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하운방에 남은 정열람
“하지만…….”
정열람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 줬던 가족들마저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 그런데 두세 번 만났을 뿐인 어린 소저가 자신에게 남아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 마음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다른 누군가의 호의에 기댈 처지가 아니었다.
“목 소저, 호의는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요새 정신없이 바쁘다는 걸 부인께서도 알고 계시죠? 그리고 앞으로는 다관을 한 곳 열 생각이에요. 그때가 되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바쁠 거예요. 솔직히 말해서, 정 부인께 남아 달라고 한 건 제 사심 때문이에요. 저나 어머니 모두 변변치 못한 집안 출신인 데다, 어머니는 사람을 잘 사귀지 못하시는 편이죠. 정 부인께서 도와주시면 저도 안심하고 다관을 개장하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굳게 입을 닫은 정열람을 보며 목운요 역시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재촉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곁에 앉아 대답을 기다렸다. 불꽃처럼 뜨거운 정열을 품은 여인이 그렇게 쉽게 제 삶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한참 뒤에야 정열람이 입을 열었다.
“그럼 아가씨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부인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제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답니다.”
“아가씨, 전 더 이상 선무사의 아내가 아니라 하운방에서 일하게 된 일개 일꾼일 뿐이랍니다. 계속 그리 존대하시면 이곳에 남지 못할 거예요.”
“그럼 이리할까요? 하운방의 총관 자리를 맡아 주시면 앞으로 정 총관이라고 부르는 걸로요. 일이 맞지 않으시면 언제든 그만두셔도 좋아요.”
정열람이 명문가 출신의 규수, 선무사의 아내라는 과거를 내려놓은 것만으로도 목운요는 무척 흐뭇했다.
게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자신에게 정열람은 하늘이 준 기회나 진배없었다. 하운방은 앞으로 지체 높은 부인들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녀들을 상대할 마땅한 총관을 구하지 못해 내심 초조했었다. 정열람이 그 자리를 맡아 준다면 목운요로서는 큰 걱정거리 하나를 덜 수 있는 셈이었다.
“감사합니다, 목 소저.”
“어려운 처지를 되었을 때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손 내밀어 주기를 바라는 법이죠. 그렇게 서로 돕고 돕는 게 사람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목운요는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겨우 몇 번 만난 것만으로도 그녀의 나이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것을 망각하곤 했다.
조곤조곤 던지는 말 한마디에도, 무심한 손짓 하나에도 섬세한 배려심이 묻어났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는 꼭 하늘이 내려 준 인연처럼 느껴졌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눈길이 마주친 순간, 두 여인이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생강차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오던 금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목운요가 잠시 나가 있으라는 손짓을 했다.
“오늘 밤은 이 방에서 주무세요. 내일 살펴보시고 부족한 게 있거든 육냥에게 시키시면 될 겁니다.”
정열람도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운요가 제 방으로 돌아간 뒤, 정열람은 주변을 찬찬히 뜯어봤다. 그리 크지 않은 방이었지만 필요한 물건은 모두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인 꽃송이의 그윽한 향기를 맡고 있자니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았다.
“작은 방 한 칸이 이렇게 안심이 되는 곳이었던가?”
* * *
어느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어젯밤에 내린 비 때문인지 창을 열자 기분 좋은 상쾌함이 느껴졌다.
아침 일찍부터 느끼지는 인기척에 정열람은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람들이 놀랄 것 같아 좀처럼 문고리를 돌리지 못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목운요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총관이 되신 첫날이에요. 잘 쉬셨나요? 아침 먹을 때 다 같이 모여 인사 나누는 게 어떠실까요? 앞으로 해 주실 일이 많아서 빨리 소개하고 싶은데…….”
“좋아요!”
시원시원하면서도 배려 깊은 목운요의 태도에 불안했던 마음이 스르륵 녹아내렸다.
목운요가 정 총관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소녀들은 정열람을 힐끔거리며 호기심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특별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들 귀 기울여 주세요. 오늘부터 하운방을 관리할 총관으로서, 무슨 일이 있거든 여기 계신 정 총관님을 찾으세요. 그래도 해결할 수 없을 땐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정 총관님의 지시를 모두 잘 따라 줬으면 해요, 알겠죠?”
“예, 소저. 정 총관님을 뵙습니다.”
