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8화 (98/117)

98화

“그것으로… 뭘 하실 생각입니까?”

불안감에 리제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나 죽을 준비를 해왔지만 광각초를 다시 마주하자 이전에 광각초의 위력을 보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왜, 직접 보니까 떨리는 모양이지? 그렇다면 이 빌어먹을 작은 독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겠군. 심지어 이건 향수가 아니야. 풀이지. 그러니 위력이 더 강력할 거다.”

라이핀이 미소를 지으며 음흉하게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리제아나. 죽이지 않아.”

그는 검지를 들어 자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고 중요한 비밀을 말하듯 그녀에게 속삭였다.

“겨우 당신을 찾았는데 어떻게 내가 당신을 죽이겠어. 그저 광각초로 당신을 편하게 해주고 싶을 뿐이야.”

“…그게 무슨.”

“마취 말이야. 이 향을 맡고 나면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할 거야.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질 테니까, 안심해.”

“!”

그녀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는지 라이핀은 계속 말을 쏟아냈다.

“폐하….”

리제아나는 한때는 탐스러웠지만 이제는 메말라 핏기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초조함에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리제아나. 지금 당신이 이렇게 어색하게 날 대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야.”

“네?”

“텐젤에서나 낡은 오두막에서 몇 달 동안 빛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힘들었겠지. 그러니 감정 조절도 잘 되지 못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목이 아플 것 같으니 그만 말해주었으면 해, 리제아나. 걱정되잖아. 당신은… 그래 지금 화를 내야 할 상대를 착각하고 있는 거야.”

라이핀은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리제아나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폐하야말로 정말 무슨 소리십니까. 저는 화낼 상대를 절대 착각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더군다나!”

“더군다나? 리제아나 정말 아파 보여. 그쯤 하는 것이 좋겠는데.”

“제게 저것을 먹여 저를 죽일 작정이시겠죠.”

온몸이 떨리고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리제아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라이핀의 손을 거칠게 털어내었다.

“무슨 소리야. 안 죽는다니까?”

“저는… 이미 저 효능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하…. 리제아나 벌써 몇 번째 말해야 하는 거야. 이제 슬슬 화가 나려고 하니 마지막으로 말해두지.”

타일러도 그녀는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전처럼 얌전히 라이핀의 말을 수용했던 리제아나는 더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라이핀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을 들어주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심기가 뒤틀렸다.

“나는 당신을 죽일 마음이 전혀 없어. 내가 죽이는 것은 내 앞길에 방해되는 사람뿐이야. 내 사람을 감히 건든 사람들.”

“그게 저잖아요. 폐하의 앞길에 방해되는 사람.”

이미 리제아나는 한 번 그를 방해하지 않았나. 텐젤에서 그의 사업을 망쳤으니 리제아나 또한 그가 말하는 ‘앞길에 방해되는 사람’에 속할 터였다.

“음…. 전혀 아니지.”

그녀에게 화를 낼 줄 알았으나 라이핀은 잠잠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라이핀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내 아내니까. 내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아. 더군다나 음…. 여인 한 명이 황제에게 위협이 될 리가? 당신은 남은 것이 없잖아.”

“뭐라…고…. 지금….”

“내 말이 틀렸나. 당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지? 내 눈을 똑바로 보고 말해봐. 지금 여기에 리제아나의 것이 어디 있는지.”

리제아나는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라이핀은 고개를 돌려 방 안의 사람들을 가리켰다.

“일라이자? 아니면 톰? 제임스? 에녹? 정신 차려. 여기, 나밖에 없잖아.”

라이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 이 광각초로 우리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걱정할 것 하나 없이 행복했던 그때로 말이지.”

“그게 정말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리제아나는 이안의 곁에 있던 때만이 그녀가 행복하다고 느꼈던 시간이었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라이핀이나 공작 앞에서 이안이란 이름을 다시 한번 언급했다간 정말 텐젤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사실이니까. 자 그럼 이쯤 잡담은 그만두고, 제임스와 에녹, 이쪽으로 오도록 해.”

“예.”

“예.”

두 병사가 제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끄덕이고 라이핀의 곁으로 다가왔다.

‘젠장.’

리제아나는 라이핀에게 욕과 함께 저주를 퍼부었다.

대화로 시간을 끌어 그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 했지만 라이핀이 그녀의 속내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라이핀이 먼저 대화의 흐름을 끊은 것이다.

그가 두 손을 가볍게 흔들자 두 병사는 그의 명을 알아듣고 부산하게 움직였다. 라이핀은 일라이자에게서 손수건을 받아들고 입과 코를 막았다.

“일라이자와 톰은 밖을 지키도록 하고. 이곳은 내가 맡기로 하지.”

“폐하 정말 이러시지 않아도.”

“일라이자, 아무리 너라도 나를 말리려고 한다면 다음에는 입을 열 기회조차 없을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일라이자는 라이핀의 살기 어린 경고에 움찔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톰이란 병사와 함께 자리를 떠나자 이젠 방에 정말 리제아나 홀로 남았다.

