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귀한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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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 진 총관과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야 목운요는 작별 인사를 한 뒤 하운방으로 돌아왔다.
때마침 금 부인이 은홍을 데리고 하운방을 찾은 참이었다.
“부인을 뵙습니다.”
“어서 일어나렴.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다고 누차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부인께서 절 아끼셔서 그리 말씀하시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예를 갖추지 않으면 소녀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지도 모르니까요.”
눈빛에는 장난기가 어렸지만 그 태도는 다정하면서도 겸손했다.
“부인, 어서 앉으세요. 최근에 화과자를 만들어 봤는데 그럭저럭 먹을 만하답니다.”
“온종일 정신없이 바빴던 터라 조금 출출하긴 하구나. 그럼 신세 좀 져 볼까?”
“신세라뇨? 마땅히 제가 모셔야죠. 변변치 않은 걸 대접하게 되어 제가 오히려 민망한걸요.”
목운요는 금란과 금교에게 다과상을 내오도록 했다.
“얼추 일이 마무리되어 가는 것 같더구나. 전에 의논한 대로 솜씨 좋은 사람을 뽑아 네가 직접 가르친 뒤에, 다른 사람을 가르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조언 감사합니다, 부인. 그보다…… 나머지 일을 부인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송구스럽다는 표정의 목운요를 금 부인은 지그시 쳐다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남들은 이런 기회를 잡지 못해서 안달인데, 오히려 내게 그 기회를 잡아 달라고 부탁하다니……. 운요야, 정말 고맙다. 똑똑한 아이니 나도 더 이상은 말하지 않으마. 대신 네가 다관을 연다는 소식에 개업 선물을 준비했는데, 꼭 받아다오.”
금 부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에 있던 은홍이 조심스레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상자를 열자, 얇은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목운요가 황망히 물러섰다.
“부인, 이렇게 귀한 선물은 받을 수 없습니다!”
“운요야, 네가 내게 준 것은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갈망하고도 얻지 못한,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것이란다. 네가 내게 준 것에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내 성의의 표시니 꼭 받아다오. 계속 거절한다면 정말 화를 낼 테다.”
금 부인의 말에 목운요가 입술을 슬쩍 깨물더니 이내 활짝 웃어 보였다.
“그럼 기꺼이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금 부인!”
“후후, 그래. 이래야 좋지. 자자, 많이 바쁠 테니 난 이만 가 보마.”
* * *
금 부인을 배웅하고 돌아오자, 아래층으로 내려와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요아야, 금 부인께서 무슨 일로 널 찾으신 거니?”
목운요가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건넸다.
“제가 다관을 연다는 소식에 금 부인께서 선물을 주러 들르셨어요.”
“선물?”
소청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종이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 이건…… 사천 평짜리 차밭?! 그것도 최고급 차만 생산하는…….”
“선물이라고 주신 거니 기쁘게 받아야죠.”
금 부인과 조운년에게 사천 평이나 되는 차밭은 앞으로 자신들이 누리게 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목운요 덕분에 조운년은 ‘하늘’에 맞닿을 기회를 얻었다. 이번 계획이 위에 알려지면, 벼슬길에서 수십 년 동안 했던 마음고생도 단번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요아야, 금 부인께서 베푸신 은혜를 가슴에 새겨 두었다가 반드시 갚아야 한다.”
“예, 어머니. 절대로 잊지 않을게요.”
“그래, 그래야지. 오늘도 온종일 바빴을 텐데 일찍 올라가서 쉬거라.”
“어머니 먼저 쉬세요. 저는 금수원 도면을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후후, 하여간 너란 아이는 한시도 쉴 줄 모른다니까. 그럴 줄 알고 간식을 만들어 놨으니 배고프면 먹도록 하렴.”
“앗, 그럼 지금 먹을래요. 도면은 도망가지 않을 테지만, 간식은 다른 사람들이 먹어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하여간 어머니 음식 솜씨가 너무 좋아서 탈이에요!”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가려는 아이를 소청이 붙잡았다.
“내가 가져다줄 테니 여기서 기다리렴. 누가 보면 내가 널 굶기는 줄 알겠다.”
“이게 다 어머니 탓이라고요.”
“예예, 모두 이 어미 탓이랍니다.”
* * *
사실 오후에 금수원에서 진 총관이 내온 음식을 먹었던 터라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목운요는 어머니가 가져온 요깃거리를 열심히 먹었다.
“배가 부르면 먹지 마십시오.”
통통하게 솟은 배를 쓰다듬는데, 갑자기 육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목운요는 화드득 정신을 차렸다. 저 얼음 귀신이 언제부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거야?
“안 먹으면 어머니께서 걱정하신단 말이야.”
어머니를 안심시킬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할 거다.
그 말에 육냥의 눈썹이 구겨졌다. 목운요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다 보니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았다.
다시금 금수원의 도면을 들여다보는데,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창문이 활짝 열렸다. 그 틈으로 후끈한 열기가 밀려들었다.
“또 비가 내릴 참인가?”
강남의 여름은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려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이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육냥이 집 안 곳곳의 창문을 닫았다.
그때,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쾅쾅!
“주인님?”
“가서 문을 열어.”
