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4화 (174/254)

“그럼 소가주님, 이 일을 어찌 처리하실 겁니까.”

“결코 가볍게 처리하지 마십시오”

“이 결계가 허락도 없이 만들어진 이상 명분은 제게 있지 않습니까. 허나 백가주와 세화를 이 안에서 끄집어내기 전까지는 얘기가 진행되지 않을테니. 죄인을 추궁할 수 있도록 원로들께서도 힘을 빌려주시지요.”

“좋습니다!”

“그럽시다!”

눈썹을 날카롭게 치켜든 원로들이 일제히 손안에 영력을 담아서는 새하얀 결계를 공격했다.

콰앙!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충격파가 복도를 휩쓸었다.

무사들까지 그 공격에 다시 합세하자 땅 위로 벼락이 내리치듯 괴성이 울리고 지축이 흔들렸다.

쩌적. 쩌적-

머지않아 결계 역시도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며 흔들렸다.

챙!

결국 맑은 소리를 내며 결계의 윗부분이 유리처럼 깨어져 떨어져 내리던 순간이었다.

흩어진 결계 사이로 드러난 문이 열리더니 세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도를 가득 메운 일행들을 발견하고는 멈칫한 그녀는 결계가 깨어진 제 방과 소가주를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뭐죠? 설마 방금 그 공격, 소가주님께서 하신 건가요?”

뒤따라 나오던 백기하 역시도 복도에 즐비한 이들을 훑으며 나직이 눈살을 찌푸렸다.

써늘한 목소리가 원로들에게로 향했다.

“모두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신데 아무도 들이지 말라 신신당부를 한 별채에 이리들 한꺼번에 방문하신 겁니까.”

원로 하나가 그런 백가주에게 따져 물었다.

“백가주.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어찌 남의 영지에 들어와서는 허락도 받지 않고 결계를 세웁니까. 이게 그 가문의 가주를 향해 침을 뱉는 행위라는 것을 몰라 이런 겁니까?”

그와 동시에 신영의 뒤에 시립해 있던 무사들 역시 한발 앞으로 나섰다.

그가 결계에 대해 제대로 설명치 못하고 당황하거나 사죄하는 즉시 조금 전 화재에 대해 언급하며 명분을 세울 작정이었던 것이다.

한데 원로의 그 말에 백기하와 세화 둘 모두가 눈을 치뜨며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입니까.”

백기하가 제 기막힘을 숨기지도 않고 드러내며 말했다.

“지금 신영의 등극식으로 인해 모두가 얼마나 바쁜 상황입니까. 무사들부터 시종들까지 누구 하나 저택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이가 없는데, 그런 상황에서 제가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자칫 길을 잃어 저택의 밀지까지 도달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

“그리하여 저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그럼으로써 신영과 주가 혈족들께서는 환계 최고의 예식을 마음 편히 준비하시라는 제 선의의 발로였건만-. 그 선의를 왜곡하고 저를 의심하여 여기 이 모든 원로분들이 달려오셨다, 이겁니까?”

“…….”

“결계가 침을 뱉는 듯한 행위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안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 그걸 경계하기 위해서인 것을. 하나 제 결계는 고작 이 별채. 제 방이 있는 이 작은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 세워졌건만, 제가 이 좁은 곳에서 대체 뭘 한다는 겁니까.”

“그, 그래도 뭔가 할 수도-.”

“지금 뭔가를 잊고 계시는 건 아닙니까. 귀가문과 육문이 전장에서 맞부딪쳤을 때.”

낮게 목을 울린 백기하가 그들에게 한발 성큼 다가갔다.

큰 키를 숙여 원로들과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렸다.

“주가의 십만 무사도 저 하나의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

“주가의 밀지이건, 신영의 저택이건. 제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제식을 망치려 했다면 결계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지.

신영의 등극식을 위해 저택에 몰려 있는 주가의 정예 병력이 얼마이던가. 이곳에 머무는 주가 원로들의 수는 몇이고.

그들이 모두 자신의 발아래라는 말이 아닌가.

“…….”

하지만 그 말에 지극히 심기가 거슬리면서도 무어라 더 말을 얹지 못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맞는 말이었을뿐더러, 의심이 불쾌했는지 피부를 쭈뼛하게 만드는 백가주의 살기가 계속해서 날아들어 혀끝이 얼어붙은 것이다.