라이핀을 말리려던 일라이자까지 떠나자 리제아나는 막막해졌다.

“그녀를 잡아라.”

“잠, 잠깐. 폐하 이건 아니죠! 이건 정말!”

“안 아플 거야, 리제아나. 금방 끝나. 잠시 정신만 잃는 것뿐이야. 나를 믿어.”

“당신을 못 믿겠다고!”

두 병사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자 그녀는 반항하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누워있던 탓에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두 병사에게 두 팔이 붙들렸다.

“내가 모를 것 같아? 이걸로 나를 죽일 거잖아! 저번 생에도 이번 생에도 결국 당신이 살인자야. 나를 죽일 사람은 변하지 않는구나.”

“리제아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래도 정말 휴식이 필요해 보여.”

“위선이지.”

“최선이야.”

허공에서 라이핀과 리제아나의 시선이 맞물렸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리제아나는 분노 어린 눈으로 라이핀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끝까지 가보자 이건가?”

“새로운 시작이라니까. 눈을 뜬 후에 나를 봐. 그땐 미소로 당신을 맞이해줄게.”

“푸핫, 미친놈.”

리제아나는 라이핀의 제안을 보기 좋게 비웃어주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반응에 라이핀은 입을 닫은 후 조용히 상자를 열어 광각초를 꺼냈다.

그가 광각초를 꺼내들자 리제아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돌리고 숨을 참았다. 광각초의 향을 맡지 않기 위해서였다.

“리제아나 그래봤자 소용없어. 거친 방법을 쓰게 만들지 마.”

라이핀은 광각초의 향이 리제아나의 코로 스미게 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숨을 참으며 향을 맡지 않으려 하기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

“마지막 기회야. 향기를 맡아.”

‘어림도 없어 개자식아.’

두 병사에게 두 팔이 붙들린 리제아나는 차게 식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지. 다 당신을 위해서 하는 거야.”

“억-”

라이핀이 재빠른 손짓으로 리제아나의 목을 쳤다. 놀란 리제아나는 그대로 숨을 내뱉어버렸다.

제 잘못을 깨닫고 다시 숨을 참으려 했지만 알싸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헉- 광각초가….”

조금 전 그녀가 들이마신 공기에 광각초의 향이 섞인 모양이었다. 찰나였지만 이안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죽음을 앞두었다고 생각하니 그와 함께한 추억들이 떠올렸다.

“한숨 자.”

그 말에 마법이라도 깃들었는지 리제아나의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모든 기력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앉아 있을 힘도 없었다. 리제아나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라이핀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제야 리제아나가 그의 것이 되었다.

라이핀은 그의 품으로 떨어진 리제아나를 힘 있게 안았다.

⚜ ⚜ ⚜

거대한 침실 위로 잠든 듯이 쓰러진 리제아나를 두고 라이핀은 방의 창을 모두 열었다. 광각초의 향이 깃든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함이었다. 라이핀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감은 리제아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릴 때였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창백한 얼굴의 공작이 침실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희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아 분명 변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말을 더듬으며 라이핀을 불렀다.

“무슨 일이지?”

라이핀은 그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며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수, 수도 한복판에서!”

공작이 제대로 말을 꺼내지 못한 채로 차오르는 숨을 간신히 가다듬었다.

“공작, 다급한 일이라면 얼른 보고해라.”

라이핀이 언성을 높이며 그를 타박했다. 공작은 목구멍 너머로 느껴지는 신맛을 억누른 채로 어금니에 힘을 주며 답했다.

“수도에 위치한 시내 한복판에서 웬 여자가 광각초를 들이마셨을 때와 똑같은 증세를 보이며 소동을 일으키고 있답니다! 힘은 감히 말할 수도 없이 마수처럼 세며 이미 이성을 잃어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뭐라?”

그 말을 듣자마자 라이핀이 반사적으로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광각초는 은밀하게 사용되는 독초였다. 시내에 함부로 돌아다닐 리 없었다. 아비드 제국은 그동안 광각초에 대한 통제를 엄격히 해왔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를 들킨다면 공작과 황제뿐만 아니라 퍼퓸니즈와 관련된 모든 귀족들까지 타격을 입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곳이 수도 어디인가? 지금 당장 가지.”

라이핀이 다급하게 몸을 움직이며 대기하고 있던 두 병사에게 고갯짓으로 그를 따라오라 일렀다.

혹여 공작이 리제아나를 보며 그녀의 상태의 의문을 가진다면 문제가 복잡해질 것이었다. 하지만 라이핀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공작은 리제아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직 그녀의 쓸모만이 그의 관심사였다.

“예. 말을 준비해두었습니다.”

“곧바로 출발한다. 그 여자 인상착의는 어떻다고 하던가.”

“저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특징이라도 칭한다면 레이디답지 않은 하의 차림에 주황색 머리를 가진 여자라 합니다. 아주 날쌔다고도 합니다.”

“빠르게 제압한다.”

일그러진 얼굴로 라이핀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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