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이원일과의 만남
명음이 물러난 뒤, 육냥이 제명에 관한 소식을 들고 나타났다.
“주인님, 소금 상인들이 관아와 결탁하려 한다는 소식을 확인했습니다.”
목운요는 손끝을 톡톡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눈빛을 지었다.
“제명이 그동안 고생했네. 돌아오면 큰상을 내리도록 해.”
“예.”
* * *
목운요는 서신을 들고 금수원을 찾았다.
“사야를 뵙습니다.”
목운요를 바라보는 월왕의 눈빛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담담했다.
“네가 온실에 오지 않는 동안 꽃이 다 피었다.”
“점점 따뜻해지는 날씨 덕분에 들판에도 꽃이 피고 있으니 온실의 꽃이야 진즉 만개했겠죠.”
“화색이 도는 걸 보니 양주성에서 소식이 왔나 보군.”
“제명이 저희의 추측이 맞다는 걸 확인해 주는 서신을 보내왔어요. 소금 상인들이 소금을 구입해 모자란 세금을 메꿀 생각이라고 해요.”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저희에겐 좋은 거 아닌가요? 그 사람들이 열심히 법을 지킨다면 저희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테니까요.”
잠시 생각에 빠진 월왕이 곰곰이 따져 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들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도록 사람을 붙여야겠군. 소금을 운송하는 도중에 수작을 부리면 소금을 빼앗아 올 방법이 내게 있으니까.”
“사야, 제명 말에 따르면 이번에 소금을 구입하는 데 약 육백만 냥이 동원된다고 해요. 구입하는 데만 이 정도인데, 소금을 팔면 만지는 돈이 수천만 냥은 족히 될 거예요. 이렇게 대담한 짓을 벌이는 걸 보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니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안심해라. 실수는 없을 거다.”
목운요는 방글방글 웃으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럼 사야, 그로 인해 벌어들일 은자는 어찌 나눌지 생각해 보셨나요?”
월왕은 묘한 표정으로 목운요를 쳐다봤다.
“소식을 알아낸 제명이 큰 공을 세운 셈이지. 명음이 이원일에게 접근해 우리의 일을 돕는다면 그 또한 큰 공일 거다. 그래도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나니, 네겐 일 할을 주마.”
“소금을 팔아 번 돈은 필요 없어요. 대신 다른 식으로 소금 상인들로부터 돈을 벌 방법이 있으면 그 돈을 제게 다 주시는 건 어떠세요?”
다른 방식이 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목운요는 월왕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왕야의 사람들이 소금을 훔쳐서 팔면 그 돈은 자연히 왕야의 몫이에요.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돈을 벌 방법이 제게 있다면 그 돈은 자연히 제 차지가 되는 거죠.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설마 저랑 싸우겠다는 건 아니시겠죠?”
“후후. 그래, 약속하마.”
목운요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탁자에서 종이와 붓을 꺼내 계약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증거가 있는 게 좋겠어요!”
목운요는 계약서가 마무리된 뒤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럼 전 이만 돌아갈 테니 편히 쉬세요.”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월왕의 입가에 웃음기가 맺혔다.
* * *
목운요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육냥을 찾았다.
“육냥, 경릉성 쪽 준비가 끝났다고 제명에게 알려 줘. 가게 위치는 하운방 맞은편으로 봐 뒀으니까 습보헌을 최대한 빨리 열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해.”
“예, 주인님.”
긴 의자에 기댄 목운요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 * *
강남의 봄은 유독 짧아 사월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한여름처럼 느껴졌다.
채월각이 사라진 뒤, 하운방은 나날이 번창하기 시작했다. 얼굴 좀 알려졌다 싶은 가문의 부인들과 소저들이 앞다투어 하운방을 찾으면서 목운요는 며칠 사이에 오만 냥이나 되는 돈을 벌었다.
소청은 정열람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가문의 귀부인과 소저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다소 부족한 점도 있었지만 목운요는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사월 중순, 황상께서 소금세를 검사한다는 성지를 내렸다. 거기에는 소금세를 조사하라며 양강총독 이원일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그에 목운요는 물밑 작업에 나섰다. 남아에게 자유국의 아이들을 찾아가 하운방과 불선루에 관한 노래를 퍼뜨리도록 한 것이다.
“강남이 좋구나. 신선이 와도 잊지 못하는 강남이 좋구나. 하운방에서는 나비에 둘러싸이고, 불선루에서는 선로(仙露)를 마시네. 선인 같은 이들이 차를 내주니 한 모금만 마셔도 세상 근심을 잊노라…….”
노래가 입에 착착 붙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경릉성 곳곳에 노래가 퍼지기 시작했다. 경릉성을 지나던 많은 객상은 노래를 들은 후 하운방과 불선루를 찾았다.
이는 이원일도 마찬가지였다. 이목년과의 대화 도중에 하운방과 불선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이원일이 불선루의 차를 마시고 싶다는 뜻을 밝혀 온 것이다.
* * *
불안한 표정의 명음은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명음 소저, 두려운가요?”
