강수한이며, 오래전에 썼던 이름은 바로 문입소(文立霄)입니다!”
릉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군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문씨 가문은 황제의 스승을 두 명이나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중 문입소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천하제일 공자라는 별명까지 얻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문씨 가문도 점점 쇠퇴해, 이십여 년 사이에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세가로 전락하였다.
한 관원은 금사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더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맞아.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문 공자가 확실하네!”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사람들의 대화에 릉왕의 입꼬리는 다시 올라갔다.
“부황. 이분이 바로 예전에 서릉에서 이름을 떨쳤던 문입소 공자입니다. 그리고 제 귀비의 옛 애인이기도 하지요!”
그 순간, 유왕이 두 눈에 불을 켠 채 소리쳤다.
“형님, 말을 가려서 하시지요!”
“난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제 귀비의 표정을 보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유왕이 고개를 돌려 제 귀비를 쳐다봤다.
그녀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최대한 침착한 척하려 했지만, 눈물은 여전히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릉왕은 이때다 싶어 계속 몰아세웠다.
“귀비 마마. 두 분이 오랜만에 재회했는데 할 얘기가 없으신가요?”
이에 몸을 일으켜 세운 제 귀비가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눈물이 창백한 얼굴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떠나기 전까지 멀쩡했던 눈이 왜 이 모양이 된 거예요?”
문입소가 자리에서 일어나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드러난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지만,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뿐이라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담지 못했다.
“서릉을 떠나 낙성으로 가다가 강도떼를 만났습니다. 그로 인해 눈을 다쳤는데 점차 앞이 안 보이더군요.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나 어둠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데에 큰 지장은 없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시력을 잃었으니, 그간 고생 많으셨겠어요.”
“처음엔 절망적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차피 이 세상에 더 이상의 미련이 없어 보이든 안 보이든 크게 상관이 없었습니다.”
문입소의 말투는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제 귀비의 두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쏟아졌다.
전에 두 사람은 함께 서릉을 떠나 정처 없는 떠돌이 삶을 살자고 약속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제 귀비가 강제로 입궁하게 된 후, 혼자 서릉을 떠난 문입소는 그녀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낙성에 가다가 두 눈을 잃게 된 것이었다.
“봄의 낙성은 모란꽃이 절경을 이룬다던데, 미처 보기도 전에 두 눈을 잃게 되다니 참으로 유감스럽군요.”
“직접 보진 못했지만 낙성에 가서 모란꽃 향을 맡았습니다. 따스한 바람과 은은한 꽃향기는 사람을 취하게 했고, 한 번의 들숨만으로도 꽃이 만발한 광경을 눈앞에서 보는 듯했습니다.”
제 귀비는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유왕과 유왕비가 양쪽에서 그런 제 귀비를 부축했다.
“모비…….”
제 귀비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유왕에게 인사 올리라며 눈짓했다.
“릉왕 말대로 입소와 난 오래전에 알고 지내던 사이란다. 그러고 보니 군유한테는 외삼촌이 되겠구나.”
유왕이 깜짝 놀라 하며 물었다.
“외삼촌이요?”
“그래. 우리 사이에 혼약이 있긴 했지만, 그건 단지 네 외할아버지와 문 씨 어르신께서 구두로 한 약속이었을 뿐이다. 입소는 벼슬길에 관심이 없어 혼약도 취소되었지. 대신 양가의 친분을 위해 네 외할아버지께서 입소를 의자(義子, 의로 맺은 아들)로 삼으셨다. 그러니 군유, 너한테는 외삼촌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지.”
이건 오래전 문입소가 떠날 때 눈물을 머금고 한 자, 한 자 당부한 말들이었다. 혹시라도 나중에 둘 사이의 혼약이 제 귀비의 앞날을 가로막는 약점이 될 때를 대비해서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이 헤어지던 그 장면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제 귀비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또 맴돌았다.
그 아픔은 마치 기생충처럼 밤낮없이 그녀의 뼈와 살을 갉아먹었다. 다시 만나는 날이면 아픔이 무뎌질 줄 알았건만, 외려 한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유왕은 고통으로 가득 찬 제 귀비의 두 눈을 보고 뭔가 숨겨진 게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모비의 명성이 걸려 있는 이 순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군유, 외삼촌을 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