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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58)화 (48/75)

58화

시할아버지에게서 패물을 잔뜩 받았지만 현태와 나눠 낀 반지는 없었다. 그땐 이상하다고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반지는 그냥 반지일 뿐이고, 결혼은 다른 목적을 위한 임시방편이었으니까.

반지 없는 결혼이라니. 액자와 달리 두 사람의 결혼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나타내는 증거 같았다.

어색한 결혼식 사진과 비어 있는 손가락. 아득하게 느껴지는 괴리감에 희우는 어쩐지 씁쓸해졌다.

일 년이 어서어서 지나가서 혼란스럽고 어정쩡한 마음이 정리가 되기를 바랐다. 희우가 들고 있던 액자를 막 내려놓았을 때였다.

지잉, 지잉, 지이이이이잉-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부르르 느껴졌다. 희우는 무심코 꺼내 발신 번호를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흔히 보는 스팸 번호가 아니라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살짝 불안했지만 이상한 전화라면 끊어 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

상대방은 말이 없었다. 어딜 뛰어가는지 급한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거친 호흡 소리는 몇 번 더 들리다가 이상한 신음 소리로 이어졌다. 아픈 사람의 신음 소리 같지는 않았다.

-허억! 허억! 아아아아! 아아으으으으!

희우는 얼른 휴대폰을 귀에서 때고 얼른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전화를 끊기 무섭게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휴대폰을 든 희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종료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대로 계속 도망갈 수 없다는 마음도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곳은 안전하다. 숨을 필요가 없었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누른 희우는 이번엔 먼저 말하지 않고 상대방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여전히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말랑아.

김남후.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 하마터면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휴대폰을 쥔 희우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녹음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달달 떨렸다.

“닥쳐.”

-크흐흐흐흐흑! 우리 말랑이, 터프한 건 여전하네. 내가 그 맛에 널 좋아했잖아.

“경찰에 신고했어.”

-내가 뭘 했다고. 난 그냥 널 진심으로 사랑하는 거야. 하아, 하아!

탁! 탁! 탁!

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마찰음을 따라 남자의 신음 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나는 시발, 혼자 빼고 있는데. 너는 결혼해서 그 새끼랑 밤마다 떡 치니까 좋아? 응? 내가 그렇게 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하더니. 희우야. 내 말랑아. 하아!

“소름 끼치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이 새끼야.”

희우가 이를 으득 물었다.

-크크크큭! 튕기기는. 니가 그렇게 나대니까 내가 더 꼴리잖아.

“닥쳐! 그 새끼손가락만 한 거 잘라 버리기 전에 다시는 전화하지 마. 알았어?!”

더 이상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강하게 대꾸하고 있지만 무서워서 죽을 것만 같았다.

희우가 막 전화를 끊으려고 할 때였다.

-그러게, 시발! 왜 이사를 가고 지랄이야. 내가 또 찾아야 하잖아.

툭!

손에서 힘이 빠져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끊어지지 않은 휴대폰에서는 신음 소리와 욕지거리가 쉬지 않고 들렸다.

희우는 그대로 전화를 끊고 연락처를 뒤져 현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생각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 *

“횡령 금액이 얼마나 됩니까?”

“백오십억입니다.”

현태의 질문에 회의실 끝에 앉아 있던 직원의 목소리가 모기처럼 작아졌다.

회계직 직원의 횡령은 생각보다 치밀했다.

“어째서 눈치채지 못한 겁니까.”

“이중장부가 철저했습니다. 결재 서류에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탕!

현태가 책상을 치는 소리에 회의실에 앉아 있던 직원들의 어깨가 움찔 움츠러들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이제 겨우 업무를 파악하고 일을 추진하고 있는 현태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그쯤은 개인 자산으로 얼마든지 메꾸어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소문이었다.

증권가엔 벌써 한울 전자 직원의 횡령 소식이 암암리에 돌고 있을 터였다. 회사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건 시간문제였고, 기사화되는 것도 막을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하아!”

현태의 한숨 소리와 동시에 직원들의 고개가 아래로 푹 숙어졌다.

“본부장님께서 이러시는 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수습이 먼저예요.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다들 죽어가는 목소리일 때 유일하게 또랑또랑한 목소리는 수정의 것이었다. 시든 배추처럼 축 처져 있던 고개들이 수정을 향해 슬그머니 일어섰다.

