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2화 (172/254)

* * *

‘너무 늦으시는 것 같은데.’

방 안에 홀로 남은 최장명의 움직임은 부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방을 비운 백기하와 세화가 돌아오겠다고 말한 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 오셨을까. 결계가 올라간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 바깥의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결계 바깥과 안을 완전히 분리해 놓았기에 상황을 조금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주가의 모든 이가 이 결계를 눈치챘을 텐데 혹 신영이 군사를 끌고 와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붙잡히신 건…….’

최장명은 그간 주명윤에게 탈피를 거치며 얻게 된 방대한 영력을 다루는 법을 집중적으로 훈련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주가의 무사들을 홀로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해도 혹시 붙잡히신 것이라면, 영력을 폭발시켜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분들을 구해 내야 한다.’

비장한 결심을 하며 최장명이 긴장이 역력한 손을 맞잡았을 때였다.

둥!

“!!”

뭔가가 그가 유지하고 있는 결계에 와 부딪쳤다.

놀라 고개를 들자, 탁자 위의 화병과 도자기들이 달그락거리며 진동하고 있었다. 건물이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한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둥!

“!!”

둥!

혹여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그래서 결계가 당장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잘게 떨리는 신수의 영단을 최장명이 힘주어 움켜쥐었다.

‘큰일이다.’

바깥에 무언가가 와 있었다.

결계가 흔들릴수록 긴장으로 온몸의 털이 비쭉 서고,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저건 절대로 제 주인이 아니다.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못하셨는데 밖에 누군가가 와 있다니.

그렇다면 주인께선 어떻게 이곳에 돌아오시지?

둥! 둥!

공격이 계속되고 있는 사이 그가 쥐고 있는 영단이 점차 빛을 잃었다.

영단의 색이 흐려질 때마다 결계 역시 색이 흐려졌다 원래대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쩌적.

“!”

어느 순간부턴 누가 들어도 결계가 깨지고 있다 알아차릴 수 있는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 *

“계속해라!”

“예!”

명을 받은 신영의 호위 무사가 다시 한번 영력을 끌어올렸다.

거대한 불꽃의 영력이 새하얀 바람 결계에 달려들 듯 부딪쳤다.

콰앙!

힘의 폭풍이 오래된 전각을 뒤흔들었다.

영력이 부족한 시종들의 다리가 풀렸으나 혹 그런 모습이 신영의 노여움을 사게 될까 봐 그들은 피가 터질 만큼 이를 악물고 파동을 견뎠다.

“분명히 눈치를 챘을 텐데, 이 정도론 부족하다 이건가?”

신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내도록 두르고 있던 가짜 여유조차 지워질 정도로 초조함이 가득했다.

사실 조금 전, 그는 백기하를 상대할 때 필요할지 모르는 영력을 조금 얻기 위해 제 주인인 교룡을 찾아갔었다.

신수의 영력은 비슷한 등급의 영력으로밖에 제어할 수가 없으니까.

한데 주인은 평소처럼 영단을 나눠 주기는커녕 두 안광을 살기로 번뜩이며 그를 맞아들였다.

‘꽤나 재미있는 일을 벌이고 있는 것 같더구나.’

그리고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를 잡아챘다.

‘으, 크윽!’

그의 어깨를 파고드는 발톱의 예리함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고 그를 향해 날아드는 영력엔 살이 베일 듯한 살기가 넘쳐흘렀다.

한 번도 그런 적 없던 주인의 행동에 신영이 고통보다 공포로 희게 질렸다.

‘아무리 너라 해도 그년을 먹는 것은 용서 못 해. 그 년은 내 것이야. 알겠느냐?! 내 것이야!!!’

두 눈을 형형히 빛내며 경고하는 주인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신영은 가까스로 그곳을 나와 제 어깨를 치료하고 이곳으로 온 참이었다.

‘그분께서 보시기에도 그년이 맛깔스러운 먹이인 건가. 하긴 누가 봐도 그렇겠지.’

주인은 아주 오랫동안 힘을 비축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원하는 경지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아직 더 필요해보였다.

‘지금이야 인계에서 벌인 일의 실패로 잠시 힘을 가다듬느라 손을 못 쓰는 거지만 곧 언제든 다시 그년을 끌고 와 삼키려 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년을 노릴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생각만으로도 피가 마르는 가정이 아닐 수 없었다.

