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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99/117)

99화

“네르아는?”

이안이 뒤늦게 겨우 집합할 수 있는 모든 병사를 데리고 경계선으로 달려왔다. 마탑 마법사들이 그를 침울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그들의 표정을 본 이안은 그들의 생각을 깨닫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르아는 계획대로 아비드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국경에 있었던 아비드 병사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었기에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두 제국 사이의 긴장감이 최고로 고조되었을 때는 다름 아닌 전 아비드 황제와 전 텐젤 황제가 각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던 때였다.

하지만 전 아비드 황제가 서거한 후에 현 황제인 라이핀이 자리에 오르면서 텐젤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졌다. 라이핀은 텐젤의 병력을 얕보고 있었다.

덕분에 국경선을 지키는 병사들 또한 경각심이 낮았다. 그 점을 노린 이안은 그들이 눈치채기 전에 처리하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일은 다 마치고 오셨습니까?”

하르힌이 먼저 조용히 입을 열며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옷에 묻은 흙들을 털어냈다.

그의 모습은 어딘가 위태로워 보였다.

“그래.”

그가 내색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이안은 그의 모습을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그는 간결하게 하르힌의 물음에 답했다. 하르힌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이곳에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시겠습니까?”

“?”

“네르아를 아비드에 데려가 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란이 일어나려면 조금 더 기다리셔야 한단 말입니다, 저하… 아니 폐하.”

하르힌이 습관처럼 이안을 ‘저하’라 부르다 바뀐 그의 위치를 깨닫고는 보좌관답게 눈치 빠르게 호칭을 정정했다.

“폐하라니. 아직 제대로 황위에 오르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저 전처럼 불러줬으면 해. 아직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니까.”

이안이 손을 휘저으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원하신다면.”

평소라면 농이라도 얹었을 하르힌이 빠르게 수긍하자 그것대로 기분이 언짢아졌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하르힌을 바라보았다.

“…하르힌.”

이안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했던 결심을 보기 좋게 차버리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녀를 잊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 일은 오롯이 하르힌, 그의 몫이지만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일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심정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명하십시오, 저하.”

“잠깐 나랑 얘기 좀 할까? 네 말대로 조금 전 네르아를 풀어놓았다면 조금 시간이 걸릴 테니까. 다들 쉬고 있도록 해.”

이안은 하르힌의 어깨를 힘없이 툭 치고 고갯짓으로 조금 걷자는 신호를 보냈다. 주군의 명령에 하르힌은 저항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텐젤과 아비드의 국경에는 거대한 숲이 있었다. 겨울 숲의 나무들은 모두 가지가 앙상했다.

“무슨 일로 저를 따로 부르셨습니까?”

막연하게 길을 걷고 있던 중, 적막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하르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담 갖지 않고 털어놓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하문하십시오.”

하르힌은 그답지 않게 경어를 쓰며 답했다. 이안은 그의 뒤틀린 심기를 눈치챌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야?”

“무엇이 말입니까.”

“내가 너에게 네르아에 대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때. 너만 몰랐다는 사실에 실망한 거야? 그래서 배신감을 느낀 거야?”

굳이 돌려 말하지 않아도 하르힌이라면 알아들을 것이었다. 이안은 망설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거 아니긴 뭘. 네 얼굴에 대놓고 ‘나 지금 기분이 좋지 않은데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슬퍼요’라고 쓰여 있는데.”

이안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하르힌이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그는 눈을 감고 볼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의 기운을 느꼈다.

앞으로 찾아올 많은 변화를 막연히 떠올려보았다.

네르아가 없는 마탑, 황제가 될 이안 그리고 지금 앞두고 있는 리제아나의 구출까지.

머리가 아팠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활시위가 이미 당겨졌다는 것을 알기에 멈추기에는 너무 늦었다.

“저하께서 제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을 때 저는 말 그대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습니다.”

하르힌은 기다리고 있는 이안에게 마침내 입을 열어 제 심정을 고백하기 시작했다.

“네르아의 방을 혹시 몰라 뒤졌죠. 저하가 그동안 얼마나 저주에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지 않습니까. 그녀의 방에서 황제와 비밀스레 연락한 편지를 발견하고 전….”

“….”

이안은 대답을 하는 대신 말을 삼켰다. 하르힌이 마음에 있는 응어리를 다 풀 때까지 계속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순간 네르아와 함께 마탑에서 생활했던 모든 추억이 생각나서 가슴이 갈가리 찢겨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녀는 결국 제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을 망가뜨렸는데….”

“….”

“그녀가 저하를 그리 만든 사람 중 하나라는 걸 알아버렸습니다.”

