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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67)화 (57/75)

67화

수정은 남후에게 주소를 전달받자마자 현태가 새로 이사한 주소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반드시 지금 그를 봐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기현태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이 불안감이 조금은 사그라질 것 같았다.

액셀러레이터에 발을 올린 수정의 눈빛이 분노와 슬픔으로 뒤섞여 그렁그렁했다.

스피커폰으로 돌린 다음 수정은 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운전 중인지, 일부러 받지 않는 건지 연결 음만 길게 들렸다.

여러 번 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건 모두 네가 전화를 안 받은 탓이야.”

수정이 속도를 높이며 중얼댔다.

저녁 준비를 하느라 나름 부산을 떨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퇴근한다고 현태에게 연락을 받았던 터라 희우는 망설임 없이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빨리 왔네요?”

하지만 현관 앞에 서 있던 사람은 희우가 현태가 아니라 택배 기사였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젊은 여자였다.

화장기 없이 창백한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택배입니다.” 

얼굴이 하얀 여자는 코와 입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선이 갸름한 미인이었다.

그녀가 택배 수레에 올린 커다란 상자는 어떻게 들고 왔는지 궁금할 만큼 꽤 묵직해 보였다.

“이게 뭔가요?”

“내용물은 가구라고 되어 있는데요? 어디에 둘까요?”

아무래도 현태가 가구를 주문한 모양이었다.

희우는 여전히 저와 상의 없이 가구를 주문하는 현태에게 나중에 한마디 해야겠다. 생각하며 상자를 안으로 옮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열려 있는 현관 밖에서 낯선 남자 둘이서 서성이는 게 보였다. 안을 유심히 살피는 모양이 현태가 주변에 심어 둔 경호원인 것 같았다.

희우와 눈이 마주치자 그들이 살짝 고개를 인사했다.

나중에 커피라도 한 잔 타서 드려야지 생각하며 마주 인사를 하는데 택배 기사가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모님, 죄송하지만 화장실 좀 쓸 수 있을까요? 갑자기 생리가 터진 것 같아서요.”

여자가 창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기껏해야 희우보다 서너 살 더 많아 보였다. 어쩌면 집에 어린 자녀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 쓰세요. 저기 두 번째 문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여자는 정말 고마웠는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황급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희우는 그새 여자가 현관 바닥에 내려놓은 상자를 옮겨보려 했으나 도무지 움직여지지 않았다.

“무슨 가구길래 이렇게 무거워.”

잠깐 밖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할까 고민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대로 현관에 두고 희우는 안으로 들어와 화장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네, 사모님 잠시만요!”

“천천히 하세요. 생리대는 가지고 오셨어요?”

“……아니요. 죄송합니다.”

여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제가 문 앞에 생리대 놓아둘 테니까 편하게 쓰세요.”

“감사합니다, 사모님.”

여자의 목소리가 울먹울먹했다.

고단한 그녀의 삶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아 희우는 마음이 쓰렸다.

생리대를 가져오려 방으로 가던 희우는 활짝 열려 있는 현관문을 보고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렇게 열린 문으로 그 사람이 언제든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밖에서 지키고 서 있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두려움이었다.

희우는 현관으로 가서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 서랍 안에 두었던 생리대를 꺼내 밖으로 나와 택배 기사가 들어간 화장실 앞에 놓았다. 문을 열면 바로 집을 수 있는 위치였다.

“문 열고 가져가시면 됩니다. 저는 저쪽에 가 있을게요.”

“고맙습니다.”

작게 인사하는 소리에 희우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텁!

누군가에 의해 우악스럽게 입이 막혔다.

소리 지르려고 발버둥을 쳤으나 이내 알싸한 냄새와 함께 눈앞이 스르르 흐려졌다.

희우가 마지막으로 본 건 열려 있는 택배 박스와 화장실에 나온 여자의 미안한 얼굴. 그리고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던 김남후가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말랑아, 너 데리러 왔어.”

* * *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 현태는 현관 앞에서 뿌듯한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예전에는 비밀번호를 직접 누르고 들어갔지만, 왠지 희우가 열어주는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딩동.

하지만 현관이 열리기는커녕 안에서 움직이는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딩동.

