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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339화 (339/442)

339화 진왕의 본성

“부황께선 대력조를 부흥으로 이끄셨지요. 그에 비해 소자는 우둔하여 일을 망치기만 하네요.”

황제가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안타까운 표정으로 진왕의 얼굴을 훑어봤다.

“짐이 좋은 제왕인지는 몰라도, 좋은 아버지는 아닌 것 같구나. 군진, 부황한테 솔직히 말해 보거라. 혹시 지금 후회하느냐?”

진왕은 가슴이 철렁했다. 비록 부황의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소자, 후회막심합니다. 애초에 부황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때문에 부황께서 이토록 가슴 아파하시니…….”

진왕의 대답에 황제가 가진 마지막 희망의 불씨마저 꺼져 버렸다.

“됐다. 오늘은 그저 술잔이나 기울이자꾸나.”

술을 한 단지나 비운 두 사람은 모두 잔뜩 취했다.

서립이 들어와 황제를 부축했다.

“폐하, 내일 일찍이 조정에 나가 정무를 보셔야 합니다.”

황제가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비틀거리며 걸어 나갔다.

“이만 가마. 군진도 일찍 쉬거라.”

“살펴 가십시오, 부황.”

밖으로 나선 황제는 서립의 손을 물리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편전에 도착해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그가 서립에게 붓과 먹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황제의 주변에서 풍기는 냉랭한 기운을 느낀 서립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폐하,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오늘은 일찍 쉬시는 게 어떨까요?”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어서 준비하거라.”

“예.”

서립이 붓과 먹을 준비한 뒤 물러섰다.

이에 황제가 붓을 들고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장이나 빼곡히 적은 후에야 그는 붓을 멈췄다.

* * *

다음 날 아침.

목운요가 중화궁으로 가려는데, 금교가 다급히 달려와 알렸다.

“소저, 중화궁에 안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에요?”

“폐하께서 아침 일찍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셋째 황자의 진왕 봉호를 거두고, 진왕부에 감금하되 어명 없이 함부로 밖에 나가지 못하고 그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진왕 중독의 진상이 황제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안겨 준 게 분명했다.

“그리고 폐하께서 유왕 전하와 월왕 전하께 하사품을 내리셨습니다. 월왕 전하께서는 당분간 이부를 맡게 되셨고, 군주와 독 낭자에 대한 어명도 곧 내려질 듯합니다.”

“그래요. 나는 잠시 독 낭자한테 가 볼게요.”

온몸을 꽁꽁 싸맨 채로 어명을 받으면 사람들이 크게 놀랄지도 모른다.

잠시 뒤, 어명이 내려졌다.

목운요는 여러 차례 인사를 올린 뒤, 어명을 받아 독 낭자한테 건넸다.

“이제부터 과거의 짐은 내려놓아도 돼.”

독 낭자는 문득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어명을 받자, 마치 돌이키기조차 싫은 과거를 철저히 잘라 내는 것만 같았다. 다시 과거를 회상했을 때 안심이 되게 말이다.

* * *

어젯밤 황제를 보내고 난 후부터 진왕은 마음이 불안했다. 한데 아침 일찍 어명을 받자 그 불안감이 현실이 됐음을 자각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어명을 재차 확인하던 진왕은 울화가 치밀어 올라 피를 토하고 나서 그대로 혼절했다.

진왕이 혼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중화궁으로 달려간 진비는 시위들에게 제지당했다.

“감히 본 궁을 막아? 죽고 싶은 것이냐?!”

시위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진비 마마께 아룁니다. 폐하께서 명하시길 그 누구도 셋째 황자 전하를 면회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명이 내려진 터라 영군진은 더 이상 진왕이 아닌 셋째 황자로 불리었다.

진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주저앉았다.

“폐하께서 어찌 이리도 모질 수가 있단 말인가……. 불쌍한 우리 군진을 죽음으로 몰아넣어야 속이 시원한 건가?”

시녀들은 진비가 혹시라도 무례한 말을 뱉을까 봐, 얼른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진비 마마, 폐하께서 명을 내리신 이상 시위들은 절대 들여보내지 않을 테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지요.”

문득 뭔가를 깨달은 듯 진비가 시녀들을 밀쳐 버리고 부리나케 옥화궁으로 달려갔다.

* * *

목운요는 잠시 벗어 두었던 붕대를 다시 독 낭자의 얼굴에 감아 주었다.

독 낭자는 붕대를 감으며 웃음을 멈추지 않는 목운요를 째려보더니 그녀를 밖으로 쫓아냈다.

“너 이만 가!”

쫓겨 나온 목운요는 웃음 가득한 얼굴로 옥화궁으로 향했다.

한데 문에 들어서자마자 진비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장공주 전하, 신첩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목운요가 얼른 다가가 장공주의 팔을 부축했다.

“외할머니.”

장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진비가 점점 도를 지나치는구나. 곡 마마, 좋은 말로 타일러서 돌려보내거라.”

