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마음을 사로잡다
* * *
집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왠지 모르게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소청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요아야, 왜 그러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좀 피곤해서 그래요.”
“무슨 일이 있거든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내게 꼭 말하렴, 알겠니?”
목운요는 소청의 어깨에 기댄 채 부드러운 눈빛을 지어 보였다.
“정말 피곤해서 그런 거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며칠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 맛있는 걸 해 줄 테니 든든히 먹은 뒤에 얼른 가서 쉬도록 하렴.”
“예, 알겠어요.”
소청이 방에서 나간 뒤,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척했지만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월왕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기 때문이다.
월왕과 연락을 취할 일이 없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인데, 함께 일하며 시도 때도 만나다 보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부터 들었다.
새로 나온 문양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오던 정열람은 멍하니 있는 목운요를 발견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무슨 일 있나요? 꽤 심각해 보이는데?”
“정 총관님!”
“새로 문양을 만들었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는지 좀 봐주지 않을래요?”
시끄럽던 마음을 접고 목운요가 책자를 받아 자세히 살폈다.
“와아, 정말 예쁜데요? 저도 이 이상 예쁘게는 못 만들 것 같아요.”
“채청이 도와준 거랍니다. 무척 똑똑한 아이라서 옆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예요.”
채청이 정열람과 함께 하운방 일을 도와준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 앞에는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터라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하운 미인책의 일을 채청에게 맡겨 봐야겠어요.”
“후후. 그래도 하운방의 주인인데, 점점 게을러지는 거 아니에요? 하긴, 그게 오히려 주인답기도 하지만요.”
“정 총관님, 지금 저 놀리시는 거예요?”
“최근 불선루가 회안성과 양주성에 가게를 내는 일로 바쁘다고 들었어요. 신경 쓸 일이 많겠지만 아무리 바빠도 몸은 잘 챙기세요. 저번처럼 아파서 쓰러지지 않도록요.”
“예, 알겠어요. 앞으로는 마음대로 아프지도 못하겠네요.”
정열람의 진심 어린 걱정에 목운요는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
억지로 웃어 보이는 목운요를 보며 정열람은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살다 보면 힘든 일이 참 많아요. 그땐 죽을 만큼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면 점점 잊혀지더군요.”
목운요는 순간 놀랐다. 그동안 두 사람 모두 과거의 일을 가급적 떠올리지 않으려 발버둥 쳤더랬다. 그런데 정열람이 먼저 과거 이야기를 꺼내다니…….
“정 총관님…….”
“이젠 그때를 떠올려 봐도 그냥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잊었어요. 더 이상 그때처럼 아프거나 괴롭지 않아요.”
정열람의 미소에는 가슴 아픈 과거에서 벗어났다는 후련함과 초연함이 묻어 있었다.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아가씨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나중에 좋은 일로 돌아올지 누가 알겠어요?”
정열람은 목운요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경험에 빗대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다.
“맞아요. 제가 걱정을 사서 하고 있었네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월왕과의 협력은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지금 추진 중인 소금 사업도 포기할 수 없다.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초심을 지키는 거다. 비참했던 지난 세월에 비하면 지금의 삶이 훨씬 좋지 않은가.
* * *
이튿날.
월왕은 금수원을 나서기 전, 진 총관에게 불선루에 무슨 일이 생기거든 목운요의 안전부터 챙기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겠노라 대답한 진 총관은 금수원에 무장 인력을 적절히 배치해 뒀다.
* * *
명음은 목운요의 지시대로 물에 빠진 척 병가를 낸 채 외부 손님을 일절 받지 않았다.
그날 밤, 이원일이 하인을 통해 명음에게 귀한 약재를 보내며 푹 쉬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명음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약을 돌려보냈다.
그에 이원일은 마음을 좀처럼 잡지 못한 채, 명음의 모습을 떠올리기 바빴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이목년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명음이 마음에 드신다면 공무를 처리하는 대로 제가 소저를 대인의 집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내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게.”
미인도 좋지만, 그 미인을 손에 넣는 과정이 이원일에게는 더 즐거웠다.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슬쩍 운만 띄어도 침상에 오를 여인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런 건 영 재미가 없었다.
“양주성에는 언제 가실 생각입니까?”
그 물음에 이원일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경릉성의 소금세를 조사하는 데만 해도 시간이 걸린다네. 게다가 양주성의 소금 상인들이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달라고 해서, 서둘러 양주성에 갈 생각은 없다네.”
소금 상인들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자세히 조사하는 걸 원할 리 없다. 게다가 이원일이 경릉성에 오래 머무를수록 소금 상인들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시간을 벌 수 있으니 이번 소금세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순간 이목년의 눈이 번쩍 빛났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런 뜻입니까?”
