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예상대로 아비드 황궁으로까지 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네르아의 예상치 못한 소동으로 인해 이미 황궁은 충분히 어지러웠다. 보안을 책임지는 마법사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이안이 만들어낸 외부의 마력 파동으로 인해 그들은 더욱 혼란스러운 듯했다.
“황제는?”
“황제는 네르아가 소동을 벌인 곳으로 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황제라도 광각초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면 안 되는 법이니까요.”
이안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미세리타가 주위를 매섭게 살피며 답했다.
“정면 돌파하실 겁니까?”
하르힌이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이안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이 인원을 단번에 순간이동 하는 것은 무리다.”
아비드의 마탑 인원은 텐젤의 마탑 마법사들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또한 그쪽의 마탑주가 이안과 견주어보았을 때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췄는지 알 수도 없었다.
보호 마법이 아비드 황궁을 둘러싸고 있어 황궁 안에서 마력을 내뿜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오리무중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따라왔던 위버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말해봐.”
“제게 싸움을 잘하는 몇 병사와 함께 하르힌을 붙여주세요. 비록 황궁 안까지 함께하지 못하더라고 밖에서 폭풍우를 내리게 만든다면 조금이나마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미세리타와 나는 그사이에 재빠르게 황궁을 들어가면 되고 말이야?”
“그런 셈이죠.”
위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동안 제가 활약하지 못했으니 사죄드리고자 이렇게 말해보는 겁니다. 활약할 수 있게 배려해주세요.”
“으이구, 네 머릿속에는 활약 생각뿐이야? 하여튼 단순하긴.”
미세리타는 그런 위버를 놀렸지만 그를 깔보는 어조는 아니었다. 위버를 향한 미세리타만의 칭찬이었다. 미세리타는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렀을 뿐 위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추적은 어차피 황궁 안에서 끊겨버리니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그러니 나도 너와 함께 남겠어.”
“어…? 그렇다면 너!”
“흥분하지 말고 듣지 그래. 너를 위해 자원하는 일이 아니야. 나보다는 더 유능한 하르힌이 저하와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내리는 결정이니까.”
뜻밖의 말에 위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단호하게 고개를 돌렸다. 미세리타는 이안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하, 얼른 가십시오. 위버가 폭풍우를 일으킨 후 약간의 남겨주신 병력과 함께 황궁 정면으로 쳐들어가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나? 이곳은 텐젤이 아니야. 내가 너희를 언제나 지켜줄 수도 없고 더군다나 -”
“걱정하지 마세요. 아비드 마법사들이야 저희가 외부에서 배운 것들로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상대들입니다.”
“…좋아, 부탁하지. 하르힌 그리고 제1 기사단을 제외한 모든 병력은 이곳에서 위버를 지킨다.”
이안은 그들의 강한 의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안과 하르힌이 이끄는 기사단을 제외한 인원은 남기로 했다.
미세리타는 그것마저 반대했지만 병력에 한에서는 이안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미세리타, 위버 두 사람 모두 강한 마법사였지만 이안에겐 미치지 못했다.
“후에 뵙겠습니다.”
“응, 기다릴게.”
그 말을 끝으로 이안을 선두로 한 병사들은 재빠르게 황궁으로 가는 길로 향했고 위버는 보기 드문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궁은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충분히 시야에 닿을 만한 곳에 있었다. 웅장한 크기의 아비드 황궁은 수도 한가운데에서 그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하.”
막 다다랐을 때 하르힌이 긴박한 목소리로 이안을 멈춰 세웠다.
“또 무슨 일이야?”
“저하는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십시오. 아무리 아비드 병사들을 따돌렸다 해도 저희 모두가 계속 함께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 인원에서 더 흩어지게 된다면 아비드 병사들을 마주했을 때 더 위험할 거다. 안돼. 위험하니까 기각이야.”
“시간이 없지 않습니까. 조금이라도 저희가 더 시간을 벌겠습니다. 위버가 몰고 오는 검은 구름이 벌써 보이니 저희가 먼저 시선을 끌며 지원 올 병력을 기다리겠습니다.”
“하….”
이안이 이마를 문지르며 제 앞머리를 거칠게 흩트렸다. 그 바람에 머리가 제멋대로 헝클어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중요한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안은 어쩌면 이번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앞둔 셈이었다.
“저하, 저도 감히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안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보다 못한 기사단장 알렉스가 한발 앞서 나와 목청을 가다듬었다.
“저하는 이제 이번 일이 끝나고 텐젤로 돌아가시면 더이상 저하가 아니시지 않습니까. 곧 황제의 자리에 오르실 분이시니 힘을 아끼셔야 합니다.”
“….”
언제나 과묵하던 알렉스까지 나서니 이안의 결심이 흔들렸다. 결국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 알겠어. 하지만 너희들 모두 무사하겠다고, 약속해라.”