절대 아니 된다. 영수로의 탈피를 위해서도. 더 나아가 신수로의 탈피를 위해서도 그년은 반드시 제가 먹어야 했다.

‘하나, 주인의 도움 없이 그년에게 주박을 걸고 육문의 반발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분이 있어야 해. 그래야 그놈들이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어.’

그것을 생각하면 이 결계는 아주 좋은 핑계였다.

등극식을 결코 망치지 않으면서 이 연놈들이 제 등극식을 망치려 했다 누명을 씌울 수 있는.

그리하여 바닥까지 추락한 신영의 위상으로도 이 연놈들을 합당한 명분 아래 벌할 수 있는.

하지만 한 가지 예상치 못한 건 결계가 생각보다 오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남의 영역에서 함부로 결계를 친 것을 탓하려 했건만, 혹 등극식까지 버텨 채 탓할 시간도 없이 예식이 시작되어 버리면.’

주인의 말로는 백가주의 몸이 정상이 아니니 언제까지고 저 결계를 유지할 수 없을 거라 하였었으나, 그는 신수가 아닌가.

‘전장에서 그리 영력을 쓰고도 아무도 그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것을 보면 정말 버틸지도 모르지.’

적월이 뜨는 길일, 달이 하늘 꼭대기에 서는 길시는 신영의 등극식에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조건이었다.

하여 이 결계가 정말로 식까지 버티면 손쓸 시간이 사라진다.

“계속해서 공격할까요.”

미세한 반응조차 돌아오지 않는 결계를 보며 무사가 물었다.

“비켜라!”

초조해진 신영이 제가 지금 탈피를 못했다는 사실마저 잊으며 앞으로 나섰다.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영력을 끌어올린 후 결계를 직접 두드렸다.

한데 그때였다.

시종 하나가 당황을 감추지 못한 채 달려와 신영의 앞에 고두했다.

“신영. 큰일 났습니다. 여러 곳의 전각에 불이 났습니다.”

“뭐? 불이 났으면 끄면 될 것이 아니냐. 그게 뭐라고 이리 부산하게 달려와.”

“그것이……. 그것이 꺼지지가 않습니다.”

“뭐야?”

“옮겨붙기만 할 뿐 무슨 짓을 해도 꺼지지가 않습니다!”

* * *

일보관이 갑작스레 온 시종들을 끌고 와 정원에 영기들을 던져 넣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

“…….”

별채로 돌아온 세화와 백기하는 지붕 위에서 기척을 죽인 채 그 꼴을 보고 있었다.

저리 대놓고 손을 쓰는 모습이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다 싶긴 했으나, 뭘 하고 있는지를 확인했으니 대처가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그래서 어서 저 일보관이 가져온 영기들을 다 뿌리고 사라지길 기다리고 있었건만 신영까지 그곳에 나타나 버릴 줄이야.

그런 데다가 신영이 갑자기 결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때부터 두 백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금 저 결계를 유지하는 것은 백기하 본인이 아니라 최장명일 뿐인데.

“흉, 큐. 큥큥.”

-위험해요. 최장명은 저 공격을 오래 버티지 못할 거예요.

“크르르르르.”

-결계가 강제로 파괴되면 충격파가 어마어마할 거야. 별채가 날아가면 분명 신영이 그걸 육문을 공격할 명분으로 삼을 테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들의 눈을 다른 데로 돌려 더 이상 결계를 공격할 수 없도록 해야 해요.’

-하지만 어떻게? 신영의 저택은 주가의 영지 내에서도 특별한 영력들로 보호받고 있어서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아.

-영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거 아닌가요?

-……그렇, 지?

-그럼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으니 이쪽으로 와 봐요. 당신이 도와줘야 하니까.

그렇게 작은 백호가 기척을 죽인 채 재빠르게 찾아낸 곳은 저택의 부엌이었다.

많은 사용인들이 등극식 후 벌어질 연회 준비를 위해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언제 결계가 깨질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했기에 더 좋은 걸 훔칠 시간은 없었다.

하여 백호는 아궁이에서 튀는 불티 하나를 손에 넣는데만 집중했다.

“큐큐!”

-가요!

