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말하다가 보니 점점 열이 받아서 희우는 호흡이 빨라졌다. 어쩐지 비참한 기분도 들었다. 연애는 저렇게 멋진 여자랑 하고, 나한테서는 아이만 받아 내겠다?
아이를 빼앗기고 집에서 쫓겨나는 비극적인 장면이 희우의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그려졌다. 기분이 나쁜 상황일수록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는 건 속도가 빨랐다.
이게 뭐냐고. 신파 드라마도 아니고.
희우는 이제 상상 속에서 저를 이런 비참한 상황으로 밀어 넣은 모든 사람의 멱살을 짤짤 흔드는 중이었다.
“하고 싶은 말 다 했습니까?”
잔뜩 흥분해서 딱따구리처럼 쏟아낸 희우와는 달리 현태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담백했다. 괜히 저만 미친년처럼 흥분한 것 같아 짜증 났다.
삐딱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현태가 몹시 얄밉고 꼴 보기 싫어 저절로 눈꼬리가 올라갔다. 이대로 눈꼬리가 쭉 찢어져 관자놀이에 하이 파이브 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할 말은 많지만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네요.”
이따위 말을 주절주절 뱉고 있는 상황도 싫었다.
“그럼 이제 내 차례군요.”
무슨 뻔뻔한 말로 변명을 할까 생각하며 희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첫째, 난 독고희우 씨와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뭐요?”
희우가 말을 자르려고 하자 희우가 그랬던 것처럼 현태가 손바닥을 보이며 말을 막았다.
희우는 꾹 참고 입을 다물었다. 일단 들어는 보자, 싶었다. 이 와중에도 이혼할 생각이 없다는 현태의 말에 수정의 얼굴을 떠올리며 의기양양해지는 스스로가 꼴값이라 생각됐다.
“둘째. 수정이는 친굽니다.”
수정이는? 다른 여자의 이름을 이토록 다정하게 부르다니. 게다가 친구?
기현태는 어떨지 몰라도 저를 하수정이라고 소개하던 여자는 아니었다. 단순히 친구를 바라보는 것과는 눈빛의 온도가 달랐다. 여자의 직감이었다.
설마, 모르나?
희우는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건 아닌지, 저를 속이기 위해 이러는 건 아닌지 그의 얼굴을 숙제 검사하듯 자세히 살폈다. 하지만 워낙 표정 자체가 없는 사람이라 속내를 읽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럼 미국에서 같이 산 여자는? 설마 다른 여자가 또 있는 거야?
“셋째, 내가 결혼한 이상 독고희우 씨 말고 따로 만나는 여자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미국에서 함께 지낸 여자 같은 것도 없습니다.”
“…….”
헛소문이라고?
단호한 현태의 말에 희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굴만 보면 여자들을 한 트럭 달고 다닌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외모였다. 하지만 묘하게 재수 없는 성격이라 꼬였던 여자들도 놀라 달아날 것 같긴 했다.
외모와 재력으로도 커버가 안 되는 싸가지인가? 그럼 그 여자는?
“대답이 됐습니까?”
“뭐, 대충요.”
과민 반응을 보인 것 같아서 뻘쭘하긴 했지만 후회되진 않았다. 아까 그 자리에서 수정과 함께 밥을 먹었다가는 삼 박 사 일 동안 기분이 별로일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내가 질문을 하죠.”
“질문이 남았어요?”
“누구 전화를 받고 나간 겁니까?”
현태의 질문을 뒤늦게 이해한 희우가 자신의 휴대폰을 살짝 들어 올렸다.
“학부모요. 얼마 전 전학 온.”
떠올리니 다시 기분이 나빠져서 희우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학부모라니.
짧은 시간 동안 수국 바구니며, 다른 남자의 전화니 하는 것들 때문에 어지럽혀졌던 기분이 순식간에 맑은 하늘처럼 개어 버렸다.
“학부모?”
현태는 아까와 달리 기분이 무척 좋아졌지만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미묘하게 눈매가 부드러워지고, 목소리는 살짝 부드러워졌으며, 입가에 하찮은 미소가 걸렸다. 개미 눈곱만한 변화를 희우가 눈치채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아…….”
희우가 또다시 한숨을 쉬자 현태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학부모인데 왜 한숨을 쉬죠?”
현태의 입술에 하찮게 걸려 있던 미소가 단번에 사라졌다.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긴 곳은 근처 다른 레스토랑이었다. 현태가 처음 예약한 곳에 비하면 규모도 작고 음식 맛도 별로였다.
입맛이 까다로운 현태는 반도 못 먹고 손을 뗐지만 희우는 배가 고팠는지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그것도 무척 빠른 속도로.
음식을 제대로 씹기는 하는 건지 걱정이 됐다. 스테이크를 입 안에 넣고 우물우물 두 번 씹는 동안 접시 위에서는 다음 스테이크 조각이 큼직하게 썰려 나갔다.
“그런 사람도 있나?
희우에게서 들은 통화 내용에 현태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으로는 이해 불가였기 때문이다.
질문을 하면서도 현태의 시선은 빠르게 입으로 움직이는 희우의 포크에 고정되어 있었다. 체할까 봐 걱정이 됐다. 천천히 먹으라고 이야기해야 하나?
