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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97화 (97/442)

97화 한 마리의 눈여우

* * *

집으로 돌아온 목운요는 만두를 입으로 먹었는지, 코로 먹었는지 기억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소청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아닌지 내심 초조해졌다.

“요아야, 영사야와 이야기가 잘 안 풀린 거니? 혹 금수원을 회수하고 싶다고 하시는 거야?”

구겨진 어머니의 미간을 보며 목운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금수원 덕분에 큰돈을 벌었는데 회수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왜 내 눈에는 네게 근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그분을 만나고 와서부터 표정이 어두워졌잖니. 솔직히 말해 보렴. 문제가 있으면 우리 둘이서 같이 해결하면 될 테니.”

어머니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자, 월왕의 신분을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평소 성격을 보건대, 월왕의 신분을 알게 되면 분명 티를 내고 말 것이다. 그럼 일이 더 골치 아프게 꼬일 수도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영사야 때문이 아니라 서릉에 보낸 세의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서요. 내일 연회가 열린다는데, 황상께서 세의를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진지한 표정에서는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청은 내심 안심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당연히 좋아하실 게다. 네 눈에도 흠잡을 데 없어 보이는데, 황상께서야 오죽하겠니?”

“후우, 그럼 다행인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한숨 덜었어요.”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길래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구나.”

별것도 아닌 일에 전전긍긍하는 것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황상께 드리는 건데 큰일이고 말고요.”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인데 걱정해 봤자 무슨 소용이겠니?”

어머니의 말을 차분히 곱씹자, 순간 목구멍에 걸려 있던 가시가 쑤욱 빠진 기분이었다.

월왕이 무슨 목적으로 금수원에 돌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걱정한다고 해서 그가 온 사실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처지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월왕이 뭔가를 알아냈다면 어떻게 해서든 만회하면 그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근심에 사로잡혀 우울하게 새해를 보낼 필요가 뭐란 말인가?

“역시 어머니는 현명하세요.”

“쯧, 얼굴 좀 펴고. 새해를 기분 좋게 보내야 한 해 동안 좋은 일만 생긴다고 하잖니.”

목운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예,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잡겠습니다.”

마음의 짐을 덜어 내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목운요는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새하얀 빛에 창을 열었다.

밤새 큰 눈이 내려 정원이 온통 은빛 세상으로 변해 있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도 눈옷을 걸쳤고, 사방에서 흩날리는 눈꽃이 마치 봄날의 새하얀 배꽃을 연상시켰다.

“홀연히 밤새 봄바람이 불었나. 천 그루, 만 그루 가지 위에 배꽃이 피었구나…….(忽如一夜春風來, 千樹萬樹梨花開.)”

마침 세숫대야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던 금교가 목운요의 중얼거림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겨울에 배꽃이라뇨? 그보다 어젯밤에 눈이 밤새 내렸지 뭐예요.”

목운요는 창밖을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저기 저 나무들, 꼭 새하얀 배꽃이 핀 것 같지 않나요?”

“어머,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후후, 이따가 눈사람이나 만들어 봐야겠어요.”

“와아, 재미있겠어요. 강남에서 이렇게 많은 눈은 보기 힘든데 저희도 만들어 볼래요.”

“좋죠. 이왕 이렇게 된 거 새해 분위기 좀 확실히 내 볼까요? 눈사람을 만들고 저녁에 폭죽도 터뜨리는 거예요.”

“좋아요. 제가 가서 모두한테 알려 줄게요.”

* * *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목운요는 사람들과 함께 정원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삽이나 빗자루, 쓰레받기를 들고 저마다 눈을 쌓기 시작했다. 그녀는 함께 눈사람을 만들고 싶었지만, 금란과 금교의 손에 붙들려 옆에서 지시만 내려야 했다.

남아와 아모 등은 옷을 잔뜩 껴입고 뒤뚱거리며 마당을 돌아다니다가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기 일쑤였다. 얼얼해진 엉덩이를 쓰다듬으면서도 아이들은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한편 월왕을 따라 정원으로 들어오던 진 총관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런 평화로운 광경을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듯합니다.”

월왕의 시선은 여러 사람을 스쳐 목운요에게 향하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입가 가득 미소 띤 모습이 설원에서 뛰노는 눈여우를 연상시켰다.

월서에서 눈여우는 상서로운 동물로 알려져 있다. 오랫동안의 수련을 통해 인간의 형상으로 변신해서 사람을 홀린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인간으로 변신한 눈여우는 아마도 목운요의 형상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 순간, 목운요가 그를 발견하고 토끼 눈을 한 채 쪼르륵 달려 나왔다.

“영사야를 뵙습니다.”

월왕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날이 차다. 옷을 든든히 입도록 해.”

월왕의 시선이 그녀가 벗어 놓은 토끼 장갑에 머물자, 목운요는 뻣뻣한 동작으로 장갑을 다시 끼었다.

옆에서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진 총관의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못했다. 잘하면 이 년 안에 소주(少主)를 모실 수 있겠구나!

* * *

사금의 부름에 소청은 재빨리 나와 월왕을 맞이했다. 온몸에 검은색 옷을 걸친 그의 자태에 그녀는 크게 압도됐다. 과연 영웅의 자태로다!

“소인 소 씨, 영사야를 뵈옵니다.”