“네.”

한데 곡 마마가 나서기도 전에 진비가 궁녀들을 뿌리치고 돌진했다. 그녀는 장공주 앞에 쿵 꿇어앉더니 통곡하기 시작했다.

“장공주 전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 군진을 살려 주십시오!”

곡 마마가 큰 소리로 호통쳤다.

“진비 마마, 어찌 장공주 전하 앞에서 난동을 부리시는 겁니까! 여봐라, 진비 마마를 끌어내거라!”

“전하, 군진이 지금 궁지에 몰렸습니다. 그냥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인자하신 장공주 전하께서 제발 군진을 살려 주십시오!”

장공주가 곡 마마를 향해 잠시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진비. 이렇게 옥화궁으로 쳐들어온 이유가 단지 그 말을 하기 위해서인가?”

진비는 반쯤 혼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황제마저 두 모자를 포기한 상황이라, 사정할 곳이라고는 장공주밖에 없었다.

“장공주 전하. 군진이 한때 전하 곁에서 가르침을 받아 그의 성격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군진은 어렸을 때부터 착하고 효심이 깊었지요. 조정에서 맡은 일도 언제나 훌륭하게 잘 해냈고요…….”

하지만 장공주는 시종일관 차가운 표정으로 진비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눈물을 흘리면서 하소연하던 진비는 불안한 눈빛으로 장공주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군진이 아홉 살 되던 해에 나와 함께 지낸 적이 있었지. 그때 그 아이가 날마다 나한테 인사 올리러 왔는데, 공손한 태도가 너무 기특해 숙제를 마치면 언제든지 옥화궁에 놀러 오라고 했었어.”

장공주가 갑작스럽게 옛날이야기를 꺼내자, 진비는 불안한 예감이 엄습했다.

“한데 왜 나중엔 그 아이를 옥화궁으로 다시 부르지 않았는지 아느냐?”

진비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신첩, 잘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앞에선 공손한 척했지만, 뒤로는 나를 엄청나게 싫어했거든. 심지어 내가 선물한 강아지의 다리를 부러뜨리기까지 했지.”

진비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무표정한 장공주를 보자 온갖 두려움이 밀려왔다.

“장공주 전하,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도 오해인 줄 알고 이틀간 더 지켜봤지. 한데 군진을 불러들인 날이면 꼭 강아지한테 화풀이를 하더구나. 그래서 더 이상 오지 말라고 했더니 군진이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머릿속에 당시의 장면이 떠올라 진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영군진에게 장공주의 환심을 사게 시킨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첫째 황자와 둘째 황자가 각자의 재능으로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을 때, 유독 영군진만이 특출 난 곳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장공주한테서 가르침을 받고자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영군진도 인내심을 가지고 장공주의 환심을 얻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싫증을 느끼게 돼 강아지한테 화풀이를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더 이상 옥화궁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소식을 들은 진비가 곧바로 영군진을 찾아갔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강아지는 가죽이 벗겨진 채로 들보에 다리가 매달려 있었다.

깜짝 놀란 진비는 온갖 방법을 다해 사실을 덮었다. 다행히 장공주는 얼마 지나지 않아 궁을 떠났고, 그 일도 그렇게 지나갔다.

지금껏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 장공주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공주 전하…….”

진비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장공주의 눈빛은 여전히 냉랭했다.

“세상일은 인과응보의 법칙을 따르는 법이다. 자네가 어린 군진에게 경쟁만 가르치고 양보를 가르치지 않은 탓이지. 그 아이가 강남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자네도 잘 알 텐데. 감금형도 황상께서 부자의 정을 고려하여 내리신 결정이라는 걸 모르겠나? 진정 군진을 위해서라면 앞으로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거라. 황상도 정이 많은 사람이라 자네를 냉궁으로 보내진 않을 테니까.”

냉궁이란 말에 진비가 넙죽 엎드렸다.

“전하의 귀띔을…… 귀담아듣겠습니다.”

“그래. 겪은 만큼 현명해지는 것이 좋을 거다. 곡 마마, 진비를 모시거라.”

“예.”

진비가 떠난 뒤, 장공주는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었다.

목운요가 그런 장공주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외할머니, 그동안 화과차로 얻은 수익이 팔만 냥이나 되더라고요. 조만간 외할머니 몫을 궁으로 보내 드릴게요.”

장공주가 잠시 멈칫하더니 곧바로 환하게 웃었다.

“얘가 참, 날 웃게 하려고 작정했구나.”

“저는 외할머니께서 매일 웃으시길 바라요.”

장공주는 목운요의 손을 잡고 점점 더 예뻐지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운요, 항시 기억하거라. 사람이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순 있지만 인성을 버려서는 안 된다. 진왕이 진작에 이 도리를 깨우쳤더라면 아마 오늘 같은 처지에 이르진 않았겠지. 무엇을 하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다.”

“네, 명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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