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77화 (177/442)

177화 배월선녀 소우의

장공주의 미소가 진해졌다.

“제가 예전에 연습했던 무예는 겉만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보기에 멋있어 보여 수련했던 거지요. 그러니 어찌 이황자와 견줄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부황께서 얼마나 고모를 칭찬하셨는데요. 오늘 꼭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이황자는 곧장 손짓해서 대전 위에 놓인 선물을 치우게 했다.

“큰형님, 얼른 비키십시오. 제 주먹과 발은 눈이 없어서 가까이 계시면 다칩니다.”

대황자는 짜증이 났지만, 코웃음을 치며 옆으로 물러섰다.

이황자는 곧장 권법의 한 종류를 시연했다. 하체가 매우 안정적이고 움직임이 치밀하여 빈틈이 없어 보였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실력이었다.

무예를 끝낸 이황자의 얼굴에 땀이 맺혔다. 그는 밝게 빛나는 눈으로 장공주를 보았다.

“고모, 어떻게 보셨습니까?”

“아주 훌륭하구나. 다만 어떤 부분은 주먹의 움직임이 잘 이어지지 않던데, 이유가 있는 것이냐?”

“역시 고모께서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일전에 넷째 군월이 서릉에 들렀을 때 이 권법을 연습하는 것을 한 번 본 적 있습니다. 그런데 군월이 오래 머물지 않고 떠나, 일부 동작은 제대로 이어지지 못한 겁니다.”

이황자가 사황자 영군월을 언급하자 갑자기 대전 안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장공주가 고개를 돌리니 황제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중추절인데도 군월은 서릉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 불효자 놈 얘기는 꺼내지도 마십시오. 스스로 월서에 남고 싶다고 했으니 거기 있으라고 하지요!”

황제가 화를 내자 일순간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몇 년 동안 군월이 얼굴을 보지 못했군요. 마침 이번에 제가 서릉에 꽤 오래 머무를 것 같으니, 월왕을 이리 부르는 게 어떻습니까?”

황제는 달갑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좋습니다. 누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순간 이황자의 눈빛이 반짝였다.

“참으로 잘됐습니다. 군월이 경도로 오면 이 권법을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습니다.”

삼황자 진왕의 선물은 그림 두 폭이었다. 하나는 황제께 바치는 것으로 풍년을 기원하는 그림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장공주께 바치는 것으로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그림이었다.

“훌륭하다. 짐은 이 선물이 참 마음에 드는구나.”

목운요는 살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 눈에 조소하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진왕은 언제나 저랬지. 어떤 일에든 주도면밀하고 사람을 대할 때도 무척 자연스러웠어.’

하지만 목운요는 진왕과 몇 년간 같이 살아 보면서 온화한 성품과 바른 행실이 겉모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진왕은 사실 도량이 좁아 한번 원한을 품으면 끝까지 기억했다. 신하로는 잘 써먹으면 그만이겠지만, 만약 군주가 된다면 그건 재앙이었다. 진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가식’ 그 자체였다.

황자들이 선물을 모두 바치자 황제는 손을 휘저어 후궁과 신하들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

“선물은 이제 그만 보고 싶구나.”

아래 있던 신하들은 곧장 황제의 깊은 뜻을 알아차렸다.

“폐하, 이번 연회에 명문가의 규수들이 많이 왔으니, 기예를 펼치게 하고 장공주께서 조언해 주시면 어떨까요?”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군. 누님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장공주는 대전 안을 쫙 훑어보며 정성껏 치장한 명문가 소저들을 보았다. 공주의 눈빛은 매우 평온하여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어렸을 때 배운 기예는 거의 다 잊어서 조언까지는 어렵습니다. 다만 궁궐로 오는 길에 인재들의 이름이 적지 않게 들리더군요. 오늘 운이 좋게 모두 한자리에 모였으니 무척 드문 기회이긴 하지요.”

“그럼 좋습니다.”

황제가 무척 기뻐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누가 첫 번째로 나오겠느냐?”

대부인 옆에 앉아 있던 소우의는 흥분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대부인이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기다려 보아라.”

그사이 한 소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운요는 첫 번째로 무대에 오르는 소저를 지켜보았다. 한림원 장원의 딸, 주우농이었다. 소씨 가문에서 잔치를 열었을 때 장완과 같이 있던 소저라 일면식이 있었다.

장완이 조금 의외라는 듯 말했다.

“주 소저가 첫 번째로 나갈 줄은 몰랐습니다. 평소 무척 얌전한 성격인데…….”

목운요는 주우농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살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자진해서 나간 게 아니었다. 옆에 있던 두 서녀가 밀어서 나온 것이었다.

‘대전 안에서 저런 농간을 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소녀, 한림원 장원의 딸 주우농이라 하옵니다. 황상과 장공주께 금 한 곡을 바치겠습니다.”

“그래.”

금이 전달되자 주우농은 정신을 가다듬고 연주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긴장하여 현을 잘못 누르기도 했지만, 연주는 점차 유려해졌다. 딱 들어 봐도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곡을 끝낸 주우농의 얼굴은 아까보다 훨씬 창백해져 있었다.

