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수정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현아에게 받았던 봉투를 꺼냈다.
현아가 가방에서 이걸 꺼냈던 순간부터 누런 봉투를 찢어발겨 내용을 확인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꾹 참았다. 수정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지이익-
수정의 손에서 단단하게 봉인되어 있던 서류 봉투가 찢겨 나갔다.
제법 묵직한 봉투를 거꾸로 뒤집어 내용물을 테이블 위에 쏟았다.
안에서 나온 건 대학생으로 보이는 독고희우와 어떤 남자의 사진이었다. 팔짱을 끼고 걷기도 하고, 상대방의 입에 김밥을 넣어주는 모습, 그리고 남자가 희우의 볼에 입 맞추는 사진.
“이렇게 다른 남자가 있었으면서 더럽게…….”
수정에겐 현태뿐이었다. 다른 남자를 마음에 담은 적도, 다른 이의 품에 안긴 적도 없었다.
수정은 다급하게 다른 사진들을 살펴보다가 현아가 넣어둔 쪽지 한 장을 발견했다.
수정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수정은 독이라도 발견한 듯 바라보기만 하다 쪽지를 집어 들었다.
-여기로 전화해. 어렵게 알아낸 거야.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걸? 현태가 알았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알잖아. 현태가 어떤 앤지. 지독하게 욕심이 많지. 웬만해선 그 여자를 놔주지 않을 거야. 사랑이랑 상관없이. 그러니까 잘 생각해. 내가 준 패를 어떻게 이용할지.
수정은 징그러운 벌레 보듯 쪽지를 노려보다 제일 아래 적힌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입력했다.
* * *
1박 2일의 수련회를 끝낸 희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아침에 먹었던 약 기운이 떨어졌는지 다시 온몸이 욱신욱신 쑤셨다.
“으으으. 죽겠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며 주머니 안에서 이슬이 건넨 약을 꺼냈다.
“쓸데없이 걱정은 많아 가지고.”
소심함의 극치를 달리는 이슬은 걱정하다 본래 하려던 것을 못 할 때도 있었다.
답답해 보일 수도 있었지만 희우는 그런 이슬이 귀엽기만 했다. 전전긍긍하며 애쓰는 모습이 기특하고 예뻤다.
약을 들고 주방으로 간 희우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수국 바구니를 발견했다.
“뭐지?”
며칠 전에 받았던 건 시들해진 채로 방에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이건 꽃잎이 하나하나 생생하고 향기도 좋았다.
“누가 보낸 거지?”
희우는 쪼그리고 앉아 꽃바구니를 유심히 살폈다. 언제 봐도 예쁜 꽃이라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행복해졌다.
누가 보내준 건지 알면 좋을 텐데.
풍성한 수국꽃 더미를 뒤적이던 희우는 꽃잎 사이에 깨워진 종이 뭉치를 발견했다.
“이게 뭐야? 누가 쓰레기를, 응?”
험악하게 구겨진 건 쓰레기가 아니었다. 희우는 꼬깃꼬깃해진 엽서를 반듯하게 폈다.
드디어 누가 보낸 건지 알 수 있는 건가? 이게 어떻게 집에 있지? 그런데 누가 이렇게 구겨 놓은 거야?
순서 없이 떠오르는 질문이 정리되기도 전에 익숙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구겨진 엽서는 소름 끼치도록 네모반듯한 글자들로 빼곡했다.
-말랑이에게…….
첫 구절을 읽은 희우의 손에서 카드가 툭! 떨어져 내렸다.
-매일매일 네가 그립다. 너와 함께 한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워. 보고 싶어. 사랑해, 언제까지나. NH
희우의 동공이 글자를 따라 불안하게 움직였다. 엽서를 든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 이게 왜…….”
잠시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희우가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방으로 달려가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쾅!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희우의 불안한 시선이 꽃바구니로 직진했다. 방 안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수국은 살짝 시들해지긴 했어도 여전히 푸르고 풍성했다.
호흡이 빨라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바구니 가까이 다가가는 희우가 방 안을 불안한 시선으로 이리저리 살폈다. 그날처럼 그가 어딘가 숨어 있다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가 어디 사는지 알아. 내가 어디 근무하는지 알아.
턱이 저절로 떨렸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희우는 바들바들 떨며 시체를 만지듯 바구니를 잡았다.
손바닥에 닿은 바구니의 꺼끌꺼끌한 감촉이 소름 끼쳤다. 희우는 그대로 방문을 열고 방 밖으로 수국 바구니를 힘껏 집어 던졌다.
퍼억!
