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254)

* * *

“시, 시종관! 더 번져갑니다! 꺼지지가 않습니다!”

“이런 등신들. 영력은 뒀다 뭐할 거냐. 힘을 써! 더 쓰라고!”

등극식 준비를 관리하던 시종관이 흙빛이 된 안색을 한 채 소리쳤다.

주변을 닦달하고는 있었으나 시종관 역시도 그러한 시도들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불길이 전각 하나를 새빨갛게 태우기 시작할 때 이미 그 자신이 이 불을 사그라뜨리기 위해 안 해 본 짓이 없는 것이다.

콰앙!

그때, 우레 같은 폭발 소리와 함께 다른 별채에서 거대한 화마가 솟아올랐다.

“!!”

“시, 시종관!”

정신없이 물을 뿌리고 영력으로 불길을 잠재우려 애쓰던 시종들이 다른 관에서 터져 나온 붉은 불길을 바라보며 일제히 발을 동동 굴렀다.

“어, 어찌합니까. 저, 저기도 예식에 쓰일 물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는데-!”

시종관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그는 차마 놀라지도 못한 채 황망하게 그 붉은빛을 바라봤다.

굳어진 그의 턱이 덜덜 떨렸다.

‘……신영께서 오시면 나는 죽은 목숨이다.’

등극식이 당장 오늘 자정이었다.

‘한데 식에 쓰일 의복과 물품들이 전부 타고 있으니.’

그때였다.

저벅저벅. 빠른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기다란 일행들이 뛰듯이 나타났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시, 신영!”

주경현의 모습을 발견한 시종관이 무언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달려갔다.

신영의 발치에 머리를 박고 흙바닥에 연신 이마를 찧으며 소리쳤다.

“신영! 죽여 주십시오. 죽여 주십시오!”

“무엇 하느냐! 흩어져서 당장 저 불을 꺼!!!”

신영의 노성에 그의 뒤를 따르던 무사들이 일제히 흩어져 불길이 거센 전각들에 영력을 쏟아부었다.

하나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불을 꺼 보려 한들, 소용이 없었다.

불길은 제가 삼키고 있는 것을 전부 잿더미로 만들지 않고는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쓸모없는 것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신영에게도 별다른 방법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이전의 몸이었다면 이깟 불 따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영력이 충분했을 것이다.

하나 지금 그는 탈피도 하지 못한 아들의 몸을 하고 있었다.

“부인들을 불러와, 당장!!”

신영의 고성에 시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팔부인들을 부르러 허겁지겁 뛰어 흩어졌다.

콰앙!

쾅!

그 사이 두 개의 전각이 또다시 터져 나갔다.

갑작스레 이런 일이 생길 이유가 뭐가 있을까.

‘백기하!! 주세화!!!’

그 연놈들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있을까.

‘별채의 결계는 내 눈을 속이려는 미끼였구나. 이 연놈들은 밖에 나와 있는 거였어!’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신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살의 가득한 시선이 백가의 결계가 있는 별채로 향했다.

“너!”

신영이 시종관을 발로 차며 소리를 질렀다.

흙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덜덜 떨고 있던 시종관이 “예, 신영!”하고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팔부인들이 오시면 그분들의 힘을 빌려 불을 꺼라. 알겠느냐! 다른 전각에 불길이 옮겨붙지 않도록 무사들을 보내고!”

“예! 예! 신영!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보관!”

이보관이 신영의 호통에 즉시 앞으로 나섰다.

“너는 등극식의 증인을 서기 위해 온 이들을 백기하의 별채로 데려와라! 알겠느냐! 많지 않아도 되니 최대한 서둘러서 데려와! 조금이라도 늦게 왔다가는 네 가죽을 벗겨 버릴 것이다!”

“네! 신영!”

얼마나 서둘렀는지 발이 다 꼬일 듯한 기세로 이보관이 전력을 다해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 모습을 흰 눈으로 보던 신영이 이번엔 제 무사대장을 향해 명령했다.

“너는 무사들을 끌고 날 따라와라! 별채로 간다!”

“예! 신영!”

다른 전각이 이제야 불길을 올린 것을 보면 아직 그 연놈들은 결계 밖에 있다는 소리다.

이건 그야말로 시간 싸움이었다.