소녀들의 인사에 정열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용기를 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절 알고 있는 분도 있을 겁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말해 두죠, 전 선무사와 이혼했으니, 부인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그리고 친정집과도 의절했답니다. 앞으로 저에 관한 온갖 유언비어를 듣게 될 거예요. 하지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거예요. 지금으로서는 제가 일일이 나서서 말할 수도 없는 처지지만, 제 행동과 제 결정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는 건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정열람은 앞으로 쏟아질 유언비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밝혔다. 그 모습을 목운요는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정열람이 선무사와 이혼했다는 이야기에 소녀들은 놀란 눈치였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자, 어서들 밥 먹어요. 오늘도 무척 바쁠 테니까요.”
“예, 소저.”
* * *
정열람은 상인 가문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가게를 운영하고 사람을 관리하는 일을 익혔다고 했다.
가게 운영에 관한 장부나 문서를 넘겨주자, 그녀는 지체 없이 한 줄, 한 줄 짚어 가며 업무 파악에 나섰다. 며칠이 지나자 그녀는 하운방의 업무를 완벽히 습득했다.
보면 볼수록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 총관님. 요 며칠 하운방 일에 익숙해진 것 같은데, 채용 증서를 작성해도 될까요?”
목운요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지극히 간단한 내용이 담긴 증서는 정열람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도록, 그녀를 최대한 배려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가씨, 절 배려해 주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지금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왜요?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얼마든지 고칠 수 있으니.”
“아뇨, 조건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정열람은 증서를 내려놓은 뒤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 나라는 이혼한 여인에 대해 그리 관대한 편이 아니었다. 하물며 친정에서 쫓겨날 정도라면…….
“이혼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맞아요. 이혼을 승인하는 서류가 내려오지 않아서 아직 조용한 것뿐이에요. 이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하운방에 큰 피해를 줄 거예요.”
“후후후, 이렇게 하운방을 위하시는 걸 보니 제가 좋은 총관님을 찾은 것 같네요. 증서에 별문제가 없으면 눈 딱 감고 지장을 찍으세요. 그래야 정 총관님에게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하운방에서 정당하게 도와드릴 수 있을 테니까요.”
목운요의 제의에도 정열람은 여전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운방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고 해도 자신의 시댁이나 친정에 비하면 일개 침방에 불과하다. 최악의 경우 두 집안이 가문의 명예를 위해 손을 잡는다면 하운방은 절대 버티지 못할 것이다.
대화 도중, 금란이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소저, 경릉 동지 부인께서 오셨어요! 선무사 부인을 데리고 가시겠다며 울고 계십니다.”
정열심이 왔다는 이야기에 정열람은 가슴이 부르르 떨렸다. 간신히 가라앉았던 분노가 화르륵 타올랐다.
목운요는 자신을 두 번이나 받아 줬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서 더 큰 폐를 끼쳤다가는 어린 소저를 볼 자신이 없었다.
정열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목 소저, 덕분에 며칠 동안 편히 지낼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이제 정말 가 봐…….”
정열람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나자, 목운요가 정열람의 손을 잽싸게 잡아당겨 인주를 찍은 뒤 자신의 지장 옆에 꾸욱 눌렀다.
“목 소저!”
목운요가 증서를 곱게 접어 넣었다.
“정 총관님은 이제 하운방의 사람이에요. 자기 사람도 못 지킨다면 하운방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할 수 있겠어요?”
예전의 목운요라면 이렇게까지 강수를 둘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금 부인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자신과 하운방을 지켜 주겠다고 했다.
경릉성의 관리 중 절반이 덤벼도 하운방의 문턱도 넘지 못할 것이다. 한낱 정오품 선무사 따위에 무릎 꿇을쏘냐!
얼어붙었던 정열람의 마음에 한 줄기 온기가 흘렀다. 불안한 마음도, 미안한 마음도. 모두 그 온기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운방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굳은 결심이 들어섰다.
“한 가지만 분명히 말씀해 주세요. 주씨 가문, 정씨 가문을 다시 보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히신 건가요?”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지만, 정열람은 눈을 감은 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결정했어요. 그들과 더 이상 얽히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만 믿으세요.”
* * *
대문 밖엔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의 관심사였던 하운방에 정열심이 눈물을 흘리며 찾아오자, 성안의 구경꾼이란 구경꾼은 죄다 몰려든 것이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목운요가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정열심에게 인사를 올렸다.
“경릉 동지 부인을 뵙습니다.”
정열심은 지난번 하운방에서 지어 간 옷을 걸치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에 붉게 물든 눈가, 커다란 눈에서 또르륵 떨어져 내리는 눈물. 무척 슬픈 듯한 그 모습에 여러 사람들이 동정을 금치 못했다.
“목 소저, 제 동생이 여기 있나요?”
“예, 그렇습니다. 동지 부인께선 동생분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또랑또랑한 그녀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