벽에 부딪혔다 땅으로 떨어진 수국은 꽃대가 부러지고 초록색 오아시스는 바구니 밖으로 튀어나왔다. 복도가 엉망이 되었지만 희우는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문을 닫고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갔다.
철컥.
방문이 잠기는 소리와 함께 방 안의 불이 탁! 꺼졌다.
* * *
퇴근길에 현태를 발견한 직원들이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슬금슬금 그를 피했다. 오늘 그에게 말을 걸었다가 끝이 좋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 팀장님, 본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멀어지는 현태의 뒷모습을 훔쳐보던 공 대리가 수정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현태가 코너를 돌아 자취를 감추자 공 대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무 일도 없어요.”
수정의 말투가 단호했다. 현태에 모르는 게 없는 사람처럼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대답을 들었지만, 공 대리는 수정의 대답이 마음에 걸렸다.
기현태 본부장과 하수정 팀장이 대학 동기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단순히 대학 동기일 거라 믿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수정이 매일 본부장실을 드나들기도 했고, 바깥에서 따로 만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현태가 사라진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수정을 보는 공 대리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샜다. 그는 수정 대신해야 할 서류들을 묵직하게 들고 있었다.
현태는 수정이 한잔하자 조르는 걸 한 귀로 흘렸다. 술 마실 기분도 아니었지만 솔직히 귀찮은 마음이 더 컸다.
현관문을 열기 위해 섰던 현태는 도어락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치한 객기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현태는 조금은 심술궂은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열어.
하지만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 한참이 지나도록 문을 열어주기는커녕 안에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띵동!
조금 전보다 신경질적이고 다급하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기다렸지만 역시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직 안 들어 왔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신경질적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던 현태는 정신없이 어질러진 현관의 모습에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수국 꽃바구니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뭐야.”
꼴 보기 싫은 수국 바구니가 망가진 건 좋은 일이었으나 바구니가 찌그러질 만큼 망가진 건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누군가 힘껏 던지지 않았으면 절대 이렇게까지 될 리가 없었다.
잠시 어지러운 바닥을 살피던 현태는 슬리퍼로 갈아 신고 찌그러진 바구니를 들었다. 꽃대가 부러진 채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수국을 망가진 꽃바구니 안에 대충 쑤셔 넣었다.
우두둑-
꽃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아시스에서 흐른 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아무래도 이 사태를 만든 장본인은 독고희우 같았다.
왜?
이 와중에도 희우가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현태는 바구니를 구석에 툭 던져놓고 희우의 방문을 두드렸다. 바구니 안에서 수국이 다시 쏟아졌지만 쳐다보기도 싫었다.
수국 따위 알 게 뭐야.
똑똑!
“안에 있어?”
안에서 뭔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대답도 안 해?
현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그의 인내심은 그리 긴 편이 아니었다. 현태를 잘 아는 사람이 본다면 깜짝 놀랄 정도로 독고희우를 만난 후 그의 한계를 갱신하는 중이었다.
세 번째 노크를 하기 직전, 문이 열렸다. 빼꼼히 열린 방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왔어요?”
어둠 속에 드러난 희우의 얼굴을 본 현태는 방문을 턱 잡았다. 어쩐지 희우가 다시 캄캄한 방 안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잔 거야?”
부스스한 희우의 몰골을 보고 현태가 인상을 찌푸렸다.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희우는 움찔 놀라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희우의 눈빛이 현태 너머 어딘가로 불안하게 움직였다.
“어떻게 된 거지?”
현태가 살짝 비켜서며 망가진 수국 바구니를 가리켰다. 순간이지만 수국을 바라보는 희우의 눈빛에 혐오가 가득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래?”
현태는 뭔가 잘못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게 틀림없었다. 그 일은 저 수국 바구니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피곤할 텐데 쉬세요.”
약한 바람에도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기운 없는 목소리였다.
희우는 다시 방문을 닫으려 했지만 현태가 잡은 문을 놓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희우의 시선을 좇았지만, 희우는 회피하기 바빴다.
현태는 갑자기 짜증이 확 솟았다.
말 한 마디 없이 외박을 하고서 설명도 없다?
“어젯밤, 어디서 뭘 하고 들어왔는지는 관심 없어.”
시선을 피하기만 하던 희우가 놀란 눈으로 현태를 바라봤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현태는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기회는 충분히 줬다. 오해를 받더라도 이 여자의 잘못이었다.
“밤새 누구와 뒹굴고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나와의 의무는 잊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지금 뭐라고…….”
“게다가 난 다른 사람이 더럽혀 놓은 걸 치워 줄 만큼 관대하지도 않아. 그러니 나와서 저 흉물스러운 거 치워.”
방문을 잡은 현태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고개를 치켜든 희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온기라곤 일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