장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훌륭합니다. 최근에 궁화(宫花, 황제가 상으로 내린 천으로 만든 꽃)를 몇 개 새로 만들어 놓았는데, 색이 화려해서 소저가 달면 참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곡 마마, 이따 저 소저에게 잊지 말고 궁화를 전해 주어라.”

장공주의 뒤에 있던 이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주우농은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목운요는 장공주에 대해 더욱 감탄했다.

‘과연 폐하께서 옥좌에 오르시는 것을 도운 여인이구나. 저 성품은 감히 따라올 자가 없겠어.’

그리 생각하는데 소우의가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목운요는 입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두 눈에 기대하는 빛을 담았다. 소우의라면 좀 더 기다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참을성이 없었다.

지금 황궁 밖은 무척 떠들썩할 것이다. 목운요가 재밌는 구경거리 하나를 마련했으니까.

‘소우의, 이름을 떨치고 싶어? 그럼 네 명성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내가 도와주지. 나중에 눈물이나 흘리지 말라고.’

소우의가 일어서니 대청에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에게 용모란 최고의 무기인 법. 온 대전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소우의에게 집중되었다.

“소녀 소우의, 폐하와 장공주께 인사 올립니다.”

황제의 시선이 소문원에게 떨어졌다.

“경의 여식이 이토록 절세미인일 줄은 상상도 못 했소.”

“소신이 여식을 대신해 감사 인사 올립니다.”

소문원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편히 앉으시구려. 오늘은 중추절 연회이니 그리 법도를 차리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잖소.”

소우의를 보는 황제의 눈에 흡족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래, 어떤 기예를 보여 줄 생각이냐?”

“소녀에게 별 재주가 없으나 춤추는 모습이 그나마 볼만합니다. 그러니 폐하와 장공주께 ‘초선배월(貂蝉拜月, 초선이 달을 향해 비는 모습)’의 춤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소우의는 예를 갖추며 가늘고 긴 눈썹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그 모습에 많은 사람이 넋을 빼앗겼다.

이부인도 짧게 찬탄했다.

“역시 우의의 용모는 천하제일이구나. 운요, 너는 소씨 가문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우의가 춤추는 자태는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가 없단다. 우의가 달 아래서 춤추는 모습을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달의 궁전에 산다는 선녀도 그보단 못하리라 생각했다.”

“오늘 이렇게 직접 볼 수 있다니, 제 두 눈이 호강하겠습니다.”

이부인은 목운요의 맑고 투명한 눈을 보며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 아이는 소우의에게 일말의 시기나 부러움도 없는 걸까?

잠시 후, 무용복으로 갈아입은 소우의가 느린 걸음으로 올라왔다. 조금 전에도 이미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보인 소우의였지만, 지금은 더욱 아름다워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편종이 빠르게 울리자, 묵묵히 서 있던 소우의가 휙 움직이기 시작했다. 높이 날아오르는 몸짓은 제비처럼 가벼웠고, 하늘하늘한 옷 사이로 더할 나위 없이 아리따운 얼굴이 드러났다.

가늘고 긴 눈썹, 기쁠 때든 화낼 때든 아름다운 눈, 위로 살짝 올라간 눈꼬리, 눈가 아래에 그려 넣은 반짝이는 보석 모양이 귀밑머리 사이에 끼운 탐스러운 계수나무 꽃과 어우러지니, 이부인이 말했던 것처럼 달에 사는 선녀도 울고 갈 미모였다.

편종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자 비파 소리가 옥구슬처럼 빠르게 굴러떨어졌다.

무대 위 소우의는 그 소리에 맞춰 돌기 시작했다. 허리춤은 부드럽고 사뿐하여, 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를 쌓는다 한들 그녀에겐 한없이 부족하고 모자랐다.

목운요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목운요 역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전율을 느꼈다. 회귀 전, 소우의와 깊은 원한을 맺었다고는 하나 지금만큼은 그녀를 저평가할 수 없었다.

그때, 비파 소리가 멈추고 편종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소우의는 경건한 모양새로 서서 팔을 올렸다. 그러고는 위에서부터 두 팔을 천천히 내리며 가슴 앞에 합장하고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소우의가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소우의를 극찬하는 소리가 대전에 울려 퍼졌다.

“아름답다. 실로 한눈에 담기 벅찰 정도로 아름다워.”

“초선배월이라더니, 정말 선녀를 본 것 같구나.”

“앞으로 소 소저를 부를 땐 배월 선녀라 불러야겠어.”

“그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오.”

이부인 척 씨는 세상을 다 가진 얼굴의 대부인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목운요를 관찰했다. 어쩐 일인지 이부인은 소우의보다 목운요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었다.

목운요는 겉보기에는 한없이 어여쁜 낭자 같았지만, 간혹 속을 헤아릴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의뭉스럽다고 말하기엔 온몸에서 햇살 같은 찬란한 생기가 뿜어져 나왔다. 게다가 웃는 얼굴이 퍽 행복해 보여서 보는 사람까지 덩달아 즐거워지게 했다.

이런 아이가 대부인을 몇 번이나 난처하게 하고, 맹언연을 호되게 손보다니. 오랜 세월 동서로 지내면서 대부인이 그토록 망신을 당한 건 처음 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속이 뻥 뚫리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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