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교여독비-120화 (120/442)

120화 새로운 다도술

“다도를 우습게 보면 안 돼요. 차를 끓이고 마시는 것만 제대로 섭렵해도, 그 기술을 이용해 한두 사람 홀리는 거야 일도 아니랍니다.”

“예,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말로만 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 제가 직접 시범을 보여 줄게요.”

목운요의 부름에 금란이 준비해 둔 다구를 잽싸게 펼쳐 놓았다.

흔히 볼 수 있는 다구였기에, 무슨 다도술을 가르쳐 준다는 건지 명암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때, 목운요가 가볍게 숨을 들이쉬더니 명음에게 잘 봐 두라고 일러 줬다.

이내 목운요를 지켜보던 명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운요가 찻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눈을 뗄 수 없는 고혹적인 분위기가 화악 하고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아찔한 감각이었다. 주루에서 웃음을 파는 기녀들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특유의 분위기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목운요는 찻잔을 엎은 뒤 뚜껑에 가볍게 가져다 댔다. 챙 하는 맑은 소리와 함께 천천히 치켜든 시선이 명음에게 향했다. 텅 빈 것 같으면서도 옅은 슬픔이 배어나는 눈빛에, 마음 한쪽이 근질거렸다.

자신 앞에 내밀어진 찻잔을 보고서야 명음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허겁지겁 일어난 그녀의 얼굴이 어쩐 일인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부,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아직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게 느껴졌다. 차를 끓이는 목운요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같은 여인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내야 오죽하겠는가…….

목운요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찻잔을 가리켰다.

“정성껏 끓인 차니 한 모금 맛보세요.”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는 목운요의 모습에 왠지 모를 아쉬운 마음이 들자, 명음은 제 뺨을 힘껏 내리쳤다.

그에 목운요는 가벼운 웃음과 함께 손수건을 꺼내 명음의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그러자 갑작스레 차분한 기분이 들더니, 조금 전의 묘한 분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대체 언제 손을 쓰신 건가요?”

“명음 소저가 이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요.”

“예? 그때부터 말인가요?”

“세상에는 사람을 매혹할 수 있는 기술이 많지만, 사람의 마음을 누가 어찌 알겠어요? 모란꽃을 좋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연꽃을 좋아하는 이도 있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하던가요? 짧은 시간 안에 명음 소저를 가르쳐 줄 방법이 없어서 속성법을 쓴 것뿐이에요. 속성이니 쓸 때 주의해야 할 거예요.”

“그런 것까지 생각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걸 가져가서 자세히 읽어 보세요. 그리고 방금 제가 차를 끓일 때의 모습을 곰곰이 떠올려 보세요. 섬세할수록 흔적을 남기지 않고,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야 상대의 경계를 풀 수 있답니다.”

“예, 알겠습니다.”

* * *

목운요한테서 받은 책자를 들고 금수원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명음은 목운요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날 때부터 매혹을 지닌 사람 같았다. 작약이 꽃잎을 터뜨리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벌과 나비를 유혹하듯…….

그때, 진 총관이 넋이 나간 명음을 발견하곤 후다닥 달려왔다.

“명음,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거냐?”

정신을 차린 명음이 놀란 듯 펄쩍 뛰었다.

“아, 총관님, 방금 있었던 일을 생각하느라…….”

“이원일에게 접근할 방법을 목 소저가 잘 가르쳐 주신 게냐?”

명음은 조금 전 자신의 추태를 떠올리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하고 숙였다.

“예, 배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명음이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그저 가볍게 물어봤는데 저런 반응이라니, 뭔가 심상치 않았다. 대체 목 소저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안 되겠어. 왕야께 가서, 다음엔 명음과 같이 목 소저를 만나러 가시라고 해야지. 안 그랬다간 명음과 목 소저 사이에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아!’

생각을 굳힌 진 총관이 곧장 서재로 달려갔다.

* * *

“그동안 명음이 꽤 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가 봅니다. 목 소저한테 뭘 배웠냐고 슬쩍 물었더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선 도망치지 뭡니까! 목 소저가 대체 뭘 가르친 건지…….”

그 말에 월왕의 미간이 힘껏 구겨지더니 손에 쥐어진 붓이 뚝 하고 부러졌다.

진 총관은 애꿎은 붓만 버렸다는 생각에 속으로 혀를 찼다.

“쯧, 이 붓도 글러 먹었네요. 돌아가서 우항의 두 달 치 월급을 빼야겠습니다.”

“그래……. 진 총관, 명음이 언제 다시 소택에 가는지 아는가?”

“제가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알겠다.”

* * *

명음은 목운요가 건네준 책을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책에는 기교만 간단히 적혀 있는 게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차를 받칠 때 손가락을 보게 좋게 드는 법이라든가, 길을 걸을 때 치맛자락이 우아하게 흔들리게 만드는 방법 같은.

책에 적힌 대로 따라 해 봤지만 어쩐지 어색할 뿐이었다.

좀처럼 답이 떠오르지 않자, 명음은 결국 책을 들고 목운요를 찾아갔다.