수정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준 후 현태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신고는 했고, 해외 도주 우려가 있어서 출국금지 신청도 해 놓은 상태예요. 곧 잡힐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이이잉- 지이이이잉-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에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현태의 휴대폰이 부르르 떨리면서 움직였다.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휴대폰에 고정됐다.

혹시라도 경찰에게서 연락이 왔는지 잔뜩 기대하는 눈빛들이었다.

현태는 묵직한 두통을 느끼며 휴대폰을 뒤집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희우에게서 온 전화였다. 지금 사안이 중대한 만큼 종료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통화가 불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현태는 이미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댄 후였다.

“무슨 일이지?”

수정은 회사에 간 걸 뻔히 알면서 전화나 해 대는 희우의 꼴사나운 행동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남편이 놀러 간 것도 아닌데 잠시를 못 참고 전화를 해?

안 그래도 복잡한 회사 일 때문에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수정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전화를 받는 현태를 노려봤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태가 쥔 휴대폰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지금 갈 테니까 기다려.”

현태의 말에 놀란 건 수정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밤을 새울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던 직원들이 영문을 몰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부장님! 지금 집에 가신다고요?”

직원들의 놀란 마음을 대변한 것도 수정이었다. 지금 이 시국에 아내 전화나 받고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는 현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상황이었다.

현태 네가 이러면 안 되잖아. 넌 이런 애 아니잖아!

수정은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수정이 할 수 있는 건 입을 앙다물고 현태를 노려보는 것뿐이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현태는 다급하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태풍이 몇 차례 뒤집고 지나간 것 같았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걸까요?”

현태가 뛰쳐나가는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던 직원 하나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특정한 사람을 향한 질문은 아니었다. 다만 회사 일도 이런데 집안일까지 있으면 그 속이 말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사실 본부장님 와이프 상태가 좀 이상해요. 그래서 그럴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회사는 회사고, 남의 복잡한 가정사만큼이나 구미를 당기는 일도 드물었기에 회의실 직원들의 눈빛이 순간 초롱하게 빛났다. 잠시라도 복잡한 회사 일을 잊을 수 있는 가십 거리는 술안주처럼 별미였다.

“우울증이 있는데 그걸 본부장에게 푸는 모양이에요. 의부증도 심하고. 떨어져 있던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까 그런가 이해를 하려고 하지만 정도가 심해서 기 본부장님이 힘들어해요.”

두 사람이 각별한 친구 사이니 털어놓나보다 생각하며 듣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 말을 막 해 줘도 되나?

그렇구나, 였던 직원들의 눈빛이 괜찮나? 로 바뀐 순간 수정이 긴밀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에게 당부했다.

“이건 비밀이니까 다른 데 새어 나가지 않도록 부탁해요. 전 여러분을 믿어서 한 말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네! 물론이죠. 어디 가서 말 안 합니다.”

“걱정 마세요, 팀장님. 그나저나 본부장님 힘드시겠네요. 회사도 그렇고 아내분 일도 그렇고요.”

“본부장님 안 되셨어요.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하는데.”

“그러니까요. 우리 팀장님 같은 분과 결혼했어야 하는데.”

직원들끼리 수군대는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수정은 어지럽게 흩어진 서류를 정리했다.

* * *

띠리릭!

침대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희우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반가운 마음과 불안한 마음이 동시에 얽혔다. 거실에 있던 장식품 하나를 손에 쥔 희우의 시선이 문 쪽을 향해 불안하게 흔들렸다.

똑똑똑.

자신의 방이 아닌 현태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희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미닫이문을 열었다.

“누구세요?”

“나야.”

“하아…….”

현태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의 긴장이 풀렸다. 희우는 방문으로 천천히 걸어가 잠가 놓았던 현태의 방문을 열었다.

딸깍.

희우가 잠금장치를 풀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현태라는 걸 알았지만 워낙 긴장되어 있던 상태라 희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헉!”

뛰어왔는지 현태는 단정한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저를 보는 현태를 보니 희우는 왠지 눈물이 핑 돌았다.

“뛰어왔어요?”

“어.”

“바쁜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있어.”

“그런데 왜 왔어요?”

“몰라.”

희우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현태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희우의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이다.

“울었어?”

“아니요.”

희우는 재깍 부인하며 얼른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면서 제 속을 벅벅 긁는 게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겁을 먹고 눈이 부어 있는 걸 보니 화가 치밀었다. 직원이 백오십억 횡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화가 치밀어 머리가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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