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고양이? 호랑이?
* * *
마당 한가운데에 커다란 눈사람 둘이 나란히 서 있었다. 까만 목탄으로 눈을, 당근으로 입을 만들고, 머리에 엉성한 밀짚모자까지 씌우자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그보다 작은 눈사람이 서 있었다. 똑같은 이목구비에 모자 대신 붉은 천을 걸치고 있었는데, 어제 얼음 위에서 가지고 놀던 것이었다.
남아가 작은 눈사람을 가리키더니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소저, 이 눈사람은 소저를 닮은 거 같아요.”
“후후, 잘 만들었네. 이따가 세뱃돈을 두둑이 챙겨 줘야겠어. 내년에는 더 예쁜 눈사람으로 부탁할게.”
“헤헤, 감사합니다!”
그러자 금란과 금교 등이 달려와 자신들도 눈사람 만드는 걸 도왔다며 세뱃돈을 달라고 졸랐다.
왁자지껄한 모습에 소청이 웃으며 다가왔다.
“운요가 안 준다면 내가 주마. 물론 음식을 나르는 사람한테만!”
“제가 할게요, 제가!”
“부인, 음식 나르는 일은 제가 제격이죠!”
“쟤 말은 믿지 마세요. 지난달에도 접시를 깼답니다. 먹는 거면 몰라도 음식 나르는 건 꽝이에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소택 전체를 감쌌다.
진 총관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급기야는 월왕에게 다가가 평소라면 꺼내지도 못할 말을 건넸다.
“왕야께서도 음식을 나르고 세뱃돈을 받으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순간 월왕의 얼굴 근육이 팽팽하게 땅겨지더니 눈빛이 새까맣게 변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친 총관이 잽싸게 도망갔다.
* * *
요란스럽게 점심 식사가 끝나고, 금란 등이 세뱃돈을 받는 걸 확인한 목운요가 엽자패(葉子牌, 민간에서 즐기던 도박의 일종)를 치자며 말을 꺼냈다.
금란 등은 그런 목운요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방금 받은 세뱃돈을 또 따 가시려고요?”
“이건 실력이 아니라 운에 달린 거잖아. 설마하니 천지신명께서 나만 예뻐하시려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눈만 깜빡이는 목운요의 모습에 금란 등은 재빨리 의견을 나눴다. 어제 얼음판에서 진 건 실력 차이 때문이었지만, 엽자패는 상황이 다르다. 게다가 이쪽은 쪽수도 많으니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좋아요, 해요! 대신 져도 부인한테 이르시면 안 돼요.”
“당연하지!”
목운요는 작게 키득거렸다. 하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월왕의 서늘한 시선이 날아오자, 재빨리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사야께서도 함께하실래요?”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말과 달리 월왕이 탁자로 척척 걸어오더니 목운요의 왼쪽에 앉았다.
월왕이 자신의 제의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꺼낸 말이었건만……. 제 말을 도로 주워 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그냥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엽자패가 시작됐다.
목운요는 엽자패에서 좀처럼 지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단숨에 금란과 금교 자매한테서 세뱃돈의 절반을 따냈다.
금란이 울상이 된 얼굴로 외쳤다.
“실력이 아니라 운에 달린 거라면서요?”
“맞아요. 실력이 아니면 뭐에 달린 거겠어요?”
목운요가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깜빡이며 오히려 반문했다.
결국 금란과 금교가 돈을 전부 잃은 후, 목운요와 월왕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여유롭게 엽자패를 이어 나가는 월왕의 모습에 그녀는 제 눈을 의심했다. 제 손에 들려 있는 패가 월왕에게 보이기라도 하는 건지, 번번이 패하고 말았다. 그의 곁에는 어느새 은자가 두둑하게 쌓여 있었다.
“사야, 어째서 계속 이기시는 거죠?”
월왕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입가가 미세하게 솟구쳤다.
“운이 좋았다.”
그 말에 목운요는 헛웃음을 지었다.
때마침 음식을 나르라고 어머니가 지시하자, 그녀는 엽자패를 집어던지고 잽싸게 달려갔다.
남겨진 금란 등은 멍하니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목 소저가 가 버리자 사야를 맨정신에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추운 날씨보다 싸늘한 저 눈빛이라니…….
다행히 월왕도 패를 내려놓았다. 우항이 잽싸게 탁자 위의 은자를 챙기는 동안 월왕은 마당으로 나가 설경을 감상했다.
한편 주방으로 달려간 목운요는 부지런히 일손을 거들기 시작했다. 제사상에 올린다며 소청은 십이간지 동물 모양의 떡을 빚어 찜통에 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목운요가 눈을 반짝였다.
“전 토끼띠니까 제일 예쁘게 빚어 주세요. 제사상에 올리고 난 다음에 먹을 거예요!”
“그래, 알았다. 매번 새해만 되면 그 소리를 하는구나.”
소청은 솜씨 좋게 앙증맞은 토끼 한 마리를 빚어냈다.
“못생긴 건 저랑 안 어울린다고요.”
“네가 토끼를 닮은 것 같지는 않고, 십이간지 중에 맨 마지막 동물을 닮은 것 같은데.”
소청은 목운요의 코를 힘줘 눌러 돼지코를 만들었다.
목운요는 코에 밀가루가 묻었는지도 모른 채 소청에게 툴툴거렸다.
“누가 그래요? 자, 만져 보세요. 제 얼굴이 얼마나 가늘고 보드라운데요?!”
“철벽처럼 두꺼운 건 확실한데…….”
“대체 누가 그래요? 다른 사람한테 물어봐야겠어요. 진 총관님은 어디 계세요?”
