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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러 들어온 남편 (41)화 (68/75)

41화

현태는 거실에 알몸이나 다름없는 몸으로 누워 있는 수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침실에서 이불을 꺼내 와 덮어 주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띠릭-

현관문이 닫히고 집 안에서 더 이상 현태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을 때 수정은 천천히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은 현태가 아닌 독고희우, 그 여자였다. 이 모든 게 독고희우 때문이었다.

그 여자만 없었으면…….

제 몸을 반쯤 덮고 있는 이불을 움켜쥔 수정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 * *

뉴욕에 살 때나, 한국에 있을 때에도 불 꺼진 집에 들어오는 건 흔하고 평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연 순간 집 안에서 느껴지는 텅 빈 냉기에 현태는 이상하게 화가 났다.

더 이상 참지 못한 현태가 다시 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결 음만 길게 이어질 뿐 받는 사람은 없었다.

몇 번 더 희우에게 전화를 걸어 본 현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본부장님.

희우와 달리 연결 음이 두 번 울리기 전에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보낸 휴대폰 번호 현재 위치 어딘지 알아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짧은 침묵 후 김 비서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김 비서는 무척 유능한 사람이었다.

현태는 통화를 끝내고 나서 소파에 앉아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뭘 하겠다는 거지?

현태의 눈에 구석에 밀어 놓은 수국 바구니가 들어왔다.

빌어먹을 수국 같으니.

반듯한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던 편지도 생각났다.

말랑이라니. 절절하기도 하지. 그 새끼 품에 안겨 말랑하게 웃고 있으려나.

현태의 상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쯤 그의 손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김 비서에게서 온 전화였다. 현태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 있습니까?”

-경주에 계십니다.

“경주?”

문득 민성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설마 그놈하고 같이 있는 건가? 아니면 수연제에 간 건가?

하지만 평일이었다. 출근까지 안 하고 갈 일이 뭐란 말인가.

머릿속이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엉망진창이 되어갔다.

“경주 어딥니까.”

질문한 현태의 입 안이 바싹바싹 말랐다. 김 비서의 입에서 제발 수연제 주소가 나오길 빌었다.

-태양 리조트입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통화를 끝낸 휴대폰을 바라보는 현태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먼저 계약 내용을 어겼으니 더 이상 매너를 지킬 이유 따위는 없었다.

현태가 출근할 때까지도 희우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완벽한 외박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출근하는 날이었다.

“기분 더럽네.”

현태가 피곤으로 뻑뻑해진 눈으로 텅 빈 방을 보며 씹듯이 말했다.

* * *

“본부장님, 좋은 아침!”

본부장실로 들어온 수정이 현태를 보며 활기차게 인사를 건넸다. 숙취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말짱한 모습이었다.

현태는 말없이 수정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본부장님? 인사를 하는데 왜 그런 반응이죠?”

눈을 부릅뜬 수정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무는 현태를 보며 수정은 내심 안도했다.

지금부터가 중요했다. 수정은 은밀한 이야기를 할 것처럼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기현태 씨,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 오늘 아침에 일어났다가 깜짝 놀랐잖아. 나 홀딱 벗고 거실에 누워 잔 거 있지. 분명히 바에서 술 마시던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다음은 전혀 모르겠어. 혹시 현태 네가 나 집에 데려다준 거야?”

“어.”

현태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덤덤하게 대답했다.

“혹시 내가 토하고 그랬니? 그래서 네 앞에서 막 옷 벗어 버렸어? 나 술 취해도 토하진 않는데…….”

수정이 양손으로 잘 손질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물었다.

“그런 거 없었어.”

“그래? 다행이다. 난 또 내가 옷에 토하고 벗어 버렸나 했지.”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던 두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수정은 ‘정말 다행이다.’를 반복하다 본부장실을 나갔다. 혹시라도 거짓말하고 있는 걸 눈치채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의심하는 것 같진 않았다.

현태의 시선은 닫힌 문에 잠시 고정돼 있다가 다시 모니터로 옮겨갔다.

* * *

수정은 오피스텔 근처 카페로 들어서며 익숙한 얼굴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현아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카페 안에 손님이 많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현태 못지않게 우월한 기럭지와 외모를 자랑하는 현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걸친 걸 합하면 억 소리가 나게 생겼으니 시선을 안 끄는 게 이상했다.

수정을 발견한 현아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속내를 모르고 본다면 진심으로 반가워한다고 착각할 정도였다.

“네가 나한테 연락을 먼저 다 하고, 웬일이야?”

친한 동생을 대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현아의 눈빛은 다른 것을 말하고 있었다. 감히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불쾌한 듯 입술 끝이 차갑게 뒤틀려 있었다.

