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황제와의 대담
이부인의 시선을 느낀 목운요가 고개를 돌렸다.
“어찌 그리 저를 쳐다보십니까?”
“아니다. 너도 잘하는 기예가 있다면 나가서 선보이지 그러느냐?”
목운요는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운문에 정통하지 않고 악기나 바둑, 서예 같은 것에도 소질이 없답니다. 차는 제법 잘 끓이지만, 무대에 올라 재주를 뽐내라고 하시면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할 거예요.”
“불선루의 차가 일품이라고 서릉에 소문이 자자하니, 네가 올라가서 차를 끓인다면 그것 또한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지 않겠니?”
“놀리지 마세요.”
목운요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부인은 그 모습을 보며 설핏 웃음을 지었다. 단호한 태도에 내심 아쉬움이 들긴 했으나 더 설득하지는 않았다.
황상은 소우의가 선보인 춤에 상당히 흡족한 반응을 보였다.
“누님, 어찌 보셨습니까?”
장공주는 소우의를 천천히 훑어보더니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절묘하구나. 소씨 집안의 적녀가 너니?”
“네, 그렇습니다.”
“아리따운 용모에 춤 솜씨까지 빼어나기란 참으로 어려운 법인데, 어느 스승에게 춤을 전수받았는지 모르겠구나.”
“나희(罗姬) 부인께 춤을 배웠습니다.”
“나희 부인이라. 어쩐지 뭔가 다르더라니. 그녀는 이 나라에서 제일가는 춤의 대가로 이름나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다리를 다쳐서 더는 춤을 추지 못하지.”
“나희 부인께서 소녀를 지도하긴 하셨으나 제자로 거두려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춤은 저 스스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폐하와 장공주 마마 앞에서 부끄러운 솜씨를 보여 드렸습니다.”
“이토록 훌륭하고 아름다운 춤을 생각해 낼 수 있다니, 너는 분명히 영리한 사람일 것이다. 곡 마마, 내 처소에서 월계수를 본떠 만든 보석 장식을 가져와 소우의에게 상으로 내리거라.”
“네.”
목운요는 시선을 거두었다. 기분이 좋으니 정교하게 만든 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입맛이 돌았다. 막 자그마한 과자를 집어 입에 넣는데, 별안간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씨 가문 얘기가 나오니 짐이 생각나는 사람이 있구나. 목운요는 어디에 있느냐?”
황제가 갑자기 저를 언급할 줄 몰랐던 목운요는 입에 머금고 있던 다과를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고 눈만 크게 뜬 채 옥좌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발견한 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목운요, 짐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것이냐? 어서 예를 갖추지 않고 무얼 하느냐?”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시선들이 집중된 차에 입속에 있던 과자를 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삼켜 버렸고, 과자가 그대로 목구멍을 찔러 버렸다.
황제는 자신의 말로 목운요가 사레들 줄은 몰랐다. 목운요는 두 뺨이 붉어진 채 물기가 맺힌 눈으로 말똥말똥 황제를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모습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황제는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짐의 궁중 다과가 맛있나 보구나. 기분 좋게 해 준 어선방 주방장에게 포상을 내려야겠어.”
장공주의 시선도 목운요에게 집중됐다.
눈앞의 소녀는 맑은 눈동자에 선량한 눈빛, 붉은 입술과 오뚝한 코, 살짝 붉은 기를 머금은 얼굴로 온몸에서 아리따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가진 속됨이 없어,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최상급의 옥처럼 보는 사람을 기쁘게 하였다.
“황상, 그만 놀리세요. 저 소저가 깜짝 놀란 게 안 보이십니까? 곡 마마, 어서 차를 소저에게 건네주어라.”
“그래그래, 목이 메어 죽으면 안 되지.”
황제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줄곧 미소를 잃지 않았다.
목운요는 창피를 당했다는 걸 알았지만, 태연하게 일어나서 찻잔을 받았다. 그리고 목에 걸린 다과를 천천히 삼키고 살며시 숨을 내쉰 후, 감사의 예를 갖추었다.
“소녀 목운요, 폐하와 장공주께 인사 올립니다. 저를 구해 주신 공주 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구해 준 은혜라……. 제법 비위를 맞출 줄 아는 아이로구나.’
“붉은 계수나무 몇 그루를 새로 얻었다 들었다. 서릉에서도 보기 힘든 것을, 어찌 짐에게 한두 그루 선물로 보내지 않은 것이냐?”
다른 사람이었다면 두려워 어쩔 줄 몰라 했겠으나, 목운요는 황제의 말에 노기 대신 웃음기가 서려 있다는 걸 감지하여 전혀 당혹스러워하지 않았다.
“계수나무 꽃 자체가 워낙 연약하여 자칫하면 꽃송이가 바로 시들 수 있기에 폐하께 선물드릴 계획은 없습니다.”
“모두 입궐할 때 짐을 위한 선물을 준비하였는데, 어찌 너만 없는 것이냐?”
“폐하, 소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붉은 계수나무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경릉성 백성들이 보내온 선물들도 아시겠지요. 백성들이 보내온 선물을 세 척의 배에서 아직 내리지 않았는데, 이를 전부 폐하께 바치고자 합니다.”
“백성들이 네게 준 선물이 아니냐?”
황제는 당최 가늠하기 힘든 표정으로 위엄을 보였다.