‘증인들의 앞에서 매캐한 탄내로 가득한 그 연놈들의 모습을 보일 수만 있다면 명분을 만들 수 있다!’

콰앙!

다행히도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전각이 터져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사리문 신영이 백기하의 별채를 향해 달려갔다.

빈틈없이 별채를 포위할 수 있도록 마주치는 족족 시종이고 무사고 할 것 없이 모두 합류시켰다.

‘내가 이대로 당할 줄 아느냐!’

형형히 빛나는 신영의 눈이 짙은 살기를 담아 번뜩였다.

* * *

불길한 소리를 반복하던 결계가 결국 위에서부터 무너져버렸다.

그 모습을 본 최장명이 이를 악물었다. 주인의 부재를 감추는 것 외에 신수의 영단을 지키는 일 또한 무엇보다 중요했다.

스르릉!

영단을 품 안에 넣은 그가 검을 빼 드는 짧은 사이, 결계는 어느새 최장명이 있는 곳까지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외부에서 어떤 그림자들이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

제가 쥔 검날 위로 영력을 폭발시킨 최장명이 그것을 전력으로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힘은 갑자기 나타난 오색의 벽에 그대로 흡수되듯 사라져 버렸다.

“워워.”

그 사이 또 다른 누군가는 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갔다.

반쯤 녹아 사라졌던 결계가 다시 완벽히 하얀 눈 벽처럼 굳건히 세워졌다.

“누군지 보고 휘둘러야지.”

“오셨군요!”

제 앞에 나타난 이들을 확인한 최장명이 떨리는 목소리를 꺼내놓았다.

“별일 없으셨던 겁니까.”

“응. 시간 차를 두고 불길이 일게끔 했으니 아직 우리가 밖에 있는 줄 알 거야. 하지만 옷을 갈아입어야 해. 아무거나 빨리!”

그들의 옷에는 매캐한 불길의 냄새가 가득했다.

영력으로 고정한 불길은 냄새조차 지독해 그들의 힘으로도 완전히 지우지 못했다.

그것을 눈치챈 최장명이 황급히 물과 의복을 가지고 왔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 위로 물을 뿌려 냄새를 씻어 낸 후 영력을 사용해 젖은 머리카락을 말렸다.

빠르게 벗은 옷가지를 막 영력으로 태워 버렸을 때였다.

둥!

무언가가 바깥에서 다시금 결계를 공격했다.

* * *

달리듯 별채에 도착한 신영은 여전히 굳건하게 서 있는 하얀 결계를 보며 턱 근육을 굳혔다.

‘다행히 아직 돌아오지 않았구나.’

하지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혹여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세워 두고 갔던 무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

‘설마……!’

무사들은 그의 명령이 있지 않은 한 자리를 옮길 이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갑작스러운 무사들의 부재가 뜻하는 게 뭘까.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연놈들이 무사들을 해치우고 결계 안으로 이미 다시 들어갔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신영이 터뜨릴 것처럼 세차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다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어차피 정당성은 내게 있어!’

신영이 제 뒤에 시립한 무사들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불러모은 이들이 도착하면 폭발한 전각들 근처에서 분명 백기하와 주세화를 본 것 같다고, 불길을 키우던 영력은 분명 백가의 바람의 영력이었다고 그리 주장해야 한다. 알겠느냐!”

“예? 예, 신영.”

“그럼 서둘러 와서 아까처럼 결계를 공격해라!”

결계가 깨어지는 충격으로 만신창이라는 백기하의 몸에 타격을 입히든.

결계가 깨어질 때 만들어지는 어마어마한 충격파를 이유로 들어 제식을 망치려 했다 누명을 씌우든.

아니면 그 연놈들이 깨지기 전에 결계를 그대로 걷어 낸다 해도 영기들을 발동시켜 영력을 빨아먹으면 되니.

그렇게 생각하면 끝까지 결계를 부수지도 풀지도 못 한다 해도 제겐 오히려 아까보다 더 나은 상황이 만들어진 셈이었다.

‘전각들이 저리 난장이 되었으니 이 결계도 다른 이들 눈에 더욱 수상해 보일 테고.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억류하면 명분도 세우면서 이 연놈들을 조금이라도 더 잡아 둘 수 있어!’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온갖 주가의 보물들을 아낌없이 한번에 털어넣을 각오도 마친 상태였다.

