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배 속의 괴물
유왕은 얼른 다가가 설명했다.
“부황. 월빈 마마께서 저희 신방에 나타나 비수로 방화를 협박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운요에게 낙태 처방을 내리라고 협박까지 하는 바람에, 급한 마음에 월빈 마마를 다치게 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부황.”
릉왕이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설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월빈이 어렵게 가진 아이를 애지중지하진 못할망정 낙태하려고 하다니? 핑계를 대더라도 믿을 만한 핑계를 대야지.”
“형님, 이런 상황에서도 이웃집 불구경하는 듯한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네요.”
연회에서부터 꼬투리를 잡던 릉왕이 또다시 비아냥대자, 참다못한 유왕이 물러서지 않고 대들었다.
릉왕은 옷소매를 힘껏 휘두르며 언성을 높였다.
“유왕! 네가 지금 월빈을 다치게 한 것도 모자라, 사실이 들통날까 봐 형님한테까지 무례를 범하다니, 실로 무엄하구나! 부황, 군유를 좀 보세요. 공을 세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윗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행실이 악랄해졌습니다.”
그에 유왕은 민방화의 팔과 목에 난 상처를 보여 주며 말했다.
“부황, 보십시오. 이게 바로 월빈이 비수로 저지른 만행입니다. 뿐만 아니라 쇠뇌 기관까지 준비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방화와 함께 죽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군월과 운요가 증인입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릉왕은 여전히 가만있지 않았다.
“너와 군월의 돈독한 사이로 봤을 때 당연히 네 편에 설 게 분명하지. 목운요도 월왕과의 관계 때문에 어떻게든 감싸려 들겠고. 군유, 아주 치밀한 작전이구나.”
그때, 목운요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릉왕 전하께서 월빈 마마와 배 속의 아이에 대한 관심이 지극하시군요. 한데 지금 어깨에 중상을 입어 피 흘리고 있는 월빈 마마는 보이지 않으시나요? 정말로 월빈 마마를 위하신다면 당장 태의를 불러 상처를 치료해 주셔야죠.”
“네가 뭔데 끼어드는 것이냐!”
“제가 모든 걸 지켜본 증인인데, 당연히 말할 자격이 있지요. 유왕 전하께선 폐하께 사실을 아뢰고 죄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도 전에 릉왕 전하께서 먼저 날뛰며 예의 없이 행동하시기에 저도 몇 마디 보탠 건데, 무슨 문제라도 되나요?”
목운요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릉왕을 쏘아보았다.
그사이 황제가 내부를 쭉 훑어보더니 월빈에게서 시선을 멈추었다.
“태의를 불러 상처를 치료하거라.”
곧 태의가 안으로 들어와 월빈의 어깨에 꽂힌 검을 빼냈다.
비록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월왕도 어느 정도 여지를 남겨 두어 치명적인 중상을 입히진 않았다.
태의는 곧장 지혈을 한 후 상처를 붕대로 동여맸다.
황제가 월빈의 튀어나온 배를 보며 물었다.
“월빈, 취용거에서 요양하지 않고 여기는 왜 왔는가?”
월빈은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폐하, 제 배 속에 괴물이 들어 있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그게 무슨 헛소리냐?”
“헛소리가 아니에요. 목운요, 저 나쁜 년도 저를 도와주지 않고, 덕비도 나 몰라라 하고,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아요. 이 괴물을 죽여야 합니다. 죽여야 한다고요!”
황제가 무서운 표정으로 웅크려 앉더니, 한 손으로 소우의의 목을 힘껏 잡았다.
“네 배 속의 아이가 괴물이면 짐은 무엇이란 말이냐?”
목이 졸린 소우의는 마치 어부의 손에 잡힌 물고기처럼 입만 뻥긋뻥긋했다. 두 눈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폐하, 신첩이 죄를 지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황제의 손등에 핏줄이 선 걸 보고 장공주가 나서서 말렸다.
“황상, 고작 후궁 비빈 하나로 이렇게까지 화낼 필요가 있겠습니까? 후궁은 이 귀비의 손안에 있으니, 철없는 비빈을 제대로 가르치라고 당부하면 될 것을, 옥체를 생각하십시오.”
이 귀비와 제 귀비도 뒤이어 도착했다. 그녀들은 안에 들어서자마자 당황한 기색으로 황제 앞에 무릎 꿇어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소우의를 힘껏 내던졌다.
“이 귀비, 월빈이 군유의 신방에 침입해서 유왕비를 다치게까지 했다. 대체 후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가?”
이 귀비가 다급히 사죄했다.
“오늘 유왕의 혼삿날이라 신첩도 기쁜 나머지 술기운에 젖어 그만 소홀하고 말았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 말은 오늘 혼사를 치른 유왕 탓이라는 뜻인가?”
이 귀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단지 오늘 여러 가지 일로 바쁘다 보니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는 의미였으나, 황제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처벌하려는 듯한 낌새였다.
“폐하, 그런 뜻이 절대 아닙니다.”
“오늘 같은 좋은 날에 군릉이 곤란한 상황을 만드는 것도 모자라, 자네까지 월빈을 방임해 유왕비를 다치게 하다니. 군유와 군월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지. 짐이 직접 고른 며느리가 혼례 당일에 짐의 비빈한테 살해당하기라도 했다면, 짐이 사람 볼 줄 모른다는 소문이 온 천하에 퍼지지 않겠나?”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 귀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대답했다.