“맞아. 그들이 제대로 준비하게 천천히 조사할 생각이야. 소금 상인들한테 좋은 인상을 심어 주면 앞으로 돈 걱정하지 않고 살아도 될 테니까.”
이목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원일에게 당부의 말을 건넸다.
“좋은 소식이기는 하지만 부디 조심하십시오. 소금 상인은 원체 교활한 놈들이라 속내를 알 수 없답니다.”
“후후, 걱정하지 말래도. 소식이 들어오면 자네한테도 알려 주지.”
중요한 사안인 만큼 이원일은 이목년을 끌어들이고자 했다. 그리되면 이 승상이 알아서 뒤를 봐줄 테니 자신과 대황자로서는 든든한 지원군이 생기는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서릉에 계신 아버님에게도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원일과 이목년은 한동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이목년이 미녀 두 명을 남겨 놓고 떠났지만, 명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찬 이원일에게는 그녀들이 안중에도 없었다.
“내일 직접 병문안을 가 봐야겠군.”
* * *
이튿날, 이원일은 오후가 되자마자 허겁지겁 불선루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곳에선 명음 대신 진 총관이 그를 맞이해 주었다.
“이 대인을 뵙습니다. 오늘은 운춘에게 차를 대접해 드리라 하겠습니다.”
운춘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인사를 올렸다.
“이 대인을 뵙습니다.”
빼어난 외모, 만개한 꽃 같은 활기와 싱그러움……. 흰옷을 걸친 운춘은 보기만 해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평소 같으면 마음이 혹했을 테지만, 머릿속이 온통 명음으로 가득한 이원일의 마음을 흔들기에는 부족했다.
이런 기분을 느껴 본 게 언제던가? 그동안 거느린 미인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자신의 마음을 이토록 흔들어놓은 여인은 없었다. 그런 감정을 들게 한 사람을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진 총관, 차를 마시러 온 게 아니라 명음 소저가 사고를 당했다는 말에 위문을 온 것이네.”
“아아, 그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명음 소저에게 일이 생긴 후 찾아온 분들이 한둘이 아니랍니다. 그런데 명음 소저가 아무도 만나지 않겠다고 해서……. 저도 억지로 강요할 수가 없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래도 명음 소저를 꼭 만나 보고 싶은데 뭔가 방법이 없겠나? 어쩌면 날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르지 않나?”
그 말에 진 총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운춘에게 물어보고 오라 하겠습니다. 명음 소저가 대인을 뵙겠다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네요.”
“그럼 부탁하네. 자네한테 신세를 지는구먼.”
명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총관의 비위를 맞추는 게 무슨 대수랴?
대답을 들은 진 총관의 미소가 더욱 환해지더니, 그가 이원일에게 최고급 차를 내놨다.
* * *
그렇게 차를 두 잔 마셨을 만큼의 시간이 지난 후, 운춘이 난처한 표정을 한 채 돌아왔다.
“이 대인을 뵙습니다. 명음 소저가 몸이 좋지 않아 뵐 수 없을 것 같다며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해 드리라 했습니다.”
그에 이원일의 미간이 힘껏 구겨졌다. 불쾌한 기분이 들면서도 승부욕이 화르륵 타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내일 또 찾아오겠다고 전해 주게.”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는 순간, 운춘이 잽싸게 달려와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이 대인. 그게 사실은…… 명음 소저도 대인을 뵙고 싶어 합니다. 다만 그게…….”
“날 보고 싶은데 누가 중간에서 막기라도 하는 것이더냐?”
“그게 말씀드리기 곤란해서…… 저를 따라오세요. 직접 보여 드리겠습니다.”
운춘이 이원일을 금수원 외원으로 안내했다.
외원에는 꽃이 만개해 향긋한 내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커다란 화원 끝에는 흐르는 계곡물 위로 정자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명음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치맛자락이 흔들리는 모습이, 지금 당장이라도 바람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원일은 창백하지만 섬세한 그녀의 옆얼굴에 제 진심을 깨달았다.
“명음 소저…….”
이원일의 목소리에 명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허겁지겁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 대인을 뵙습니다.”
말을 마친 명음이 힐난하는 눈빛으로 운춘을 째려봤다. 그녀가 이원일을 마음대로 데려온 게 무척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에 이원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거절하는 척했다가 제 발로 오게 만드는 수법을 보며 ‘밀당’에 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표정을 보아하니 제 착각이었던 듯싶다.
운춘은 명음의 손을 가볍게 토닥이며 달랬다.
“명음아, 이 대인과 잘 이야기해 봐. 괜한 소문 따위 신경 쓰지 말고.”
명음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운춘 언니, 그런 이야기는 지금…….”
운춘은 명음의 말을 툭 자른 채 그만 가 보겠다는 인사를 올리곤 사라졌다.
운춘이 물러가자, 이원일은 한결 다정한 눈빛으로 명음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