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미친 새끼.”
부릅뜬 희우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하아, 고운 말 좀 쓰라니까.”
남후는 희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에게서 알싸한 알코올 냄새와 매캐한 담배 냄새가 섞여서 났다.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난다더라.”
“뭐가.”
희우가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대답이 아니라 앞이 새카매지는 눈가리개였다.
순간 암흑이 찾아온 후 탁 소리와 함께 주변이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또각또각.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에 희우는 귀를 쫑긋 기울였다.
남후가 다른 사람과 함께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누구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양껏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무언가가 코를 덮었다.
산소 호흡기?
코와 입을 동시에 막고 있는 그것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힘껏 흔들었으나 누군가 머리카락을 움켜쥐는 바람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희우야, 빨리 끝난다니까.”
우악스러운 손길과 달리 남후의 목소리는 아기를 달래듯 친근하고 다정했다.
희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걱정되세요?”
초조한 기색으로 넓은 원장실을 왔다 갔다 하는 수정을 보며 정은이 물었다.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그녀는 후원회 파티장에서 만났던 날과는 인상이 전혀 달라 보였다.
부드럽고 배려 깊은 미소를 짓던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죽거나 하는 건 아니겠죠?”
희우가 미친 듯이 미웠지만 죽이고 싶진 않았다.
그저 현태 앞에서 멀리 치우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현태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자신이 쥐고 있어야만 했다.
수정이 내린 결론은 바로 희우의 난자를 채취해 냉동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난임 부부가 얼만지 알아요? 일곱 쌍 중 한 쌍이 불임센터를 찾아요.”
수정은 말없이 정은이 느긋하게 내뱉는 말을 경청했다.
긴장감으로 심장이 터질 듯한 저와 달리 정은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여유로워 보였다.
그만큼 간단한 시술이라는 거겠지.
수정은 믿음직스러운 정은의 모습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하지만 근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왜 날 도와주겠다고 했죠?”
“글쎄요. 나는 그럴 능력이 되니까?”
빈정대는 웃음이 섞인 대답이었다.
와 닿지 않는 대답에 수정의 미간이 짜증스레 구겨졌다.
“내가 말했잖아요. 저런 여자, 기 현태한테 안 어울린다고.”
“그게 김정은 씨하고 무슨 상관이죠?”
다급한 마음에 부탁은 했지만 막상 저지르고 보니 의심 가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 그냥 소소한 복수라고 해 두죠.”
“누구에게요?”
정은은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마취가 깨기 전에 끝내야 해서요. 준비 없이 하는 난자 채취라 실패할 수도 있어요. 만약 그러면…….”
“난소를 못 쓰게 할 수도 있어요?”
“…….”
수정의 질문에 정은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일단 볼게요.”
묘한 여운을 남긴 정은이 원장실을 나간 후 수정은 온몸에 힘이 탁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정말 돌이킬 수 없었다.
“이게 다 갑자기 나타난 그 여자 때문이야.”
뺨을 타고 방울방울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쉴 틈 없이 닦아내는 수정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 *
신고 후 경찰과 함께 아파트 CCTV를 확인하던 경호원이 갑자기 화면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사람입니다.”
그가 가리키는 곳에는 까만색 야구 모자를 푹 눌러쓴 택배 직원이 커다란 상자가 실린 짐수레를 싣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 상자가 폐가구라고 했다 했단 말이죠.”
성인 한 명은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큰 상자였다.
정황상 저 상자 안에 희우가 들어가 있을 가능성이 컸다. 현태는 화면 속 상자에서 한참 동안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택배 트럭 차량 조회 중이니 곧 어느 방향으로 갔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저희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아내를 스토킹하던 사람이 있습니다.”
“김남후 씨 말씀이시군요.”
“그 사람을 먼저 찾아서”
현태가 다급하게 말을 보태자 형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알리바이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현태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리는 기분이었다. 희우의 존재가 공중에서 먼지처럼 사라질 것만 같았다.
“스토킹 사건 접수 후 김남후를 검거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 듣는 소리에 현태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갔다.
한 번도 보고 받은 적 없는 일이었다. 현태의 눈빛이 흉흉하게 변하는 걸 본 형사가 목소리를 큼큼 가다듬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분에게 결혼한 지 모르고 꽃바구니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충분히 반성하고 있었고, 엄중 처벌 경고 후 훈방조치…… 했습니다.”
“그냥 보냈다는 말입니까?”