현태는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

왠지 희우가 수련회 때문에 외박을 했던 날과 겹쳐지는 상황에 기분이 이상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독고희우는 온전히 제 여자였고,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현관이 굳게 닫힌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태는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어디 갔나?”

현태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비밀번호를 눌렀다.

띡띡띡띡.

딱딱한 기계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관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간 현태는 이상하리만큼 휑한 실내 공기에 후다닥 방으로 뛰어가 희우의 방문을 열었다.

희우는 집 안에 없었다.

현태는 희우에게 전화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냈다.

띠링.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희우에게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현태씨, 나 오늘 친구 집에서 자고 올게요. 친구가 많이 아파서 같이 있어 줘야 할 것 같아요. 전화해도 못 받을 수 있으니까 연락 안 된다고 걱정하지 말아요.

현태는 문자를 읽으며 눈썹을 사납게 구겼다.

친구 집에서 잔다고?

이상했다. 외출하기 민망할 만큼 온몸에 자국을 가득 남겼다.

엉뚱한 성격이긴 했지만 그런 상태에서 친구를 만나러 갈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싸한 느낌에 현태는 주저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삐 소리가 난 후 연락받으실 전화번호를 남겨주세요.

콰앙!

현태가 거침없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에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경호원 두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와 앞에 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와이프, 언제 집에서 나갔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사모님 집 안에 계실 텐데요.”

현태는 온몸의 피가 빠르게 식는 기분이었다.

“없습니다. 아무도.”

“하지만 사모님은 문밖으로 나오신 적이 ……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바쁘게 말을 잇던 경호원 한 명이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말해.”

어느새 현태의 말은 짧아져 있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 시간 전쯤 택배 기사가 가구를 배달하고 갔습니다. 헌 가구까지 수거해서 간다고 했는데…….”

경호원은 눈앞에서 사람을 놓친 것 같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부인을 노리는 스토커가 있다고 했던가.

“택배 기사가 여자분이라 방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여자였다고?”

어느새 현태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압도될 만큼 냉랭한 분위기에 경호원들은 서로 눈치 보기에 바빴다.

* * *

과음을 한 것처럼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희우는 쇠 추가 온몸에 주렁주렁 달린 것 몸이 무거워 겨우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 주변을 살폈다.

제일 먼저 파악된 건 자신이 처음 보는 침대에 누워있다는 사실이었다.

서늘한 이불의 감촉이 온몸을 눌렀고, 묶였는지 움직일 때마다 손목과 발목 피부가 쓰렸다.

실내가 어둑해서 처음엔 시야가 또렷하지 않았지만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니 차츰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지독하리만큼 익숙한 상황에 눈앞이 아득해질 만큼 절망스러웠다.

일단 몸을 일으켜야 했다.

하지만 앉으려고 용을 써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더러운 년.”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목소리에 희우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홱 돌렸다.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의자를 두고 앉은 사람은 바로 남후였다.

희우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내가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온몸에 그딴 자국이나 남겨와? 네가 그러고도 내 여자라고 할 수 있어?”

날카롭던 남후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울부짖음으로 바뀌었다.

“내가 널 데려가기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넌 나한테 이러면 안 돼. 감히 네까짓 게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남후의 목소리가 다시 격렬하게 바뀌고 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나 희우에가 가까이 다가와 그녀가 덮고 있던 이불을 홱! 젖혔다.

갑자기 온몸에 느껴지는 한기에 희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저리 꺼져.”

희우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한 말에 남후는 한숨을 푹 내쉬며 희우의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하아, 말랑아. 내가 말 예쁘게 하라고 했잖아. 너는 이런 말 하는 거 전혀 안 어울린다니까?”

“닥쳐!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 알고 있어?”

“당연히 알지. 내가 언제 계획 없이 움직이는 거 봤어?”

“너!”

희우가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부르르 떨었다.

“쉬이잇! 그러지 마. 희우야. 나 마음이 너무 아프다. 진심이 아닌 거 아니까 이번만큼은 내가 용서해 줄게. 그러니까 더 이상 나 화나게 하지 마. 안 그러면 지금 여기서 널 어떻게 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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