주인이 자신한테 그대로 사용할 것을 염려함인지 신수의 몸을 망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일단 백기하를 밀실에 잡아놓기만 하면 영기를 사용해 제압할 수 있을테고. 드시라고 바치고나면 그놈을 죽이시는 과정을 통해 나도 뭔가를 알아낼 수 있겠지. 세화년을 내가 먹고 난 이후여도 백기하를 제공한다면 크게 화를 내진 않으실 거야.’

그리고 지금의 백기하처럼 신수의 몸을 망치는 방법만 알아낸다면 더 이상 저런 교룡따위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계산을 마친 그의 입꼬리가 위로 솟았다.

그때였다.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갑작스레 나타났다.

허겁지겁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이보관을 따라 주가의 여러 원로들과 성이 없는 자들의 수장들까지 몽땅 달려오고 있었다.

“소, 소가주님!”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얼굴이 붉어진 이들이 호흡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신영을 향해 물었다.

“소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어인 일로 이리 다급히 저희를 다 부르셨습니까.”

“원로 여러분. 이걸 보십시오!”

그들의 물음에 신영이 제 분기를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한쪽 팔을 펼쳤다.

황급히 달려왔던 이들의 시선이 그 손짓을 따라 결계를 눈에 담았다.

“……이건 백가의 결계가 아닙니까? 왜 백가의 결계가 신영의 저택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까?”

“원로 여러분. 조금 전 폭발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예? 그 큰 소리가 폭발 소리였습니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누가 이곳을 공격해 오기라도 한 것입니까?”

그들의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영이 그리 말하며 제 뒤에 시립한 무사들을 향해 턱짓했다.

결계를 깨려 공격을 거듭하던 무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믿어지시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분명 보았습니다. 백, 백가주께서 타오르는 전각에서 빠져나와 이 결계 안쪽으로 몸을 숨기는 것을요.”

“!”

“믿어지지 않게도 명윤 원로의 여식인 주세화 역시 그와 함께였습니다.”

“그게 무슨. 지금 그 둘이 전각에 불을 지른 것 같다. 그 말을 하는 것이냐?”

그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신영이 곧장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께서도 제가 급히 신영의 위를 물려받게 되어 경황이라고는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신영이 침통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하나 육문의 이름 아래 뭉친 자들은 제가 친히 초대장을 전달했음에도 누구 하나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저 백기하조차 당일인 오늘에서야 당도하였는데.”

있는 힘껏 주먹을 움켜쥔 신영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것조차 등극식에 쓸 물품들을 모조리 태워 없애 제식을 망칠 요량이었다니. 아무리 주가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고는 하나 주가는 주가입니다. 어찌 이런 치욕을 참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신영의 목소리에 원로 하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백기하가 확실하였습니까?”

“여기 있는 모두가 보았습니다. 게다가 백기하 같은 신수가 남의 영지 한복판에서 이리 결계를 세워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입니까. 우리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 그 자신의 안위가 잘못될까 봐 두려워서?”

둘 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신영이 입술을 깨물며 분통이 터진다는 듯 말했다.

“별채로 들어가자마자 이런 결계를 세우길래 대체 무엇 때문인가 했더니 자신이 결계 안에 있던 것처럼 눈속임을 하고 신영의 저택을 파괴하기 위해 그리했던 겁니다!”

그의 호소에 주가 원로들의 시선도 가라앉았다.

“남의 저택 한복판에 이리 결계를 세운 것도 그렇고, 제식에 쓸 물품들을 망친 이가 정말 백기하라면 이는 절대로 좌시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등극식에서 그딴 짓을 벌인다는 건 주가와 아예 전면전을 하겠다는 거지요!”

“그 명윤 원로의 여식도 백가로 간다 했다가 가지 않고 갑자기 명윤 원로가 제 역할을 대신하게 하는 등, 그리 이상하게 굴더니 혹 미리 백가와 결탁한 것은 아니겠습니까!”

원로들의 반응이 제가 의도한 대로 흐르자 신영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너희가 이런 상황에서 무슨 핑계를 대며 도망칠 수 있을까. 주세화. 백기하. 너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이번엔 결코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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