신영이 벌컥 노성을 질렀다.

“그 무슨 오만방자한 말이냐! 네가 신수가 되었다고 온 환계가 네 발아래에 놓인 것 같더냐! 너! 네가 본 것을 고해라!”

신영이 소리치자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무사가 앞으로 나섰다.

“예! 등극식의 쓰일 물품들이 보관된 전각에서 영력으로 보호된 불길이 거대하게 피어올라 총 일곱 채의 전각과 회랑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그곳에서 화마를 진화하고 있던 신은 분명 그 자리를 빠져나가는 백가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래도 발뺌을 할 셈이냐!”

신영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결계가 네 선의였다고?! 결계 따위 없어도 일을 벌일 수 있어?! 그래! 할 수야 있겠지! 허나 오늘의 결계만큼은 네가 내 등극식을 망치기 위해 벌인 일이 아니냐!”

그는 이내 원로들을 향해서도 호소했다.

“불길 안에 스민 영력이 어찌나 거대한지 아무리 끄려 해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감히 신영의 등극식에 쓸 물건을 다 태웠습니다. 한데도 원로들께서는 저런 말 같지 않은 변명에 휩쓸려 범인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아.”

“아, 그러니까 우리는…….”

“아무리 주가의 위상이 추락했다고는 하나 다른 일도 아니고 신영의 등극식입니다. 그런 중대한 행사에 참여해 보고도 없이 결계를 세운 것도 맞고, 그것을 빠져나가 화재를 일으키고 의식을 망치려 한 것도 맞는데! 어찌 저런 간악한 자의 말에 홀리시는 겁니까. 주가의 핵심 원로라는 분들께서!”

어째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 같지 않기에 신영은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백기하가 그 노성의 사이를 정확히 끊어 내며 제 목소리를 꽂아 넣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뭐야?!”

자신의 말을 자른 것에 신영이 분노할 새도 없이 백기하가 조금 전 화재 현장에서 그를 보았다고 말한 무사에게로 다가갔다.

“너, 그곳에서 날 본 것이 확실한 것이냐.”

“그,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한데 네 머리가 왜 이리 높은 곳에 있는 것이냐.”

그 말과 동시에 무사의 무릎이 꺾여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

“다시 한번 묻겠다. 확실히 나를 본 것이 맞느냐?”

신영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백가주! 지금 네가 주가의 무사를 겁박해-.”

“조용히 좀 해 보십시오. 저도 이런 불쾌하고 어처구니없는 오해는 벗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형형히 빛나는 그의 시선이 무사에게로 이어졌다.

“날 본 것이 맞느냐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그때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느냐.”

“예?”

무사의 눈이 황급히 백기하가 현재 입고 있는 옷으로 향했다.

연한 회색에 바람 무늬가 새겨진.

한데 문제가 있었다. 지금 보니 그의 오른팔 사이로 하나의 의복이 더 끼워져 있었다.

밀빛 바탕에 연한 금사 자수로 바람무늬가 새겨진 옷.

무사의 얼굴에 당황이 번져 갔다.

무슨 옷이라고 대답해야 하나. 그러고보니 처음 이 저택에 들어올 때 입은 옷과도 달라진 것 같은데 그때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지?

“왜 대답하지 못하느냐.”

“그게, 그게 저-. 얼굴을 보고 너무 놀라 백가주가 맞는지를 확인하느라 옷은 정확히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못했다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비슷한 색도 짚어내지 못한단 말이냐?”

무사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백가주가 바람을 잘 다룬다 한들 화재 현장을 지나왔다면 불길의 냄새가 남았을 터였다.

기감을 끌어올린 무사가 예리하게 두 옷을 살폈으나 두 옷 모두 불길의 냄새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바람으로 처음부터 냄새가 배지 않게 한 것인가? 불을 지른 것이 확실치도 않은 상태에서 몰아가는 것이니 의복따윈 아무 것이나 말해도 되는 걸까? 어쩌지. 젠장. 이 일을 망치면 신영께서 날 살려두지 않으실 텐데.’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무슨 옷을 입고 있었다 진술한들 그걸 누가 증명할까 싶었다. 어차피 다 거짓인데.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무사의 눈에 저 멀리 의자 위에 걸쳐져있는 푸른 옷이 보였다.

