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누구?”
“까만 야구 모자 쓰신 분이요.”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독고 샘 찾아온 분 아니셨어요? 거기 한참 서 계시는 것 같던데.”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현태는 야구 모자 같은 걸 쓸 사람이 절대 아니었고, 말없이 교실 문 앞에 서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누구지?”
설마…… 하는 불길한 예감이 뒷목을 스쳤다.
“아니겠지.”
희우는 소름이 돋은 팔뚝을 매만지며 다시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했다. 어제 잠을 설쳤더니 쓸데없는 걱정만 느는 모양이다.
지잉~
때맞춰 현태에게서 약속 장소가 적힌 문자가 도착했다.
* * *
약속 장소는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희우가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가 다가와 정중한 태도로 물었다.
“예약하셨습니까?”
“네. 기현태 씨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어요.”
매니저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이내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희우는 매니저의 뒤를 따라가며 괜히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매니저는 희우를 창가 옆 테이블로 안내했다. 낮은 가벽 때문에 다른 곳과 살짝 분리된 공간이라 더 아늑했다.
지잉-
막 자리에 앉았을 때였다. 희우의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현태에게서 온 문자였다.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희우는 배가 별로 고프지 않았으므로 금방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일행이 늦어서 주문은 나중에 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는 테이블 옆에서 주문을 기다리다 희우의 말을 듣고 다시 멀어졌다.
기다리는 동안 책이나 읽을까 해서 가방을 뒤적이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혹시 독고희우 씨?”
테이블 옆에 선 사람은 같은 여자가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누구세요?”
“맞구나! 독고희우 씨!”
“네. 그런데요?”
희우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여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활짝 웃었다.
“내 정신 좀 봐. 안녕하세요, 하수정이라고 해요. 현태 친구예요. 결혼식장에서 뵀었는데 기억하시려나요?”
“아…… 그러세요?”
몇 명 참석하지도 않은 결혼식장에 온 남편의 여자 친구라. 그것도 4년 전에 짧게 본 건데기억한다고? 먼저 알은 척을 하며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기분 나빠지긴 처음이었다.
문득 어제 먹은 마카롱이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마카롱은 맛있게 드셨어요? 엄청 고민하면서 골랐거든요.”
희우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화사한 미소를 보내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것 봐라?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남편의 친구입네, 소개하는 여자를 보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건 기현태 때문이 아니야. 내 자존심 문제라고.
표정을 보니 여자는 자신의 반응을 내심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호기심을 담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제법 맹랑했다.
나를 떠본다 이거지?
“아……. 그쪽이 주신 거구나.”
일부러 느릿하게 말을 했더니 당황하는 줄 알았는지 그녀의 입꼬리가 상큼하게 위로 올라갔다. 수정의 예쁜 얼굴에 살짝 기가 죽었지만 이것 또한 상관없었다.
“어머, 현태가 말 안 했어요? 꼭 전해 달라고 했는데. 정말 심사숙고해서 골랐거든요. 사실 현태가 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마카롱 말고 다른 거 사려고 하려다가 그냥 샀어요. 여자들은 마카롱을 좋아하니까요.”
“고마워요. 잘 먹었어요.”
담백한 희우의 반응에 수정의 눈매가 잠시 굳었다가 풀어졌다. 의외로 심심한 반응이었다. 수정은 희우의 속마음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런데 혼자 오신 거예요? 현태는요?”
수정이 비어 있는 희우의 옆자리를 보며 물었다.
“곧 오겠죠. 여기 예약한 사람이 기현태 씨니까.”
기현태 씨?
남편을 지칭하는 단어치고는 제법 딱딱했다. 수정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에 조금 전보다 표정이 편안해졌다.
“현태 오기 전까지 제가 말동무해 드릴까요? 집안끼리 정한 결혼이라 현태에 대해 잘 모르시죠?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수정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는 중이었다.
“앉는 건 상관없지만 자리에 없는 사람 말하는 건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희우가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운 채 건조하고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하며 가방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희우의 시선은 곧 휴대폰 화면에 고정됐다.
확연한 무시.
수정은 저를 소, 닭 보듯 하는 희우의 태도에 기분이 상했다. 결혼식장에선 어쩔 줄 몰라 눈물만 그렁그렁하더니 지금은 꿀릴 것 없다는 태도였다.