“편히 대해 주십시오, 부인. 제 성은 영, 자(字)는 회근(懷瑾)이라 합니다. 앞으로는 회근이라 불러 주십시오.”

위엄 넘치면서도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월왕의 모습에 소청은 왠지 안심이 들었다.

“사야의 존명을 어찌 그대로 부른단 말입니까.”

“웃어른이신 부인께서 한참 어린 절 사야라고 부르시는 건 누가 봐도 예의가 아니지요.”

더 이상 사양하는 것 또한 예가 아니란 생각에 소청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영 공자라고 부르겠습니다. 댁이 서릉이라고 하던데, 오늘 저녁에 서릉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모쪼록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네요.”

“감사합니다, 부인.”

“그럼 전 이만 주방에 가 보겠습니다.”

소청이 인사를 올리고 뒤로 돌자, 진 총관이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총관님, 그동안 힘드셨을 텐데 오늘 같은 날은 좀 푹 쉬세요.”

“아이쿠, 괜찮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서……. 요 며칠 불선루도 문을 닫는 바람에 심심해 죽겠습니다.”

“후후, 그럼 같이 가시죠.”

진 총관은 소청을 따라 주방으로 가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인, 한 가지 양해를 구해도 되겠습니까? 저희 공자님께서는 어릴 때 집안에 변고가 있어 어머니를 먼저 보내셨답니다. 그 때문에 성격이 꽤나 무뚝뚝하시지요. 차가워 보여도 마음은 따뜻한 분이니, 너무 어렵게 대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어릴 때 어머니를 잃는 바람에 무뚝뚝한 성격이 됐다는 이야기를 듣자, 안됐다는 마음이 들었다. 혈육의 정을 받지 못해 저리되다니…….

“마음고생이 많으셨겠네요.”

“그렇지요…….”

* * *

진 총관과 소청의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목운요는 정신을 차리고 월왕에게 자신을 따라오라 말했다.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월왕이 어머니와 대화하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가 제 어머니와 부드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줄이야…….

화원은 온기가 느껴질 만큼 따뜻했다. 두 사람 모두 시녀들에게 피풍의를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금란은 차를 내온 후 육냥과 함께 목운요의 뒤편에 섰다.

우선 안내하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얬다. 다른 사람을 상대할 때면 어떻게 해서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곤 했는데, 월왕을 상대할 때면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아마도 회귀 전 자신의 죽음이 그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끙끙 고민하던 목운요의 귀에 월왕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듣자 하니 조 대인을 의부로 삼았다고 하던데.”

“예, 경릉성에 온 뒤로 금 부인께서 절 돌봐 주셨어요. 게다가 어머니와 친자매처럼 지내고 계셔서 인연을 맺기로 했습니다. 저와 어머니 모두 기댈 곳이 많을수록 안심이 될 테니까요.”

“기댈 곳을 왜 가까운 데서 찾지 않고 멀리서 찾는 거지?”

일개 염운사보다 자신이 더 기댈 만하다는 뜻인 건가? 조씨 가문과 가깝게 지낸다고 경계하는 건가? 목운요의 시선이 재빨리 월왕을 훑었다.

조운년은 벼슬길에 오른 이후 황권을 둘러싼 계승권 다툼에서 중립을 표했다. 게다가 사품 관리에 불과한 그를 월왕이 경계할 이유 또한 없었다.

“사야 덕분에 불선루를 열 수 있었습니다. 금수원을 기꺼이 빌려주셨으니 당연히 제 편이시겠죠. 그렇다고 해서 별것도 아닌 일로 사야를 계속 귀찮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월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다 서신에서 진 총관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다도 솜씨가 일품이라던데?”

생각의 흐름이 도무지 읽히지 않는 주제에 목운요는 삐거덕거리는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에요. 나중에 제가 직접 끓여 드리겠습니다.”

“그래.”

어색한 침묵에 숨이 막혀 왔다. 그런 목운요를 구해 준 건 다름 아닌 남아였다. 남아가 쪼르륵 달려와 목운요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소저를 뵙습니다.”

“무슨 일이니?”

“눈사람을 다 만들었어요. 누가 가장 잘 만들었는지 뽑아 주세요!”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남아의 손을 잡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월왕 성격에 눈사람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고…….

“사야, 잠시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먼저…….”

그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월왕이 문밖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가만히 앉아 있는 목운요를 돌아보며 이상하다는 눈빛을 띠었다.

“눈사람 안 보러 가나?”

“예? 예! 가야죠. 그저 사야께서도 이런 걸 좋아하실 줄은 몰라서 그만…….”

월왕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이다가 금란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피풍의와 장갑을 가져오지 않고 뭐 하는 거냐?”

금란은 활 맞은 사슴처럼 바르르 몸을 떨며 피풍의와 장갑을 챙겨 목운요 쪽으로 뛰어갔다. 뒤통수에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에, 한겨울인데도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금란이 재빠른 손길로 피풍의와 장갑을 입혀 주자, 목운요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앞인데 장갑은 안 껴도 되잖아요.”

“바깥이 얼마나 추운데요. 고뿔이라도 걸리시면 큰일이라고요.”

목운요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던 금란은 월왕을 몰래 곁눈질했다. 월왕의 얼굴에 더 이상 불만 섞인 표정이 보이지 않자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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