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굴러 들어온 남편 (26)화 (26/75)

26화

희우가 전화 받으러 간 사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수정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오는 현태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현태는 수정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어디에서도 희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도착했다 들었는데.

현태의 표정을 빤히 살던 수정이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희우 씨, 전화하러 갔어. 곧 들어올 거야.”

수정은 절친이라도 된 듯 친근하게 희우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여기 왜 있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현태의 목소리는 무척 사무적이었다.

빈말이라도 반가워할 줄 알았던 수정은 한결같은 현태의 반응에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점 때문에 좋아하긴 했지만 가끔은 서운했다. 특히 오늘처럼 내 편을 들어줬으면 하는 날.

하지만 사소한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수정은 가볍게 눈을 흘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녁 먹으러 왔지. 왜 왔겠니?”

“혼자?”

“나 혼밥 잘해. 네가 결혼하고 나니까 혼자 밥을 먹잖아. 반성해.”

수정이 투덜대는 아이처럼 징징댔다. 현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벽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이 막막한 기분에 수정은 현태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너 내 말 듣고 있어?”

“말해.”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저에게 관심을 주고 있진 않았다.

수정은 속으로 강샘이 일었지만 늘 그랬듯 아무렇지 않게 쿨한 목소리로 답했다.

“쳇! 결혼했다고 이제 나는 안중에도 없네. 섭섭하다.”

수정은 팔짱을 앞으로 낀 채 곁눈질로 현태의 표정을 살폈다.

현태가 저에게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럴 때 참 유용했다. 그의 감정이 죄책감이나 책임감에서부터 시작됐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수정의 목표는 오로지 기현태 한 사람뿐이었다.

일부러 눈썹까지 축 늘어뜨리고 불쌍한 표정을 지었지만 현태는 쳐다보지 않았다. 측은한 연기를 하던 수정은 이런 행동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원래 얼굴로 돌아왔다.

“이렇게 만난 김에 오늘 저녁같이…….”

먹자고 말하려고 했다. 희우를 발견한 현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기 전까지는.

희우가 보이자마자 저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망설임 없이 가 버리는 현태의 모습에 수정은 머리를 크게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현태가 저러는 건 처음이었다.

나를 여기 앉혀 놓고 저 여자한테 간 거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저런 여자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보는 수정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기분이 나빠지던 차에 어이없는 항의 전화까지 받고 나니 희우는 입맛이 다 달아났다.

-어떻게 선생이 편애를 할 수 있어요? 전학 와서 학교 적응하기도 힘든 아이에게 꼭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하시겠어요?

희우는 아무리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거듭 말해도 귀가 꽉 막힌 사람처럼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는 상우 엄마 때문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상우 엄마는 결국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 다 한 후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항의 차 내일 학교를 방문해 교장실을 직접 찾아가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잘못한 게 없었기에 교장실을 가든, 교육청을 찾아가든 상관이 없었지만 그런 일방적인 통화를 했다는 것 자체가 기분이 나빴다.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아이 말만 듣고 항의하는 학부모가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런 전화를 받고 나면 지금까지의 교직 생활이 전부 폄하되는 것 같아 상처가 됐다.

치미는 화를 가라앉히며 겨우 자리로 돌아오니 나갈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현태가 도착해 있었다.

희우는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두 사람은 무척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선남선녀였다.

저도 어디 가서 꿀린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저 여자는 차원이 달랐다. 희우는 새삼 오늘 자신이 뭘 입고 나왔는지 내려다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옷차림.

오늘 체육 수업이 없던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희우는 그나마 구겨지지 않은 옷에 대충 만족하며 다시 테이블 쪽으로 걸었다.

얼마 걷지 않았을 때 현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희우는 본능적으로 수정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녀는 현태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듯한 표정을 하고 앉은 그녀는 누가 봐도 가련한 여인처럼 보였다.

이건 뭐지.

희우는 다가오는 현태와 앉아 있는 수정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늦을 것 같다더니.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금방 해결했습니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뇨. 저도 좀 전에 왔어요.”

대답을 한 희우의 시선이 그대로 앉아 있는 수정에게로 향했다. 대충 자리를 비켜줄 만도 한데 그녀는 원래 자기 자리인 것처럼 꿋꿋하게 앉아서 두 사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살벌하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인가.

희우는 찜찜한 마음을 감추고 여유로운 얼굴로 자리에 돌아갔다. 현태가 속도를 맞춰 함께 걸었다.

묘한 승리감에 희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동시에 수정의 입매는 딱딱하게 굳었다.

저 여자는 기현태를 좋아하는 게 확실했다. 희우는 현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희우는 수정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제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자, 기현태 당신은 어디에 앉을 거지?

희우는 현태가 수정의 옆에 앉으면 어떨까 걱정했다. 잠시 기분이 나쁠지는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저에게 그게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마 자존심 때문이겠지. 저 여자에게 괜히 지고 싶지 않은 알량한 자존심.

희우는 약간은 긴장하며 현태를 바라보았다.

현태가 다가오자 수정은 제 옆에 두었던 가방을 다른 쪽으로 치웠다. 수정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희우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엔 충분한 행동이었다.

희우는 말없이 수정과 현태를 응시했다. 설마 그래도 내가 와이프인데 옆에 앉겠지.

하지만 현태는 수정이 가방을 치운 빈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떨떠름하던 수정의 표정이 단번에 환하게 바뀌었다.

희우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기분이 더러웠다.

수정의 옆자리에 앉는 현태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동안 두 사람의 사이가 얼마나 친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회사에서 보고 여기서도 보니까 더 반갑지?”

수정이 옆에 앉은 현태를 바라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희우는 어쩐지 두 사람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괜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현태는 별말이 없었고 희우는 점점 짜증이 났다.

상우 어머니에게서는 추가로 문자가 속속 도착하고 있었다. 전화 통화를 한 거로는 분이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내일이라도 상우에게 선생님이 사과를 해 줬으면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실망할 것 같아요. 선생님 첫인상이 좋아서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실망입니다.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희우는 메시지 창을 열어 답장을 적을까 하다 그냥 휴대폰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답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애인도 없어서 나 혼자 밥 먹어야 해. 그래서 말인데. 나도 여기 끼워주면 안 될까? 희우 씨, 나도 같이 밥 먹으면 안 돼요?”

수정이 애교스럽게 물었다.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표정이라 거절하는 게 더 힘들 것 같았다. 그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비례해서 희우는 없던 입맛이 더 떨어졌다.

“식사는 두 분이 하세요. 전 입맛이 없어서.”

더 이상 이곳에 앉아 있고 싶지도 않아서 희우는 미련 없이 일어섰다.

“독고희우 씨.”

현태가 다급하게 불렀지만 희우는 뒤돌아서지 않고 그대로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화가 난 건 상우 어머니의 문자 때문이었는데 왜 자꾸 두 사람의 모습이 어른거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현태가 희우의 뒤를 따라나서려고 하던 순간 수정이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들었다.

“그냥 둬.”

“뭐?”

수정이 붙잡으며 한 말에 현태가 뒤돌아보며 눈썹을 사납게 찡그렸다. 수정은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기현태가 나한테 저런 표정을 짓다니.

당장에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수정은 대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일이 생긴 것 같아서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오늘 희우와 약속이 있던 건 저였으므로 현태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느릿하게 입을 뗐다.

“계속 전화가 오는 것 같더라고. 아까도 그 사람 전화 받으러 나갔다가 온 거야.”

“그게 누군데.”

현태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얼마 전 희우가 들고 들어왔던 커다란 수국 바구니가 떠올랐다.

설마 그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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