“별의별 사람이 다 있죠. 뭐.”
그 뒤로 이어진 희우의 학교 이야기를 들으며 현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먹으라고 말할 새도 없었다. 그새 희우의 접시는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희우는 동료 교사가 아닌 다른 사람, 그것도 남편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애환을 털어놓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시원한 기분도 들어서 상우 이야기뿐 아니라 다른 이야기까지 주절주절 늘어놓게 됐다.
중간에 끼어들지 않고 경청해 주는 현태의 태도도 희우의 말문을 트이게 하는 데 한몫했다. 사실은 끼어들 타이밍을 잡지 못해서 입을 다물고 있긴 했지만.
“왜 회식 자리에서 술을 따르라고 하죠? 자기는 손이 없나? 왜 남자들은 자꾸 술을 따라 달라고 해요? 진짜 어이없어. 기현태 씨도 그래요?”
갑자기 튄 불똥에 현태는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남자에게 술을 따라주는 희우의 모습을 떠올리니 기분이 별로였다.
“교무 부장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박정환이요.”
대답과 동시에 희우는 고자질쟁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힘센 오빠에게 쪼르르 달려가 ‘저 애가 꼬집었어!’ 하고 이르는 다섯 살짜리 꼬맹이 말이다.
어린아이처럼 수다를 쏟아내는 희우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혼자서 쫑알쫑알 떠들어 대다가 화를 내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민망해하기도 하는 희우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반 아이들이 심심하진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 이야기라서 그런가?
문득 그녀가 교실에서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졌다.
볼 기회가 있을까?
학교와, 그것도 초등학교와 접점이 없는 현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건 현태의 장점이기도 했다. 불쑥 나타난 저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지을 희우의 모습을 상상하니 구미가 당겼다.
엉망으로 시작된 데이트였지만 무난하게 끝낸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졌다.
주로 이야기는 희우가 했고, 현태는 듣기만 했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종알종알 떠들어대는 희우의 목소리가 어쩐지 듣기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 * *
“그럼 쉬어요.”
집에 도착한 후 방문을 열며 희우가 말했다. 그리고 막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순간.
“잠깐만.”
현태가 희우의 팔을 붙잡았다. 오늘의 목표를 아직 달성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방으로 들어가 쉬려고 했던 희우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왜요?”
“이야기 좀 하죠.”
이 남자 진짜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네. 틈만 나면 이야기하자 붙잡는 현태를 보며 희우는 기분이 묘해졌다.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나?
자신을 빤히 보는 눈빛이 어쩐지 거절하기가 힘들어 희우는 다시 문을 닫았다. 스트레스 때문에 살짝 피곤하긴 했지만 이야기를 못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희우는 현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현태는 거실로 가지 않고 부엌으로 가 커피를 내렸다.
“일을 쉬는 건 어떻습니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현태가 희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금 전 물 만난 물고기처럼 이런저런 일들을 쏟아냈더니 일을 그만두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안 모양이었다. 희우는 서둘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나 받는 스트레스 딱 그 정도예요. 관둘 정도 아니에요.”
“독고희우 씨가 벌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알 텐데요.”
“물론 현태 씨에 비해 월급이 소소하겠지만 저는 제 일이 충분히 마음에 들어요. 지난번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오랜 꿈이기도 하고요.”
고소한 커피 향이 주방을 가득 채웠다. 원래 잘 밤에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 희우였지만 한 모금 마시고 싶을 정도로 무척 향기가 좋았다.
연하게 한 모금 마셔볼까?
희우가 커피 머신 쪽을 기웃거리며 보고 있는데 현태의 말이 이어졌다.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됩니다.”
“든든하네요.”
“진심으로 들리진 않는군요.”
“예리하네요.”
즉각 튀어나온 희우의 대답에 현태의 입술이 휘어졌다가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현태는 식탁 위에 하얀 머그잔을 올려놓았다. 향긋한 커피 향이 마주 앉은 희우에게 오롯이 전해졌다. 그윽한 향에 희우는 저도 모르게 머그잔으로 향해 손을 뻗었다.
“앗!”
머그잔을 움켜쥔 커다란 손에 작은 손이 툭 부딪혔다.
찌릿!
살짝 닿았던 손끝이 따끔했다.
하얀 손에 머물렀던 현태의 시선이 그녀의 작은 얼굴로 빠르게 움직였다.
“미안해요.”
희우가 얼른 사과하며 컵에서 손을 뗐다.
그녀의 사과에도 현태의 시선은 희우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주변의 모든 걸 집어삼킬 것처럼 새카만 눈동자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영혼까지 빨아들일 것 같아 희우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웅얼댔다.
“커피 향이 참 좋네요.”
살짝 전기가 통했나? 아닌가?
따끈해지는 뺨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희우가 혼잣말을 했을 때였다.
“계약서 7항,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스킨십은 금한다.’ 조항을 어겼습니다.”
현태의 싸늘한 목소리에 돌아갔던 희우의 고개가 빠르게 제 자리로 돌아왔다.
살짝 수줍어했던 자신의 귀싸대기를 날리고 싶을 만큼 어이없는 말에 희우의 눈동자가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