“폐하. 신첩, 억울합니다. 일부러 월빈의 행태를 눈감아 준 게 아닙니다. 신첩은 제 귀비와 친자매같이 지내고, 늘 군유를 제 아들처럼 생각했습니다…….”
“허, 그 말을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일이 틀어지고 있음을 느낀 릉왕이 곧장 나섰다.
“소자도 일부러 둘째 아우를 난처하게 하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어린 황자를 품고 계신 월빈 마마께서 다치게 될까 봐 조바심에 무례를 범했습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부황.”
릉왕의 말에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제 귀비가 입을 열었다.
“군릉. 듣자 하니 오랜 형제인 군유보다 월빈 배 속의 아이를 더 중히 여기는 것 같은데, 혹시 그 아이가 군릉한테 중요한 존재라도 되는 건가요?”
이 귀비는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머리에 꽃은 비녀의 옥구슬이 서로 부딪히며 요란스레 소리를 냈다.
“제 귀비, 방화가 다친 걸 보고 마음이 아픈 건 이해합니다만, 그렇다고 생사람을 모함하는 건 아닌 듯싶네요.”
제 귀비가 냉랭하게 답했다.
“저는 단지 군릉에게 누굴 더 소중히 여기느냐 물었을 뿐입니다. 이 귀비께서 이리 화를 내시는 걸 보니 혹 다른 생각이라도 하신 건가요?”
황제도 어느덧 나이가 들다 보니, 소우의가 임신했을 때도 유언비어가 많이 쏟아졌었다. 다만 그땐 장공주가 자주 궁을 오가던 때라, 그 누구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한데 릉왕의 한껏 긴장한 모습을 보니, 정말 남모를 내막이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 귀비는 억울함에 이를 갈았지만 그렇다고 월빈의 가짜 임신을 밝힐 순 없었다. 지금은 상황을 수습하는 게 우선이었다.
“폐하,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일단 월빈 배 속의 아이부터 구합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우의가 갑자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살리지 않을 거야. 죽여야 해. 폐하, 폐하……, 이 아이는 악마예요. 죗값을 받으러 온 악마라고요…….”
“그 입 다물라!”
황제의 호통에 궁녀와 태의들이 놀라서 바닥에 꿇어앉았다.
“태의, 당장 소우의의 상태를 확인하거라.”
“예.”
태의가 맥을 짚어 보더니 수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맥으로 봤을 때 별 탈 없습니다.”
태의는 속으로 의아했다.
월빈이 덕비라는 보호막 아래에 있긴 하지만, 후궁의 무궁무진한 수단과 소우의 본인이 몇 번이고 약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여전히 아무 탈 없이 잘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월빈은 대체 왜 미친 것처럼 헛소리를 하는 게냐?”
“폐하, 월빈 마마께서도 크게 놀라셨을 뿐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황제가 재차 확인했다.
“아이는 건강한 것이냐?”
“맥의 상태로 봤을 때 아주 건강합니다.”
태의의 대답에 황제도 놀라워하는 기색이었다.
바로 그때, 한발 늦게 도착한 덕비가 바닥에 꿇어앉은 소우의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폐하, 무슨 일이 있었든 아이를 지키는 게 우선이지요. 신첩이 월빈을 데려다주겠습니다.”
그에 다시 흥분하기 시작한 소우의가 덕비를 밀쳐 버리곤 바닥에 있던 비수를 주워 덕비를 향해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덕비는 있는 힘껏 피했지만 팔을 베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소우의가 피가 묻은 비수를 든 채 미치광이처럼 소리쳤다.
“왜 내 말을 믿어 주지 않는 거야, 이 아이는 괴물이라니까! 그동안 내가 일부러 내리치고, 넘어지고, 홍화차까지 마셨는데도 이 괴물은 끄떡없었어……. 심지어 오늘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무사했다고. 좋아, 그럼 내가 스스로 증명할 수밖에!”
말이 끝나자마자 소우의가 비수를 자신의 배에 힘껏 내리꽂았다.
“월빈!”
황제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비수에 찔린 월빈의 배에서 피가 와르르 쏟아져 주변을 흥건히 적셨다. 그런데 피 색깔이 거무스레한 데다 악취까지 풍겼다. 피를 쏟아 낸 소우의의 불룩했던 배가 서서히 납작해졌다.
“괴물…… 맞다니까…….”
소우의가 배를 감싸 쥐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됐네. 괴물이 나왔으니, 이제 됐어.”
목운요가 재빨리 약상자에서 붕대를 꺼내 소우의의 배를 감쌌다.
“폐하, 지금이라도 치료하면 살릴 수 있습니다.”
붕대를 두른 소우의의 허리는 가냘플 정도로 날씬했다.
이를 본 황제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리가 핑 돌았다.
“태의, 아이…… 아이가 어떻게 된 거지……?”
태의들도 겁에 질린 듯 조심스레 다가가 확인해 보더니,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폐…… 폐하, 아무래도 월빈 마마 배 속에 들어 있던 것이 아이가 아니라 오혈(污血)인 듯합니다. 제 생각엔 가임초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가임초는 여인들의 노화를 늦추는 약으로, 복용할 시 임신 증상이 나타나지만 실은 체내에 노폐물을 모아 뒀다가 아홉 달 후에 밖으로 배출하는 것으로, 이로써 미모가 더욱 아름다워집니다. 임신과 동일한 맥이 나타나 태의들도 진단해 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