고개를 돌린 목운요가 재빨리 주방 안을 살폈다.
한데 진 총관은 보이지 않고 뒷짐을 진 월왕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만 보였다. 하마터면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대체 왜 졸졸 따라다니는 건데?!
목운요와 소청의 대화를 밖에서 듣고 있었는지 월왕의 시선이 찜통으로 향했다. 십이간지 동물 모양의 떡을 빚어 가지런히 놓아두니 무척 귀여워 보였다.
소청 역시 월왕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입을 열었다.
“영 공자, 여긴 왜 오셨어요? 옷 더럽히지 않게 얼른 밖에서 기다리세요.”
“부인, 제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예부터 남자가 부엌을 멀리하라는 문화가 존재했다. 특히 영 공자처럼 지체 높은 신분이라면 평생 부엌 근처에도 와 보지 못했을 텐데…….
“그, 그게…….”
그때, 월왕이 옆에 있는 대야에서 손을 씻더니 밀가루 반죽을 들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내 통통한 고양이가 그의 손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는 실눈을 한 채 꼬리를 말고 있었다.
“와아, 손재주가 좋으시네요.”
“예전에 취미 삼아 조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것도 비슷할 것 같아서.”
월왕은 자신의 고양이를 소청이 빚어 넣은 토끼 옆에 놓더니, 목운요를 흘깃 쳐다봤다.
목운요는 기분이 상해 고양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야, 이건 호랑이인가요?”
월왕의 미간이 꿈틀하더니 묘한 표정으로 목운요를 응시했다.
“후후! 요아야, 대체 어딜 봐서 이게 호랑이라는 거니? 척 봐도 고양이인데. 호랑이한테 한입에 잡아먹힐 것 같구나.”
“하지만 아무리 봐도 호랑이 같은데…….”
목운요가 좀처럼 인정하지 않자, 월왕이 좀 더 커다란 밀가루 반죽을 들더니 몇 번 주물럭거렸다.
확실한 신분을 보여 주기 위해 옆에 있던 칼로 호랑이 머리에 ‘왕(王)’이라고까지 써서 고양이 옆에 내려놓았다.
덕분에 호랑이가 당장이라도 고양이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뾰로통한 표정의 목운요를 바라보는 월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목 소저도 빚어 보겠소?”
그 말에 목운요가 움찔하자, 소청이 보기 드물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심지어 눈꼬리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후훗, 요아는 찐빵도 못 빚는데 동물을 빚는 건 꿈도 못 꾼답니다. 고양이를 빚어 보라고 하면 두꺼비를 보게 되실 거예요.”
“너무해요!”
목운요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약점을, 그것도 월왕 앞에서 공개하다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뺨이 달아오른 목운요를 바라보는 월왕의 시선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동안 생존에만 바빴다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겪게 되자, 이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자자, 이젠 놀리지 않으마. 서두르자, 이제 곧 제사상을 차려야 하니.”
* * *
한바탕 소란을 떨고 나니 하늘은 이미 어둑해진 상태였다. 소청이 분주하게 제사상을 차리는 동안, 목운요는 창가에 앉아 밖에 세워 둔 눈사람을 쳐다봤다.
밖에서 연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소청과 진 총관 등이 향안을 차리자 사람들이 제사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피풍의를 걸치지 않은 채로 방문을 나서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못 살다가 잘 살기는 쉬워도, 잘 살다가 못 살기는 어렵다더니. 어른들 말이 맞았다.
회귀 전에는 부러진 다리를 끌며 눈밭에서 장작을 주워야 했다. 안 그러면 이 씨가 밥을 주지 않았다. 그땐 썰렁한 집도 따뜻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찬 바람을 조금만 쐬어도 몸이 주체 없이 떨릴 정도라니…….
목운요의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은 것을 눈치챈 월왕이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와 찬 바람을 막아 줬다.
찬 바람이 갑자기 잦아들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리자, 근처에 월왕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무표정하게 제사상이 차려지는 것을 쳐다보더니 소청 곁으로 걸어가 제사상을 향해 같이 절을 올렸다.
‘올 한 해 저희 식구들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화려한 미사여구 하나 없는 소박한 기도였지만, 목운요는 그 말을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런 뒤에 소청을 따라 큰절을 올렸다.
제사가 끝나자, 소청이 세뱃돈을 또다시 꺼내 들었다.
목운요는 신분을 내세워 가장 두툼한 봉투를 낚아챘다.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는 아이를 보며 소청이 혀를 찼다.
“너도 하여간!”
“왜요? 제가 당연히 가장 많이 받아야죠. 그래야 올해 돈복이 굴러들어올 테니까요!”
“소저의 돈복은 충분히 굴러온 거 같은데요. 저희 세뱃돈도 다 따셨잖아요!”
금란과 금교의 말에 목운요는 월왕을 슬쩍 곁눈질했다.
“두 사람 돈을 따 간 건 내가 아니라 옆에 계신 분이잖아요!”
그러자 두 자매가 목운요를 향해 혀를 내밀었다.
소청은 세뱃돈을 모두에게 나눠 준 뒤, 소매에 따로 챙겨 둔 봉투를 들고 월왕에게 다가갔다.
“영 공자, 제게 웃어른이라고 했으니 거절하면 안 되는 거 아시죠? 올 한 해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요.”
월왕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두 손을 공손히 내밀어 봉투를 받아 들곤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부인.”
옆에 서 있던 진 총관은 콧등이 시큰한 채로 눈을 비볐다. 왕야로서는 처음으로 받아 보는 세뱃돈일 것이다. 그동안의 설움과 고생을 보답받듯 올 한 해 뜻하시는 바 모두 이루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