“하늘 아래 제왕의 영토가 아닌 것이 없고, 온 나라의 백성이 제왕의 신하입니다. 폐하께선 대력 왕조의 주군이시며, 소녀 역시 폐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에게 선물을 받은 것도, 제가 백성에게 자선을 베푼 것도 폐하 때문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선물을 폐하께서 받아 주십시오.”
“배에는 어떤 물건들이 있느냐?”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소녀도 모릅니다.”
황제는 당혹스러운 눈길로 순수하기 그지없는 목운요를 보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짐에게 선물하겠다니 내 받으마. 배에 있는 것들은 곡식, 과일, 채소류라 들었으니 서릉의 빈곤한 이들에게 나눠 주면 되겠구나. 오늘은 온 가족이 모이는 중추절이니 그들도 배불리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폐하, 그러시다면 소녀가 하운방과 불선루의 이번 달 이윤인 만 냥을 더 헌납하겠습니다. 많지는 않으나 빈곤한 백성들을 도울 순 있을 겁니다.”
“그건 갖고 있거라. 일전에도 큰돈을 써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더냐? 서릉은 가는 곳마다 물가가 비싸니 은자가 더 있는 게 좋을 게다.”
“네, 폐하. 그러면 일단은 소녀가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폐하의 수중에 은자가 부족할 때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발칙하구나!”
그에 소문원이 벌떡 일어나 황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폐하, 운요가 아직 어려 말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어전에서 실태를 보이고 불손한 말을 했으니 벌하여 주십시오…….”
목운요는 소문원을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 불손한 말을 했다고 아뢰는 소문원은 그녀를 빨리 죽이지 못해 안달 나 보였다. 소문원에게서 풍겨 나오는 살기를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어째서 그러는 것일까? 자신의 출신이 미천하다고는 하나 소청은 노부인이 낳은 딸이 아닌가? 어쨌거나 자신의 몸에도 소씨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거늘, 어찌 이리 갖은 방법을 써서 죽이려고 하는 걸까?
“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오, 소 경?”
황제의 가벼운 한마디에 소문원은 순간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둘 다 일어나라. 짐의 걱정을 덜어 주려는 목운요의 마음은 잘 알고 있다. 모두가 이리 생각할 수 있다면 짐이 얼마나 많은 힘을 아낄 수 있을지.”
그러나 목운요는 여전히 바닥에 꿇어앉은 채 몸을 숙이고 있었다. 목소리는 제법 고집스러웠다.
“폐하, 본디 폐하의 근심을 덜어서 소녀에게 여러 번 내리신 상에 보답하고자 했을 뿐인데, 이렇게 어전에서 실태를 보이고 불손한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소녀를 벌하라는 명을 내려 주십시오.”
황제는 약간 언짢아졌다. 그저 한두 마디만 나누려던 것이 이리 뒤죽박죽이 되고 재미없어질 줄은 몰랐다.
“목운요라고 했느냐?”
그때, 별안간 장공주가 입을 열었다.
“총명하고 영민한 아이인 데다, 남들에게 귀여움을 받을 성정이구나. 생기발랄하면서도 은혜에 감사할 줄도 알고, 고집도 있어. 일어나라.”
황제는 멈칫했다가 이내 기분을 풀었다. 제왕이 열 몇 살짜리 아이와 따지고 들어서 무엇하겠는가? 모든 게 괜히 작은 일을 크게 부풀린 소문원 탓이었다.
“누님 말이 맞습니다. 이 아이는 가식 없이 직설적인지라 짐의 앞에서도 전혀 숨기는 것이 없지요. 거짓 없는 마음이란 얼마나 갖기 어려운 것입니까?”
“그럼 저 아이에게도 머리 장식을 내려야겠군요.”
목운요는 얼른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마음속의 걱정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방금 황제에게 꺼낸 말은 가식이 없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면 앞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말을 꺼낼 수 있으니 말이다.
적당히 분수를 지킨다면 앞으로도 마음 편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목운요는 자리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제 앞에서 잔꾀를 부릴 때마다 왠지 모르게 벌거벗은 기분이 들곤 했다.
악의가 없고 백성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려 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더라면 두려워서 견디지 못했을 터였다.
바로 그때, 환관이 바깥에서 들어와 아뢰었다.
“폐하, 경릉성 백성들이 폐하께 보내온 명절 선물이 궁궐 입구에 당도하였습니다.”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짐에게 보낸 명절 선물이라고 하였느냐?”
“네, 선물 호송을 담당한 관원이 그리 말했습니다.”
“그래, 어서 선물을 가져오너라. 짐이 한번 봐야겠다.”
이윽고 시위들이 경릉성에서 보내온 선물들을 들고 왔다.
선물은 총 두 가지 종류였는데, 하나는 오곡 한 말이 가득 채워진 포대였다. 벼 이삭이 묵직하면서도 누렇게 익어 보는 이의 마음속에 기쁨이 감돌게 했다.
또 다른 하나는 ‘만민 우산(万民伞, 백성이 덕이 높은 관리에게 선물하는 우산)’이었다. 큰 우산의 가장자리에는 가늘고 긴 천 조각들이 늘어뜨려져 있었는데, 거기에 선물한 백성들의 이름이 꼼꼼하게 수놓아져 있어서 상당히 뜻깊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