이러면 곤란한데.
당황한 건 오히려 수정이었다.
“집에 한 번 초대 해 주세요. 현태의 신혼집이라니 상상이 안 돼요.”
수정은 찜찜한 마음을 미소 뒤에 감춘 채 핸드백 안에서 명함 케이스를 꺼냈다. 조명을 받은 케이스는 보석처럼 화려했다.
딸깍.
고급스러운 케이스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든 수정이 테이블 위에 작고 네모난 종이를 올렸다. 명함만큼이나 화려한 네일 끝에 붙은 큐빅이 반짝였다.
희우는 반짝거리는 것들을 멍하게 바라보다 뒤늦게 명함을 집어 들었다.
아씨, 나는 명함 없는데…….
교사 특성상 쓸 곳이 없어서 명함을 만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밀 것이 없는 게 좀 아쉬웠다.
무심하게 명함을 읽던 희우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짧게 꿈틀했다.
한울 전자?
기현태와 같은 회사였다.
설마 부서도 같은가?
현태가 근무하는 부서 같은 건 몰랐다. 그의 직책이 뭔지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희우는 살짝 난감해졌다.
명색이 부부인데 남편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곧 헤어질 거니까 몰라도 되나?
“현태랑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요. 능력 있는 상관 만나서 엄청 고생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어찌나 들들 볶는지 회사에서도 계속 현태한테 붙들려 있다니까요.”
여자는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늘어놨다.
“그렇군요.”
하지만 희우는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아무리 도발을 해도 넘어오지 않는 희우의 모습에 초조해지는 건 수정이었다.
동요도 없는 사람에게 그 자리는 원래 내 것이다, 나는 기현태 옆에 10년을 있었던 사람이다, 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기현태의 와이프는 당황하지도, 그렇다고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도 않았다. 그저 냉랭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좁히기 힘든 거리감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중이었다.
잠깐. 현태한테도 이러는 건가?
그렇다면 자존심 강한 현태는 곧 이 여자에게서 떨어져 나갈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여자의 냉랭한 태도가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희우는 심지어 휴대폰 화면에서 시선도 떼지 않고 있었다. 수정은 희우가 일부러 눈을 피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희우는 상우 어머니에게서 온 카톡을 읽느라 수정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선생님, 상우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상우가 학교에서 친구와 싸웠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네, 그날 바로 전화를 드렸었는데 안 받으셔서 문자를 남겨 두었습니다.
-문자요?
-네, 확인 못 하셨나요?
-못 봤습니다. 그런 건 직접 전화로 해 주셔야지요. 모르고 넘어갈 뻔했잖아요.
이 엄마 뭐지?
열심히 답장을 적어 내려가던 희우는 싸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수정은 희우가 자신이 한 말에 기분 나빠한다 생각하고 신이 나서 계속 떠들어댔다.
“현태가 대학 때부터 주변에 여자들이 많았어요. 현태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요. 한 번은…….”
수정은 희우가 흥미를 보인다고 생각하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벽을 보고 이야기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상우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는데 선생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어떻게 애를 교실에서 쫓아낼 수 있죠? 잘못은 그 친구가 했는데 왜 피해는 상우가 입어야 하나요?
이건 또 무슨 참신한 뻘소리지?
희우의 눈썹이 좀 더 구겨졌다.
수정의 목소리 톤이 아까보다 조금 더 높아졌다. 관심 없는 척해도 현태에게 무심하게 굴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맞는 모양이었다.
새삼 다른 여자가 현태 옆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더러워졌다.
원래 그 자리는 제 것이어야 했다. 오로지 그걸 위해 긴 시간 동안 감정을 억누르며 가장 친한 친구인 척, 쿨한 척 현태의 곁에 머물렀다.
한편, 희우는 지금 이 상황이 카톡으로 해결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지금 통화되세요? 카톡으로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요.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요. 실례합니다.”
희우는 빠르게 말한 후 수정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수정이 멀어지는 희우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말이 듣기 싫다 이거야?
역시, 살살 신경을 건드리면 반응이 오리라 생각했다.
현태가 저를 쳐낼 일은 없으니 남보다 못한 아내를 떼어 놓기만 된다. 여유를 되찾은 수정의 얼굴에 조금 전보다 편안한 미소가 사르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