경계 서린 눈빛으로 육냥이 문을 열자, 온몸이 비에 젖은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상대의 모습을 확인한 목운요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열람…….”
한밤중에 빗속을 뚫고 문을 두드린 사람은 선무사 부인인 정열람이었다. 얼굴은 지난번보다 훨씬 창백했지만 다행히 기운은 있어 보였다.
목운요를 발견한 정열람이 딱딱한 얼굴에서 억지로 미소를 쥐어짰다.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미안해요, 목 소저.”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비가 많이 내리니 얼른 안으로 들어오셔요!”
목운요는 정열람을 부축하며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곤 육냥에게 금란과 금교를 내려보내라고 일렀다.
자신이 걸어가는 자리마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정열람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에도 폐를 끼쳤는데, 이번에 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갈 만한 곳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여기라면 절 받아 줄 것 같아서…….”
“부인, 그런 말씀 마세요. 부인께서 찾아와 주시는 게 저희 하운방으로서는 얼마나 큰 영광인데요. 폐라니, 당치 않습니다!”
목운요는 내려온 금란과 금교에게 지난번처럼 뜨거운 물과 생강차를 준비하도록 했다.
정열람도 말을 아낀 채 안으로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그동안 금란은 목운요에게 어떤 옷을 준비해야 하는지 물었다.
“지난번에 부인께서 맡기셨던 옷이 아직 가게에 있나요? 그걸 가져다주세요. 제가 직접 들고 갈 테니.”
“예, 소저.”
목욕을 마친 정열람이 흰옷 차림으로 나오자, 목운요가 붉은 옷을 들고 맞이했다.
“한밤중이니 좀 더 가벼운 옷을 드려야 하지만, 이 옷만큼 부인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어요.”
촛불 아래서 바라본 목운요의 눈망울은 유독 따뜻하게 느껴졌다.
한밤중에도 여전히 붉게 타오르는 것 같은 치맛자락을 보니, 정열람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었다.
“맞아요. 저도 이 옷만큼 제게 잘 어울리는 옷이 없는 것 같아요.”
여태껏 거침없이, 자신의 뜻대로 살아왔다. 지금은 더러운 진흙탕에 빠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고결한 신념마저 더럽혀진 것은 아니었다.
목운요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정열람이 옷을 입도록 도와준 뒤, 두어 걸음 물러섰다. 눈앞에 서 있는 절세미인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부인께서 이 옷을 입고 두어 바퀴만 돌아주시면 하운방은 평생 배곯을 일이 없을 거예요.”
그러자 정열람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그럼 앞으로 더 열심히 입고 돌아다녀야겠네요. 한 벌로는 부족할 것 같으니, 번갈아 입을 수 있게 최소 두 벌을 준비해 주세요.”
“물론입니다. 여덟 벌- 아니, 열 벌이라도 못 지어 드리겠습니까?”
“열 벌은 무리예요. 예전이면 모르겠지만, 지금 형편으로는…….”
마침 금란이 생강차를 가져오자, 정열람은 말을 멈추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럼 선물로 드릴 테니 입어 주세요.”
그에 정열람이 미소를 거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오늘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답니다. 소저와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내 마음에 걸릴 것 같아서요.”
지난번 비 내리던 밤, 어린 소저가 자신에게 씌워 줬던 우산은 잠시나마 머물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주었다. 그날 이후로 그때를 생각하면 세상은 아직도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어, 시린 마음에 한 줄기 위안을 받곤 했다.
“작별 인사라뇨? 가시는 건가요? 하지만 선무사 대인께서 다른 곳으로 부임하신다는 소식은 못 들었는데…….”
“앞으로 전 선무사와는 무관한 사람이랍니다.”
씁쓸함이 맴도는 눈빛과 달리 그녀의 입가는 곱게 휘어졌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다 알게 되겠지만, 선무사와 이혼했어요. 친정에서는 집안 망신이라며 절 받아 주지 않으셨고요……. 경릉성에선 절 받아 줄 곳이 없으니 떠나는 수밖에요.”
정열람은 소맷부리에 수놓아진 황금 목면화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지만, 한참이 지나도 눈물은 떨어지지 않았다.
“정 부인, 괜찮다면 하운방에 머무시는 게 어떨까요?”
“그, 그게 무슨…….”
목운요의 제안에 정열람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이미 자신의 처지를 밝힌 뒤다. 그에 따른 이해득실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남아 달라니?
“하운방은 저랑 어머니 둘이서 세운 곳이에요. 일을 도와주는 소녀들과 호위까지 합치면 열 명 남짓 돼요. 집도 크지 않고 돈도 많이 벌지는 못하지만, 비바람을 피할 수는 있답니다.”
“목 소저, 내일이 되면 저에 대한 온갖 유언비어가 퍼질 텐데, 그 때문에 하운방이 시끄러워지는 건 원치 않아요.”
“여긴 평소에 워낙 조용한 편이라 가끔은 요란한 것도 좋죠. 게다가 얼마 전에 금 부인께서 경릉성의 그 누구도 하운방을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 주시겠다고 약조해 주셨거든요. 이번 기회에 금 부인께서 약조를 지켜 주실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