“두렵진 않아요.”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딱딱했던 명음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날이 오기만을 오랫동안 기다린 탓에 감격해서 그런 거지, 두려운 게 아니에요. 무슨 일이 생겨도 전 무섭지 않아요.”
“좋아요. 내일 이원일이 불선루에 차를 마시러 왔을 때 소저 앞으로 예약을 해 둘게요.”
“감사합니다, 목 소저.”
* * *
이튿날 저녁, 이목년이 이원일을 보필하며 불선루를 찾았다.
주변의 경치를 둘러보던 이목년의 눈가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곳의 경치가 참으로 아름답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목 소저가 있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자네가 말한 목 소저가 황상으로부터 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는 그 처자인가?”
“예, 그렇습니다. 제 집사람이 목 소저를 한 번 만났었는데 총명한 데다 범상치 않은 기운을 지녔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요.”
두 사람의 대화에 진 총관은 환한 미소를 띠었지만 그의 속내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이목년이 지금 상황에서 목 소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그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인들께서는 안으로 드시지요.”
곧 새하얀 의상을 걸친 명음이 천천히 걸어 나와 두 사람을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옥구슬 굴러가듯 경쾌하면서도 맑은 목소리, 살짝 끄는 듯한 말투에 절로 호감이 갔다.
“명음, 두 대인께 인사 올립니다.”
이원일은 제 앞에 나타난 명음을 보자,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일어나시구려. 명음이라, 참으로 좋은 이름이군.”
그 말에 명음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기쁨과 불안이 뒤섞인 눈동자가 저녁노을을 받고 은은하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 이원일이 한껏 흡족한 표정을 지은 데 반해, 이목년은 경계 섞인 눈빛을 띠었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명음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떤 차를 좋아하시나요? 고르시는 차에 따라 물과 다구를 준비하겠습니다.”
“불선루는 처음이라 잘 모르는데 소저가 추천해 주는 게 어떻겠소?”
“그렇다면 하찮은 재주이나마 힘내 보겠습니다.”
청화(靑花)가 그려진 다구를 들어 올린 명음이 인사를 올리더니 살포시 숨을 들이켰다. 눈가에는 서늘한 빛이 스치면서 상대에 대한 증오심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얼굴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마치 조용한 곳에 숨어서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명음을 보며 이원일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별다른 동작을 취하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계속 끌어당겼다. 자신에게 그런 기분이 들게 하는 여인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한편 이목년은 미간을 움찔거렸다. 명음이 이원일을 꾀어내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지금 행동하는 걸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녀는 시종일관 차를 끓이는 데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생각이 과했던 걸까?
“대인들, 차를 드셔 보시지요.”
명음이 두 사람을 향해 공손히 찻잔을 내밀었다.
이원일의 시선이 그녀의 손가락에 떨어졌다.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그 끝에는 반짝거리는 연분홍빛 손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평범한 손가락일 뿐인데 어쩐 일인지 가슴 한쪽이 계속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차 맛이 일품이구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명음 소저는 경릉성 출신이오?”
“아닙니다. 전 임강성 사람입니다.”
“그렇군.”
이내 이원일은 이목년과 소금세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힘깨나 쓰는 인물이라는 분위기를 연신 풍겨 댔다.
명음은 한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이목년도 명음에 대한 경계심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신 뒤 불선루의 경치를 감상하다가 돌아갔다.
그제야 온몸의 힘이 빠진 듯 명음이 털썩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마와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있었다.
진 총관은 사람을 시켜 명음을 부축하도록 했다.
“괜찮은 게냐?”
“예, 괜찮습니다.”
명음은 숨을 깊이 들이쉬더니 북받쳐 올라오는 감정을 힘겹게 내리눌렀다.
“잘했다. 날 따라오너라. 왕야와 목 소저께서 널 보고 싶어 하신다.”
“예.”
* * *
명음은 서재로 들어와 인사를 올린 뒤, 목운요를 쳐다봤다. 담담하게 자신을 마주 응시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티 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자니 시끄럽던 마음이 조용해지는 것 같았다.
“왕야, 목 소저. 분부하신 대로 속내를 감춘 채 그들을 대했습니다만, 이원일이 제게 그다지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원일이 미색을 밝힌다고 해서 아둔하고 무능력한 자라는 뜻은 아니에요. 그가 양강총독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수완이 있다는 뜻이죠. 경릉의 소금세를 검사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기다려 봐요.”
“예.”
“내일은 평소대로 손님을 대하도록 해요. 대신 저녁쯤에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 척해서 며칠 쉬어요.”
“그랬다가 이원일이 경릉성을 떠나기라도 하면…….”
“아뇨. 그자의 경계심을 풀지 않는 이상, 시간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어요.”
“예, 소저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월왕은 명음에게 물러가라는 눈짓을 보낸 뒤 목운요에게 시선을 던졌다.
목운요는 가슴 한편이 뻐근해지는 기분에 시선을 잠시 들어 올렸다가 재빨리 내려놓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무것도 아니다. 내일 배를 타고 양주성 쪽에 가 볼 생각이다. 며칠 이곳을 비우게 될 테니 이원일의 일은 네게 맡기마.”
“예, 걱정하지 마세요.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그래, 널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