말끝을 흐리며 하르힌이 겨우 말을 마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을 입밖으로 내뱉으니 감정들이 끓어올랐다.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떻게 대처해야 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죽여야 하나? 과연 내가 죽일 수 있을까? 인연이라는 게… 쉽게 끊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그런 고민을 하던 도중 어이없게도 텐젤 전역을 뒤져서도 찾을 수 없었던 그녀가 제 발로 마탑에 뻔뻔스럽게 찾아왔었어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제 감정이 말도 안 되게 잠잠해졌습니다.”

목이 막히는지 두어 번 헛기침을 반복한 하르힌이 눈에 맺힌 눈물을 거칠게 닦으며 말을 이었다.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하는 말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공격했고 맥없이 당한 그녀는 결국 그녀가 한 일의 대가를 받았죠.”

“답답해 보이는 얼굴이군.”

“네…. 왜인지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요. 그녀가 한 짓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마음 고생한 걸 생각하면 좋아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잖아요…. 그렇죠?”

“…하르힌. 억지로 괜찮아지려 할 필요는 없어.”

하르힌에게서 이안,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황제를 죽였을 때 왜인지 모든 일을 끝마쳤다는 후련함보다 어둡고 습한 감정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무슨 염치로 네르아를 생각할까요.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하르힌이 굵은 눈송이 같은 눈물을 흘리며 커다란 제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

매번 해맑은 모습만 보여서 이번에도 괜찮을 줄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정말 괴로워 보였다.

이안은 쓰게 웃으며 들썩이는 하르힌의 어깨를 다정히 토닥여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컸던 그들이기에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모르는 면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르힌, 너는 네르아에게 가렴.”

“네? 아, 아니에요. 저는 저하를 보필할 겁니다. 보좌관으로서 저는… 그래야만 해요.”

“나는 정말 괜찮아. 내가 얼마나 강한지 알잖아. 너는 네르아에게 가서 제대로 인사해주고 오라는 말이다.”

“…아….”

가서 네르아를 되찾아 오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이미 네르아는 광각초의 향을 너무 많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전과 같이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다.

그녀에게 예정된 미래는 오직 죽음뿐이었다. 이안은 하르힌에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볼 기회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르힌에게는 이안과 네르아 중 누구를 선택할지 고르라는 것처럼 들렸다.

‘저하께서는 참으로 잔인하신 사람이란 말이지. 얼굴은 천사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 누구보다 악마야….’

하르힌은 고개를 푹 숙여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는 마지막 눈물을 닦고서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네르아에게 할… 마지막 인사는 저하를 먼저 따라가고 난 후, 리제아나 님을 구한 뒤에 해도 괜찮습니다.”

“…정말?”

“네르아는 저의 친구이자 동료이지만 저하께서는 제게 있어서 하나뿐인 주군이시자… 무엇보다 중요한 돈줄이잖아요?”

그제야 하르힌은 그다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결정을 단단히 내린 모양이었다.

이안은 하르힌의 미소를 보고 마주 웃었다. 이안은 힘을 실어 그의 어깨를 이어 두어 번 토닥였다.

“가자. 네 결정을 헛되게 만들지 않게 하마.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 ⚜ ⚜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틀림없었다. 광각초를 들이마신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지 않았던가.

“두 번째 생도 끝인가…. 세 번째 생은 있으려나.”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필로렌치아 공작에게 작은 복수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리제아나는 알고 있었다. 다시 살 기회가 주어진다 한들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그 사람 덕에 알지 못했던 감정들을 느꼈다. 하지만 제대로 보답해준 것 없이 떠났다.

만일 그녀가 다시 회귀한다고 해도 이안은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함께한 추억은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리제아나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회귀한 후에 신전을 잘 가지 않았으니 여신이 자신 따위에게 신경을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모르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리제아나는 대자로 누워 커다랗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몸이 너무 피곤했다. 지쳐서 쉬고 싶었다. 아마 이대로 눈을 감으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더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꼬이고 꼬였던 삶의 굴레에서 끝을 보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

“라이핀 나쁜 놈! 공작도 다음 생엔 개로 태어나라지!”

리제아나는 마지막으로 라이핀과 공작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눈을 감았다.

왜 지금 같은 때 이안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일 것이다. 죽기 전,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없다니 말이다.

그때였다.

“리제아나, 제발 좀 일어나봐. 내가 왔어. 늦었지만 내가 왔으니 제발 눈을 떠주면 안 될까…?”

누군가가 거칠게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어?”

리제아나는 환청이 아닐까 의심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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