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29)화 (29/75)

29화

“조항 중 하나라도 어길 시 일백만 원을 상대에게 지불한다.”

이어지는 현태의 말에 희우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희우가 재빨리 그의 말을 끊었다.

“기현태 씨도 마음대로 나한테 어깨동무하고 허리 안고 그랬잖아요!”

“계약서 작성 전이었습니다.”

희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택시! 택시에서 제 팔 잡았잖아요!”

“그럼 그때 말하지 그랬습니까. 9조에 이런 내용도 있죠. 거부 의사는 즉시, 분명하게 밝혀 불미스러운 상황을 초래하지 않도록 한다.”

계약서의 내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는 현태를 보며 희우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사기꾼에게 호되게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 그래서 어쩌겠다고요? 백만 원 달라고요? 고작 손끝 살짝 스친 것 때문에?”

희우는 억울해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저에게 유리할 계약 내용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기현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교활하며 나쁜 인간이었다.

“계좌 이체 가능합니다.”

“돈 없어요!”

“그럴 리가요. 회장님께서 용돈도 두둑하게 주셨는데.”

물론 돈은 있었다. 하지만 이깟 일로 백만 원을 날린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타협!”

희우가 급히 꺼낸 말에 현태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좋습니다.”

“요구사항이 뭐죠? 설마 잠자리를 요구한다거나…….”

희우가 벌레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쓰면서 한 말에 현태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런 건 요구하지 않아. 아직은.”

아직은?

말끝에 이어진 단어에 희우의 귀가 쫑긋 솟았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챈 희우가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왜 갑자기 말이 짧아진 거죠?”

“이게 내 타협점이야. 싫으면 백만 원을 계좌로…….”

“노노노노노!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을! 저보다 연세도 많으신데 어르신, 말 편하게 하세요! 아휴! 난 또 뭐라고. 그러믄요!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말 놓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만 원이 굳는데 무슨 상관일까. 게다가 희우의 말대로 현태는 희우보다 네 살 더 많았다.

재빠르게 대답하며 손까지 빠르게 내젓는 희우를 보며 현태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독고희우에게 말 놓기, 오늘 목표한 바를 정확하게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현태가 세운 계획대로 차근차근 밟아가는 줄은 꿈에도 모른 희우가 손쉽게 굳은 백만 원에 기뻐하며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희우에게도 현태에게도 만족스러운 밤이었다.

* * *

밤에 마신 커피 탓인지 잠을 설치는 바람에 희우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이상하게 여긴 현태가 노크해 주지 않았다면 희우는 지각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가는데 처음 보는 승용차 한 대가 주차장 안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왔다.

누구지?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차는 멈춰 서자마자 운전석에서 기사가 바쁘게 내렸다. 그리고 뒷자리로 가 공손한 자세로 뒷문을 열었다. 저 차의 운전기사인 모양이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다시 교실로 뛰어가려던 희우는 차 안에서 내린 사람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상우 엄마였다.

희우는 모른 척하고 그대로 가려다 눈이 마주쳐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상우 엄마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중앙 현관이 있는 쪽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운전기사가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뭐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전개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희우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 지금은 지각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평소보다 늦게 교실에 가면 교실 상태가 시장 바닥이 따로 없을 테니까.

교실로 걸어가는 희우의 발걸음이 평소 보다 두 배는 빨라졌다.

북적대는 교실을 정리하고 막 1교시를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주차장에서 마주쳤던 상우 엄마는 이미 희우의 관심 밖이었다. 상우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자, 이제 교과서 펼치자.”

희우가 막 1교시 수업을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교실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뭔가 싸한 느낌에 희우는 전화기 받기가 망설여졌다. 주차장에서 마주쳤던 상우 엄마의 모습이 정신없이 울려대는 전화기 위에 홀로그램처럼 오버랩됐다.

“여보세요?”

시끄러워지는 아이들을 향해 손짓한 후 희우가 전화를 받았다.

-독고 선생, 지금 바로 교장실로 내려오세요.

교장 선생님이었다. 까랑까랑한 말투는 단단히 화가 났으니 알아서 하라는 경고였다.

“지금 수업 시간인데요?”

-옆 반에 잠시 부탁하고 내려오세요.

교장은 희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끊어 버렸다. 수화기를 든 희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웅성대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아이들의 동그란 눈을 데룩데룩 굴리며 희우의 눈치를 살폈다.