섬세한 자수가 눈앞의 두 의복과 동일한 백가의 바람무늬를 그리고 있는 것을 보니 저것도 백가주의 옷이 틀림 없었다.

‘혹시나 정말로 방화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눈앞의 두 의복은 확실히 아무 냄새도 나지 않으니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네가 지금 등극식의 준비에 힘쓰셔야 할 소가주와 원로들의 시간까지 모두 빼앗고 있구나. 빨리 고하지 못할까!”

“푸른, 푸른 겉옷을 걸치고 계셨습니다!”

때마침 들린 백기하의 호통에 무사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푸른 옷?”

“네, 네. 확실합니다. 저기 있는 푸른 옷을 걸치고 계셨습니다. 황급히 갈아입으신 게 분명합니다!”

백기하의 시선이 방안으로 향했다.

“네가 말하는 것이 저 옷이냐?”

“그렇습니다.”

그 대답에 백기하가 기가 찬 듯 웃으며 방으로 돌아가 무사가 말한 옷을 가지고 나왔다.

완전히 펼쳐진 옷은 결코 그가 입을 수 없는, 확연히 작은 크기의 것이었다.

“그것 참 우습구나. 이 옷은 내 것이 아니라 내 부인의 것인데.”

“!!!”

“내가 이걸 대체 입을 수나 있는 것이냐! 너는 어찌하여 거짓 보고로 주가와 백가 사이를 이간질하는 것이냐! 삼족을 멸한다 해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을 대죄를 신영의 호위라는 자가 벌이다니!”

“아니, 아니 제가 거짓으로 고한 것이 아닙니다. 백가주께서는 스스로를 가두셨다 하셨지만 결계가 그리 공격당하는데도 한번 나와보시지 않다가 결계가 파쇄된 후에야 모습을 보이셨지 않습니까. 그동안 안에서 증거인멸을 하고 계셨던 것은 아닙니까?”

백기하가 보이는 기세에 사색이 되었지만 그 뒤에 자신을 처벌할 신영이 더 두려웠던 무사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결계로 숨겨진 방안에서 무슨 짓을 하셨다 한들 저흰 알 수 없을텐데. 백가주께서야말로 제가 의복의 색만 기억한다는 것을 노리고 제 발고를 거짓으로 만드시고 싶어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고합니다.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내가 그 푸른 옷이 어디서 났기에?”

“예? 그야 당연히 백가주께서 가져오셨겠지요.”

“나는 푸른 옷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걸 누가 증명하-.”

“우리가 저택에 들어올 때 신영의 명으로 몸수색과 짐수색을 하였다. 그 시종을 불러 물어보면 되지 않느냐. 신영꼐서 친히 수색을 맡기셨던 시종인데. 너도 그를 두곤 차마 거짓을 고한다는 말은 못하겠지.”

“!”

그제야 몸수색과 짐수색에 관한 것이 생각난 무사가 제 혀를 씹었다.

주가의 저택은 특별한 영력으로 보호받고 있기에 그간 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피해를 본 적이 없었다.

하여 몸수색이나 짐수색 같은 자질구레한 일을 한번도 한적이 없어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 그게 저…….”

‘저 모자란 것이! 잘못 봤다 해야지! 다시 보니 지금 입고 있는 옷인 듯하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무사의 모습에 신영이 이를 갈았다.

“네가 우리 주가를 아주 얕보고 있구나. 불길에 비쳐 옷 색을 잘못 보았을 수도 있지. 그딴 것을 잔꾀라고 부리며 일을 무마하려 해?!”

저라도 나서야 겠다는 생각으로 신영이 그리 소리쳤지만 그런 신영을 원로 중 한 명이 조용히 가로막았다.

속삭이듯 그에게 충고했다.

“소가주. 그만하시지요. 등극식도 있겠다, 길일을 앞두고 이리 소란스러워서야 되겠습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저 백호가 하는 말을 듣고도-.”

“소가주. 저흰 아직 탈피하시지 못한 소가주께서 신영의 위에 오르시는 것도 받아들였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아니 지금 그 말은 대체 왜 꺼내시는, 그게 지금 이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저희에게 더 큰 희생을 강요치 마시란 얘깁니다.”