“목 소저, 주신 책을 달달 외웠지만 이해할 수 없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아무래도 저 혼자서는 어려울 것 같아요.”

목운요의 모습을 다시 보자, 가슴이 주책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얼굴까지 달아오르자, 명음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같은 여자를 보고 왜 얼굴을 붉히는 거야? 게다가 나보다 어린데 왜 자꾸 눈길이 가는 거지…….’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소저, 사야께서 상의할 일이 있다며 금수원으로 와 달라고 하십니다.”

“알았어요. 옷 갈아입고 건너갈게요.”

소금 사업 때문일 거라는 생각에 목운요는 명음에게 양해를 구한 뒤, 재빨리 월왕의 서재로 향했다.

* * *

“사야를 뵙습니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월왕의 차가운 눈동자에 묘한 빛이 스쳤다.

“네가 명음을 가르치고 있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중대한 사안인 만큼 나도 같이 보고 싶구나. 이원일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위험할 테니.”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마침 명음이 궁금한 게 있다며 절 찾아왔는데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할게요.”

“그래.”

“주인님을 뵙습니다.”

잠시 뒤, 금수원으로 건너온 명음이 월왕을 향해 절을 올렸다.

“일어나거라. 목 소저에게 물을 것이 있다고 하던데 이 자리에서 물어보도록 해라.”

그에 고개를 끄덕인 명음의 표정이 한결 진지해졌다.

“소저, 책에 있는 내용을 진심으로 깨달으려면 어찌해야 하나요?”

“책의 내용을 전부 외웠다고 했죠?”

“예,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다 외웠어요.”

“그렇다면 이젠 책을 봤던 걸 잊어버리세요.”

“네? 어째서죠?”

“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잊으라는 게 아니라, 책을 봤던 사실을 잊어버리라는 뜻이에요. 책의 내용을 몸에 자연스레 익혀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요.”

명음은 잠시 생각에 잠긴 채 목운요의 말을 곱씹어 봤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다.

“소저, 외람되지만 지난번에 차를 끓여 주셨을 때의 기교를 다시 보여 주실 수 있나요?”

“좋아요. 이번엔 천천히 보여 줄게요. 잘 보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소저.”

진 총관이 잽싸게 다구를 챙겨 나타났다.

목운요는 자리에 앉아서 가볍게 손을 들어 옷소매를 정리했다.

“보통 사람을 매혹시킬 때는 상대의 ‘눈’을 어지럽혀야 한다고 해요. 하지만 그런 방식은 일시적일 뿐이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상대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 수 있어요.”

명음은 목운요의 모든 행동을 눈으로 좇았다. 어제 자신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했던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한편 월왕 또한 목운요에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가, 그 속에 빛나는 눈동자, 수줍게 달아오른 얼굴, 새하얀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 우아하면서도 교태 어리게 치켜 올라간 손가락.

지금의 목운요는 사람으로 둔갑한 눈여우 그 자체였다.

묵직하게 뛰던 심장이 북처럼 둥둥 울려 댔다. 마음 같아선 미친 듯이 벌렁거리는 가슴을 꾸욱 누르고 싶었다.

“꿀꺽.”

그때, 명음이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끌린다더니,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에 애끓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 소저, 전…….”

명음의 목소리에 방 안을 맴돌던 묘한 정적이 깨지자, 목운요는 손에 들고 있던 찻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방금 제가 보여 준 동작들, 다 기억할 수 있겠어요?”

“죄송해요, 소저. 제가 잠시 정신을 팔았었나 봐요…….”

“괜찮아요. 다음에 또 보여 줄게요.”

명음은 자신이 무척 부끄러웠다. 이원일에게 복수하려면 하루빨리 목운요한테 상대의 마음을 홀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엉뚱한 데 정신이나 팔고 있다니……. 부끄러운 나머지 무릎을 털썩 꿇었다.

“소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별거 아니니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해 보세요. 자, 저랑 나가서 산책이나 해요. 기분 전환 좀 하면 뭔가 깨닫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말을 마친 목운요는 명음과 함께 월왕의 서재를 나섰다.

* * *

서재 안으로 들어온 진 총관은 멍한 표정의 월왕을 보고 방금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왕야, 괜찮으십니까?”

월왕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쳤다.

“금란에게 얇은 피풍의를 가져오라고 하게. 산책하기엔 밖이 아직 추울 테니.”

“어이쿠, 그렇군요. 지금 바로 일러두겠습니다.”

* * *

그 후 며칠 동안 목운요는 소택에서 명음을 가르쳤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덕분인지 명음은 수십 일 만에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거의 다 배운 것 같네요. 남은 건 이제 명음 소저 혼자서 깨달아야 해요.”

명음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운요를 향해 공손히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목 소저.”

“인사는 됐어요. 그보다 제가 예전에 했던 말을 명심하세요. 이원일을 만나면 절대 속내를 드러내선 안 돼요. 그리고 제가 준 가루약도 잘 간직했다가 적절할 때 써야 해요. 알겠죠?”

“예, 걱정하지 마세요. 감정에 휘둘려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주의할게요.”

단호한 명음의 눈빛에 목운요도 한숨을 돌렸다.

“알았어요.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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