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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여독비-96화 (96/442)

96화 월왕과의 새해맞이

* * *

잠시 뒤, 옷을 갈아입은 목운요가 금수원에 돌아왔다. 정자에 사람 그림자가 여전히 어른거리는 게 보이자, 그녀의 미간이 구겨졌다.

옷을 갈이입고 오긴 했지만, 월왕이 방으로 돌아가서 쉬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정자에 머물러 있었다.

목운요는 정자로 다가가 무릎을 꿇은 채로 큰절을 올렸다.

“소녀 목운요, 월왕 전하를 뵈옵니다.”

월왕은 가볍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일어나거라. 내 신분은 함부로 노출해서는 안 되니 앞으로 이렇게 예를 갖출 것 없다. 그리고 전하가 아닌 사야로 부르도록 해라.”

“예, 사야. 하운방과 불선루를 시찰하러 오신 건가요?”

“그래, 불선루를 잘 관리하고 있더군.”

“과찬이십니다. 불선루는 진 총관님께서 봐주고 계십니다. 다도를 전수하는 일만으로도 바빠 소녀가 별 도움을 드리지 못하고 있지요.”

그 말에 진 총관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소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차를 끓이고 덖는 일, 불선루가 이름을 날리게 된 일 모두 소저가 수고해 준 덕분이지요. 저 혼자였다면 불선루를 열지도 못했을 겁니다.”

“후후, 그럴 리 있겠습니까? 참, 방금 오던 중에 어머니께서 만두를 빚게 사람을 좀 보내 달라고 하셨어요. 사람이 많아서 만두를 넉넉히 빚어야겠다면서요.”

“예, 조금 있다가 운춘에게 사람들을 데리고 가 보라 이르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하려던 순간, 월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목운요는 목구멍에 걸린 말을 간신히 집어삼킨 뒤에 입을 열었다.

“돌아가서 쉬시려는 건가요?”

월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기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을 만큼 그에게서는 냉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그에 목운요는 월왕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눈치챘다.

“피곤하실 테니 일단 쉬고 계세요. 한숨 쉬시고 날 때쯤이면 만두도 거의 다 빚었을 겁니다. 별것 아니지만 맛이라도 보시라고 보내 드리겠습니다.”

월왕의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이곤 시위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면 고개를 끄덕였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한숨을 내쉬는 목운요에게 멀찍이 서 있던 금란과 금교가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소저, 저분이 금수원의 진짜 주인이신가요?”

“네, 앞으로 사야라고 부르면 돼요. 냉정한 데다 변덕이 심한 분이니, 당분간 금수원에 드나드는 건 자제하도록 해요. 저분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조심하고요. 아무리 저라도 구해 줄 수 없으니까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 * *

방에서 긴 의자에 늘어져 있는 아이의 모습에 소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니? 금란하고 금교가 달려와서 네가 자신들의 품삯을 몽땅 따 갔다고 씩씩거리던데.”

“내기 돈을 걸자던 게 누군데 씩씩거린대요? 사람 봐 가면서 덤벼야지.”

진왕부에서 지내던 시절, 목운요는 얼음 위를 달리는 걸 꽤나 좋아했다. 빙혜를 신고서 얼음 위를 걸으면 제 불편한 다리를 감추고 찬사 어린 시선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이 새해인데 두 사람한테 줄 용돈이나 두둑이 챙기렴. 그동안 금란과 금교 모두 우리 모녀를 보필하느라 고생이 많았을 텐데.”

“네, 어머니 말씀대로 할게요.”

“그래. 그건 그렇고, 네가 좋아하는 고기랑 버섯, 죽순으로 만두소를 만들었단다. 지금 만두를 찌고 있으니 일어나서 먹어 보렴.”

소청은 목운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으켜 세워 주었다.

“참, 만두를 좀 많이 쪄야 할 것 같아요. 금수원 주인이 돌아왔는데 만두를 먹는다는 말에 눈독을 들이더라고요. 넉넉히 쪄서 보내 줘야 할 것 같아요.”

“금수원의 주인이라면 그 영사야라던?”

“네.”

“기다려 보렴. 얼른 준비할 테니 그걸 가져다드리거라. 금수원을 우리에게 흔쾌히 빌려주지 않으셨다면 불선루 문을 열 수나 있었겠니? 별것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보답하고 싶구나.”

소청이 방에서 나가자, 목운요는 다시 의자에 스르륵 기대 월왕의 표정을 곰곰이 떠올렸다.

불선루와 하운방은 월왕에게 십만 냥에 가까운 돈을 벌어다 주었다. 그 돈으로 월서의 상황을 바꿀 순 없겠지만, 적어도 발등에 떨어진 불은 끌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정성껏 만든 생강차도 보내 주지 않았던가. 상식적으로 봤을 때 그는 자신에게 어떠한 불만도 없어야 옳다.

그런데 방금 그의 표정에는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설마 자신과 어머니의 신분을 은밀히 조사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갓 쪄 낸 만두를 가지고 오고서야 그녀는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어서 가져다드리렴. 그보다 지난번에 진 총관님에게 여기서 함께 새해를 보내자고 했는데, 금수원의 주인이 오셨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네가 가서 여기서 같이 새해를 보내실지 물어보렴. 다 같이 시끌벅적하게 노는 것도 좋겠지.”