“김남후 씨는 이틀 전부터 병원에 입원 중입니다.”
형사는 골치 아픈 사건을 맡았다는 듯 사납게 짜증스레 인상을 쓰며 굵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었다.
솔직히 아이도 아니고 어른이, 그것도 사라진 지 몇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부산을 떨어대는 게 영 못마땅했다.
경찰 서장이 워낙 닦달을 해서 못 이기고 달려오긴 했지만 부부싸움 후 가출한 아내를 찾는 건 자신의 짬밥에 격이 떨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좀 산다는 작자들이 윗선을 건드려 저를 움직이게 했다는 사실이 못내 자존심이 상했다.
서울로 발령받은 첫날에 이딴 일이나 맡다니.
게다가 뭐? 택배 박스? 영화를 너무 많이 봤지.
“그 병원이 어딥니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현태가 서늘하게 바라보며 한 질문에 형사가 난색을 보이며 손을 저었다.
“또 다른 폭행 사건으로 이어지면 해결이 더 어려워집니다. 남편분께서는 그냥 저희를 믿고…….”
현태는 더 이상 형사의 말을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
사건을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욕이 보이지 않는 형사 앞에서 더 이상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현태는 저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형사를 그대로 응시한 채 휴대폰을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내일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올 게 뻔한데. 딱 봐도 남편 때문에, 집 나간 게 분명하네.’
형사는 이번 사건을 단순 가출 사건으로 규정짓고 있었다. 남편의 험악한 인상을 보니 부인이 안 나가는 게 이상할 것 같았다. 조만간 가정폭력으로 신고가 들어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텅텅 비어있는 수첩에 영양가 없는 단어들을 끼적였다.
“할아버지.”
집 나간 아내의 남편이 걸었다는 곳이 고작 할아버지라 형사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지고 한숨이 길게 쉬었다.
한심하네.
수첩에 휘갈기듯 추가된 말에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겹쳐 그리다 별표까지 했다.
이래서 저만 귀한 줄 알고 자란 것들은 상대하면 피곤한 거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연줄을 대나 보자, 그래봤자 내가 눈 하나 깜짝할 줄 알고.
기회장은 느긋하게 바둑 방송을 보다가 걸려온 전화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놈이 무슨 일로 먼저 전화를 다 했지?”
일 년에 딱 한 번 현태가 먼저 전화하는 날이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생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생일도 아니었다.
“결혼하더니 철들었나 보네.”
기 회장은 허허, 소리 내서 웃은 후 가뿐한 마음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가 웬일이냐? 먼저 전화를 다 하고?”
타박하는 말투였지만 기 회장의 얼굴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만연했다.
-희우가 납치당했습니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현태의 말에 기 회장의 입가에 풍성하게 걸려있던 미소가 단번에 사라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희우가 왜? 어떤 놈이!”
현태는 그동안 희우의 스토커에 대해서는 기 회장에게 따로 언급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철저한 기 회장이라면 이미 희우의 과거에 있었던 일쯤은 알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김남후 짓인 것 같습니다.
기 회장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스토커 말이냐.”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모두 이해하고 바로 김남후의 존재를 기억해내는 할아버지가 대단하게도, 한편으론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많이 따라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아득히 높은 산이고, 넘어야 할 거대한 벽이었다.
“경찰은 단순 가출로 규정짓는 듯합니다.”
통화를 하고 있는 현태를 본 형사가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끼었다.
친구가 때렸다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는 철없는 꼬마를 보는듯한 눈빛이었다.
할아버지인지, 할머니인지와 조금 더 통화를 나눈 후 전화를 끊는 기현태를 보며 형사가 말했다.
“이보세요. 기현태씨. 그렇게 막무가내로 때 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절차라는 게 분명히 존재하고, 사건의 경중은 형사인 제가 판단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였다.
현태는 더 이상 들을 말도 없다는 듯 몸을 홱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 버렸다.
“젊은 놈이 싸가지 없게!”
형사는 집안만 믿고 나대는 젊은 놈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쯧 찼다. 여기저기 마음에 안 드는 것투성이였다.
“선배님, 정말 이대로 가만있어도 되는 걸까요?”
그의 곁에 있던 젊은 형사가 현태의 뒷모습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형사는 피곤하다는 듯 들고 있던 수첩을 파리 쫓듯 휘휘 저으며 짜증을 냈다.
“괜찮아.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줄 알아. 척 보면 척이지. 남편 인상을 좀 봐라, 와이프가 집을 안 나가게 생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