현태와 지독하게 닮은 얼굴.

기 씨 집안 남매들의 비슷한 외모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만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촉매제 같았다.

이들의 가족이 되어야겠어.

현아가 수정을 바라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집착과 욕심으로 가득한 수정의 눈빛이 짜증 나게 마음에 들었다.

“언니 도움이 필요해요.”

수정은 내숭을 떨지 않기로 했다.

“그래?”

현아의 입술이 휘어졌다. 둥글어진 입술 선과 달리 수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야만적이리만큼 날카로웠다.

이마가 꿰뚫릴 듯한 느낌에 수정은 괜히 움찔 어깨가 떨렸다. 하지만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나중에 현아가 무리한 것을 요구할 지라도 지금은 이 손을 잡아야 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될까, 동생?”

입술만 움직여 만드는 미소는 차갑고 선뜩했지만 수정은 상관없었다.

“독고희우에 대한 자료가 필요해요. 언니가 그 여자 싫어하는 거 알아요. 그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한울 전자가 현태 손에 들어가는 것도 알고요. 한울 전자는 박준성 사장님이 일평생을 바친 회사잖아요. 그깟 아이 때문에 현태에게 넘길 생각은 아니시겠죠?”

어떻게 알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수정은 생각보다 더 영악한 사람이었다.

현아는 조용히 이어질 수정의 말을 기다렸다. 저 여우 같은 것 입에서 어떤 말이 더 나올지 기대가 됐다.

“독고희우를 현태에게서 떼어 놓을 거예요. 물론 그 여자가 현태 아이를 낳을 일은 없을 거고요.”

“두 사람, 생각보다 잘 어울리던데?

현아가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며 수정을 떠봤다. 하지만 수정이 흥분해서 바르르 떠는 일은 없었다. 살짝 김이 빠졌다.

“그런 여자에게 현태는 과분해요.”

수정의 차가운 응대에 현아의 입술이 다시 뒤틀렸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맹목적인 실수를 반복하곤 한다.

독고희우가 현태에게 어울리지 않으면 저는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걸까? 현아는 수정의 대단한 착각 앞에서 속내를 감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해.”

“한울 전자가 누구 것이 되건 상관이 없어요. 전 현태만 있으면 돼요.”

“이렇게 절박한 사람이 4년 동안 미국에서 뭘 했을까? 남자 마음 하나 못 잡고? 그렇게 현태가 간절했으면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라도 들어갔어야지.”

수정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얼마 전 자신의 행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걸친 것 별로 없는 몸으로 달려들었을 때 저를 보던 현태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지독하게 서늘한 눈빛은 구경하는 이방인 같았다.

그런 방법으로는 현태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어.

수정은 자신의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성적인 현태에게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그의 곁에서 10년을 버텼다. 마음에도 없는 친구 노릇을 하며 쿨한 척, 사심 따위 없는 척.

그 시간이 싸구려 삼류 소설처럼 취급당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런 저급한 생각은 언니와 어울리지 않아요.”

속에서 들끓는 생각을 차분한 말투 아래 감추고 수정이 빙긋 미소 지었다.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기 위해 수정은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죽 쒀서 개 주라고? 그럴 바에는 개를 죽여 버리는 게 나았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고.”

서로의 진심을 빤히 아는 사람들끼리 팽팽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나만 네 속을 안다는 착각은 오만했고, 나는 아닌 척 가늠하는 시선엔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이 그득했다.

“동생이 진심인 것 같으니까 작은 선물 하나 줄게.”

현아의 말에 수정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지만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수정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두 손까지 모으며 애절한 눈빛으로 현아를 쳐다봤다.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면 이 정도 연기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수정의 절박한 눈빛에 현아는 우월감을 느끼며 가방 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느릿느릿 꺼냈다. 수정이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수정이 갈증 가득한 시선이 봉투가 움직이는 방향과 함께 움직였다.

툭!

서류 봉투가 테이블 위에 무심하게 던져졌다.

수정의 시선이 다시 현아에게로 빠르게 옮겨갔다.

“독고희우, 남자 있어. 최근까지 미련을 못 버렸는지 집으로, 학교로 꽃바구니를 보냈더라고. 물론! 그 새끼는 독고희우가 유부녀인 것도 알고 있고. 구미가 좀 당기니?”

불필요한 내용은 전부 빼고 말했다. 하지만 거짓말도 아니지.

현아는 눈을 반짝이는 수정을 보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수정은 생각보다 엄청난 선물에 수정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에 든 것을 잘만 활용하면 충분히 현태에게서 그 여자를 떼어 놓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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