“어머니, 영사야께서는 바쁘셔서 갑자기 초대하는 건 별로 안 좋을 것 같아요.”

“그도 그렇겠구나. 그럼 진 총관님에게 부족한 것이 있는지만 여쭤보고 오너라.”

“예, 알겠어요.”

* * *

만두를 들고 금수원으로 넘어가자, 한쪽에 서 있는 진 총관의 모습이 보였다.

“날도 추운데 왜 여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목운요가 들고 온 찬합을 진 총관은 잽싸게 받아 들었다.

“금란 등에게 왕야의 신분을 아직 알려 주지 않으셨다면 소저 혼자 오실 거라는 생각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왕야께서 서재에 계시니 절 따라오십시오.”

서재 문을 지키고 있던 우항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 목 소저입니다.”

“들라 해라.”

월왕의 서늘한 목소리에 목운요는 숨을 들이마시더니 미소를 띤 채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야를 뵙습니다.”

“됐다.”

월왕이 손에 들고 있던 장부를 내려놨다.

앞으로 다가간 진 총관이 찬합을 열더니 뜨끈한 김이 오르는 만두와 간단한 밑반찬을 옆에 있는 탁자에 차려 놓았다.

“소 부인께서 많이도 준비하셨네요. 왕야 혼자서 드시기엔 양이 많은 것 같은데, 식사 전이시면 같이 드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목 소저?”

“어머니께서 사야를 위해 준비한 것인데 제가 어찌……. 게다가 어머니께서 집에서 기다리고 계셔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때, 월왕이 제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탁자로 걸어가 젓가락을 들고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목운요는 미간을 슬쩍 구겼다.

“식사하시는 데 방해가 안 되도록 전 그만…….”

“만두를 잘 빚었군. 만두소가 뭐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목운요는 발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죽순이랑 버섯, 그리고 대나무 칼로 다진 고기를 넣어 육즙이 풍부하답니다.”

어머니가 최고로 좋은 재료를 정성 들여 손질한 것이라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그사이 진 총관은 두 사람만 남겨 놓은 채 재빨리 물러갔다.

무거운 침묵 사이로 목운요는 애가 타는 걸 느꼈다. 어머니가 식사도 안 하고 기다리고 계실 텐데 월왕이 보내 주지 않고 있으니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만두 한 접시를 다 비운 월왕이 나머지 반찬들도 골고루 다 먹은 후에야 젓가락을 내려놨다.

“새해 준비는 다 했느냐?”

월왕의 시선이 목운요에게 향했다.

목운요는 월왕이 무슨 연유에서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진 총관 쪽은?”

“사야께서 경릉성에 오신다는 걸 모르고, 저희와 함께 새해를 보내기로 하신 터라……. 준비한 걸 나누는 게 어렵지는 않으니 제가 돌아가서-”

“그럴 필요 없다.”

“그 말씀은……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같이 새해를 보내기로 이미 약속했다니 그렇게 하면 될 것을, 귀찮게 나눌 필요 없다는 뜻이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에 목운요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구겨진 표정을 애써 숨기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그것도 좋겠네요. 친분도 쌓고, 사람이 많으면 새해 기분도 나고…… 하.하.하.”

목운요의 웃음에 월왕은 표정을 굳힌 채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래.”

월왕에게 표정을 들킬세라 목운요는 곧장 인사를 올렸다.

“그렇다면 어머니한테 말씀드리러 얼른 돌아가 보겠습니다.”

월왕의 대답도 듣기 전에 그녀는 도망치듯 서재 밖으로 달려 나갔다.

잠시 뒤, 진 총관이 얼굴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서재로 들어왔다.

“왕야, 목 소저가 왜 저리 급히 나간 것입니까?”

“모르겠다.”

월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무척 기뻐하는 듯 환하게 웃더니만 제 대답도 안 듣고 가 버리다니.

“허허, 원래 저 또래 소저들이 부끄러움이 많지 않습니까. 목 소저도 그런 것이겠지요!”

진 총관의 설명에 월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무래도 진 총관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역시 부끄러워서 그렇게 가 버린 거였군.

“그보다 왕야, 내일이 새해인데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신지요?”

“목운요가 내게 제집에서 새해를 같이 보내자고 하더군. 마침 채비도 다 끝났다고 하니 같이 보내는 것도 괜찮겠지.”

목 소저가 왕야를 초대했다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었다.

“암요, 암요! 여러 사람이 모여 북적거리는 것도 좋겠지요. 그런데 목 소저에게 줄 새해 선물은 준비하셨습니까? 지난 반년 동안 목 소저가 크게 수고했으니 고마움의 뜻을 전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선물을 준비하도록 하지.”

“허허, 목 소저가 무척 좋아할 겁니다! 그럼 전 가서 준비를 마저 하겠습니다.”

“그래.”

진 총관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를 나와, 성 공공에게 서신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왕야께서 목 소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오해하고 계신 듯한데,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목 소저를 월왕부에 데려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목표. 과정이 어떠하든 결과만 좋으면 다 좋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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