“물론입니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알렉스와 하르힌이 우렁차게 답했다. 혹여나 그가 결정을 번복할까 그들이 앞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럼 나도 내 일을 해야겠지.”
미세리타의 말에 따르면 리제아나는 현재 황궁 깊은 곳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넓은 황궁을 빠른 시간 안에 모두 살필 수 없었다. 또 황궁 안에서 마법을 썼다간 병사들이 몰려올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안은 경비병 중 하나로 위장하여 황궁 안으로 잠입하기로 했다. 그는 병사 중 하나를 기절하여 그의 갑옷을 빼앗아 입었다.
이안은 조용히 눈을 감고 리제아나에게 선물로 주었던 곰 인형 속 마력을 찾았다. 비록 텐젤에서는 리제아나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 그가 아비드에 있으니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력의 기운을 찾아 이안이 복도를 걸을 때였다.
“이봐. 어디 가는 거요?”
경비병이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는 갑옷 차림이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이안은 제 움직임이 어색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안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죽일까? 위험한데.’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는 침착하게 뒤로 돌아서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냥….”
그가 목덜미를 잡고 말끝을 흐리자 병사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썹을 찡그린 채로 한 걸음 더 가까이 이안에게로 다가왔다.
이안의 손에서 검은 마법이 일렁였다. 그가 조금이라도 소리 칠 시에 단번에 그를 죽이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 없다! 지금 성문 앞에 어디서 온 지 모를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나타났다지 않는가!”
“!”
하르힌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행동을 취한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정신이 든 이안이 주변을 돌려보았다. 여러 병사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몇몇 얼굴은 전장에서 본 얼굴들도 있었다.
“먼저 가십시오. 저는 폐하께서 따로 명령을 내리셔서 그것 수행하고 가야 합니다.”
황제라는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병사는 주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궁을 비웠을 거란 생각에 한 변명이 통한 모양이었다.
“빠, 빨리 끝내고 와!”
“네.”
주춤거리는 병사의 모습을 통해 황제가 황궁에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제 또다시 자유가 된 이안은 조급한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마침내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황제의 침실로 보이는 거대한 방문 앞이었다.
경비병들은 없었다. 방문 앞은 고요하기만 했다. 황궁 밖 소란 때문에 모두 자리를 비운 듯했다.
“침…실?”
이 문 너머로 리제아나가 있을 터였다. 이안은 갑갑한 갑옷을 벗어 던졌다.
문고리 위에 손을 얹었다. 네르아에게 배신 당한 일과 황제를 베어낸 일이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삶에서 이어져 오던 두터운 관계 몇몇이 덧없이 끊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되찾기 위해 이안은 있는 힘껏 문을 열어젖혔다.
“리제…! 리제아나…?”
예상대로 침실에는 리제아나뿐이었다. 리제아나가 홀로 두 팔과 다리가 묶인 채로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순간 이안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던 것들이 한데 뭉쳐 그의 정신을 아득하게 했다.
“리제아나? 정신 좀 차려봐!”
그는 빠르게 그녀에게 다가가 축 늘어진 그녀를 유리 다루듯이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미약한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쉬는 숨이 불규칙했다.
리제아나의 상태는 꽤나 심각해 보였다. 상처는 아문 듯이 보였지만 몸 곳곳에 생채기가 나 있었다.
거기다가 땀을 어찌나 흘리는지, 리제아나의 얼굴을 닦아주던 이안의 손이 금세 축축해질 정도였다.
“리제아나, 제발 좀 일어나봐. 내가 왔어. 늦었지만 그래도 내가 왔으니 제발 눈을 떠주면 안 될까…?”
더는 소중한 사람을 제 눈앞에서 떠나보내고 싶지 않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깊은 갈망이 어느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돌아가자 우리. 텐젤로,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살게 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눈을 떠 줘.”
위험한 일이 있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언제나 마법이나 그의 지위를 사용해 해결하던 이안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 앞에서는 그의 힘도 권력도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어?”
리제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에게 구원과 같았다. 단 한 마디뿐이었지만 빠르게 뛰던 그의 심장이 가라앉았다.
“말도… 말도 안 돼. 이안…? 정말 이안?”
그녀를 내려다보는 이안이 그녀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꿈일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이안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꿈이라도 좋았다. 그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리제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다녀왔어. 리제아나.”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품 안에 깊숙이 안고 속삭였다.
“내가 왔어. 이제 다시는 떨어질 일 없을 거야. 그러니 아무 걱정 하지 마.”
리제아나는 눈앞의 그가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점점 몸에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리제아나는 문득 의아했다. 그녀가 멀쩡히 눈을 뜨고 이렇게 그를 마주할 수 있다니. 지금쯤이면 그녀는 광각초에 중독되어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