교장실로 내려오니 아니나 다를까, 상우 엄마가 도도한 자세로 교장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방의 주인인 교장은 불편해 보이는데 객인 상우 엄마는 제집처럼 편안한 자세였다.

그녀는 희우가 들어왔는데 고개를 돌리지도, 알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교장 선생님?”

희우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나쁜 예감을 억누르며 공손하게 물었다. 희우 역시 상우 엄마가 앉은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독고 선생, 여기 좀 앉아 보세요.”

턱으로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는 교장의 목소리가 딱딱했다. 희우를 보는 눈엔 못마땅함이 잔뜩 했다.

마음 같아선 수업 시간이라 빨리 올라가야 한다고 하고 싶었으니 꾹 참고 교장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희우가 앉은 곳은 상우 엄마의 맞은편이었다.

“쳇!”

희우가 앉자 곁눈질로 슬쩍 살피던 상우 엄마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콧방귀를 짧게 뀌었다. 어제 통화의 연장선 같았다.

“상우 어머니께서 찾아오신 이유를 독고 선생님도 짐작하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기분 나빴어도 학부모님께 그런 말을 하는 건 실례지요, 선생님.”

뜬금없이 교장이 한 말에 희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네? 무슨 말이요?”

희우의 반응에 상우 엄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교장을 쳐다봤다. 억울해서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정작 어이가 없고 억울한 건 바로 이쪽인데 말이다.

“아이 일 때문에 상담 전화를 했는데 독고 선생이 화를 내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전학 온 아이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는커녕 차별했다고요. 물론 독고 선생님이 어떤 분인지는 잘 알고 있어요. 두 분 사이에 오해가 있을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오해가 생기도록 방치한 건 좀 실망스럽네요. 선생님.”

점잖은 표정으로 또박또박 쏟아내는 교장의 말을 들으며 희우는 기가 막혀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교장 선생님.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습니다.”

희우는 최대한 목소리를 떨지 않으려 애쓰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줘서 말했다.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은 건 제가 아니라 상우 어머니시고, 제가 아이를 차별했다는 말은 우리 반 아이들에게 정황을 물어보시면 알 일입니다. 전 아이들을 차별한 일도, 상우 어머니와 전화 상담에서 실수한 일도 없습니다. 사과를 받아야 할 쪽은 오히려 제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자미 눈으로 잠자코 듣고 있던 상우 엄마가 어이가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뭐라고요? 지금 말 다 하셨어요? 제가 교육청으로 바로 찾아가려고 하다가, 교무 부장님과 친분도 있고 해서 학교에 곤란한 일 생기지 않도록 여기로 바로 온 거예요. 선생이 되어서 학생 차별한 것도 모자라서, 참나! 이게 지금 학부모한테 할 행동이에요?”

마치 백화점 직원에게 갑질하는 사모님처럼 상우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이며 희우를 향해 삿대질을 해 댔다.

희우는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을 더 견디고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어서 일어서려고 했지만 잔뜩 흥분해서 목청을 높이던 상우 엄마가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 일.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계세요.”

네네. 그러시든가요.

희우는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막으며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새파랗게 젊은 선생이 끝까지 꼿꼿하게 앉아 있는 꼴을 보고 기분이 나빴는지 상우 엄마는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거칠게 교장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하아…….”

상우 엄마가 밖으로 나가자마자 교장의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일단락되나 보다, 생각하며 희우가 막 일어섰을 때였다.

“독고 선생. 대충 사과하고 끝을 냅시다. 일 더 키우지 말고.”

피곤함에 찌든 교장의 목소리가 희우의 고막을 사정없이 때렸다.

일 더 키우지 말고?

희우는 당장에라도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내리누르며 침착하게 대응했다.

“지금 저더러 사과하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게 여러모로 제일 좋지 않겠어요? 괜히 자존심 내세우다가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간단하게 사과하고 넘어갑시다. 학부모들한테 소문나 봤자 학교 위신만 떨어지고 좋을 게 하나 없어요.”

교장은 성가신 파리를 내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눈매가 잔뜩 찌푸려진 걸 보니 교장도 저 못지않게 짜증이 잔뜩 난 게 분명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학부모가 찾아와 교장실을 휘저었으니 저럴 만도 하지. 하지만 희우의 잘못은 아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사과할 일 하지 않았습니다. 잘못도 없는데 사과하라고 하시는 건 일을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전 올라가 보겠습니다. 이미 수업 시간이 많이 지나서요.”

“독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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