커다란 백호가 불티가 꺼지지 않도록 바람을 조절해 감싼 이후, 두 마리의 백호는 복도 위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신영의 저택은 등극식에 필요한 행사용 제막부터 여러 의복과 장식들이 방마다 한가득이었다.

불에 잘 타는 것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는 말이다.

오가는 시종들이 어찌나 많은지 그들을 피하는 것도 일이었다.

하여 딱히 목적지를 두지 못하고 비어 있는 방과 곳간에 닥치는 대로 불을 붙였다.

작은 불티가 쉽게 꺼지지 않도록 일일이 그 불에 영력을 포함시키는 일도 잊지 않았다.

저택을 둘러싼 결계로 인해 다른 곳으로는 번지지 않고 그곳에서만 불이 유지되었으나.

‘뭐. 번지지 않는다면 더 많이 붙이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한데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영력을 주입한 것은 어디까지나 불티가 꺼지지만 않게 하려던 것이었는데.

펑!

퍼펑! 펑!!!!

“!?”

“!!”

영력을 머금은 불티는 저택을 뒤엎은 결계의 반탄력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 하나를 삼켜 버린 화마가 창호 문을 녹여 버리며 복도까지 거침없이 새어 나왔다.

“…….”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 세화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어, 난 그저 결계로 돌아가기 위해 눈을 잠시 돌리려 했을 뿐인데. 이렇게 크게 지를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거, ……안 꺼질 것 같은데. 이것도 이것저것 뒤섞여버린 내 영력이 문제인 걸까요?

-……그러게.

백기하 역시도 그녀의 의도와 비교할 수 없게 일이 커져 버린 광경을 잠시 암담하게 응시하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변용이 풀리더니 세화가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인가 하여 백기하 역시 제 모습을 사람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한데 변용이 풀린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듯 멍하니 불길을 바라보고 있던 세화가 중얼거렸다.

“……큰, 일 났네요. 어쩌죠.”

“왜. 어디가 안 좋아? 몸에 이상이라도 있는 거야?”

“아뇨, 그게 아니라.”

“……??”

울 듯, 아니 웃는 듯. 그녀는 묘한 표정을 한 채 붉은 불길을 가만히 응시했다.

“……기분이 좋아서.”

“뭐?”

“이딴 저택 따위, 진작에 이렇게 불태워 버렸어야 했는데.”

그리 중얼거린 세화가 낮게 웃었다.

“하하. 아 이렇게 속이 시원하네요. 아, 세상에. 뭐지. 나 미쳤나 봐.”

시간을 되돌리기 전, 그녀와 가족들이 가축처럼 끌려 나갔던 방도.

그 길가에서 자신을 보며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던 복도도.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모조리 불타고 있었다.

섬뜩할 정도의 날카로운 살의와 환희가 세화의 눈 안에서 반짝였다.

“저기. 우리, 그냥 다 태워 버리면 안 될까요?”

붉은 입술을 꾹 물던 세화가 백기하에게 고개를 돌렸다.

“불에 타도 등극식은 예정대로 진행될 거예요. 신영의 등극식은 무조건 화기가 가장 넘치는 용족의 길일에 맞춰야 하는데 다음번 길일은 두 달 뒤니까.”

비릿하게 입가를 끌어당긴 세화에게서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 초조함이 묻어났다.

마치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허락받으려는 것처럼.

“두 달이나 기다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니까. 그러니…….”

“주세화.”

“…….”

백기하가 몸을 숙여, 그런 세화와 시선을 마주했다.

시선 속에 초조함과 함께 수많은 감정이 읽혀 내렸다.

다정한 눈빛이 둥글게 휘었다.

“날 설득할 필요 없어. 그대가 하고 싶은 것 다 해.”

그녀를 그렇게 괴롭게 했던 곳이었다.

그도 건물이 아니라 땅 전체를 태워 없애 버리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백기하가 불길이 집어삼키고 있는 예식용 의상을 하나 끌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는 불에 타는 의상을 채찍처럼 영력을 담아 휘두르며 다음 방에 처넣었다.

쾅!

영력을 삼킨 불길이 화르륵 일어났다.

그 모습에 세화의 표정이 조금 더 밝아졌다.

다음 방도. 그다음 방도.

“그대가 하고 싶은 것 다 해.”

그렇게 말하는 백기하와 그 말을 듣고 환하게 웃은 그녀에 의해 거침없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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