“……희생?”

원로의 눈엔 여러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래. 백기하가 실제로 방화를 저질렀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어떻게든 백기하를 감옥에 잡아넣는다 치자. 그 이후에 네가 뭘 할 수 있단 것이냐.

탈피조차 못 한 몸으로 그를 제압할 수 있겠느냐.

아니면 이미 십만 무사가 저 신수 하나에게 패했는데, 그 광경을 지금 여기서 다시 재현하겠다는 것이냐, 하는 그런 의미들이.

기가 막힌 신영이 허공에 숨을 뱉었다.

“제가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원로들도 조금 전까진 분명-.”

“그땐 소가주께 어떤 확실한 물증이 있는 줄 알았지요.”

그래서 뭔가 배상이라도 받아낼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잘못 부딪치면 힘없는 소가주 대신 자신들이 그 뒷감당을 하게 생겼다.

신영의 등극식에 문제가 생긴 건 자신들도 화가 날 일이 분명하긴 했지만 백기하가 범인인지는 확실치 않았고.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저 신수에게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저희는 소가주의 상태를 알면서도 대외적으로는 탈피하셨다 공표하실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운, 주가를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번 일은 저희의 조언대로 처리하시지요.”

“맞습니다. 그리하시지요.”

‘이 미친놈들이 저 호랑이 새끼의 기세를 보고 겁을 먹었구나.’

헌데 그것이 괘씸하면서도 신영도 입이 막혔다.

탈피하지 못한 것이 맞는데.

하여 오늘 밤 제식에서 신영의 자리에 완벽히 오르기 전까지는 이 원로들이 얼마든지 결정을 바꿔 제 등극을 반대하고 나설 수 있다는 걸 아는 상황에서.

“…….”

오늘 밤 신영의 의식 전에는 이 원로들과 척을 질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 뭐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이런 일을 이리 무마할 순 없다 해야 하는데.’

“예? 소가주. 그리하시지요.”

그 결정을 종용하는 것은 비단 원로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복도에 있는. 눈이 있는 자들이 다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주세화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눈을 반짝이면서.

그 미쳐 버릴 것 같은 광경 속에서.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문 신영이 몸을 떨었으나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한가지뿐이었다.

“……거짓, 증언을 한 이놈을, 감옥에 처넣어라.”

* * *

방으로 돌아온 신영이 제 분기를 이기지 못하고 손에 닿는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부러뜨리고 집어 던졌다.

“아아아아악!”

도저히 머리까지 치솟는 노기를 어떻게 제어할 수가 없었다.

너의 경솔함 때문에 대체 이게 무슨 망신이냐는.

혀를 차는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듯한 시선과 백기하에게 향하던 원로들의 변명이 그를 미치게 했다.

“백가주, 이해해 주십시오. 우리 소가주가 연치가 어려 아직 생각이 깊지 못합니다.”

“탈피도 못 한 몸 아닙니까. 어쩌다 보니 이른 나이에 신영의 위에 오르게 되어 소가주가 많이 긴장하고 불안했었나 봅니다.”

“이런 미친 것들이! 내 나이가 어려? 생각이 깊지가 못해?”

썩어 빠진 것들! 백기하에게서 뜯어낼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이니 손바닥을 뒤집듯, 그리 쉽게 등을 돌려?!

“진작 물갈이를 해 놨어야 했는데.”

그렇지만 막상 신영의 위에 올랐을 때는 저런 놈들이 다루기가 더 쉬웠기에 그러질 못했다.

“젠장! 젠장!”

이번 일로 원로들에게 온갖 지탄을 받으면서도 그는 제대로 변명조차 할 수가 없었다.

탈피하지도, 신영의 위에 오르지도 못한 지금의 상황에서는 아직 그들을 쥐고 흔들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혼인선물이라고 만인 앞에서 전달해 발동케 하려던 영기마저 전하지 못했으니.

“탈피만 했어도. 탈피한 몸으로만 바꿨어도. 주세화 그년만 아니었어도.”

이를 악문 신영이 타는 듯한 눈빛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저 연놈들의 술수로 지금은 당장 일을 벌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저 별채 주변에 영기를 지천으로 깔아 놓지 않았던가.

게다가 신영으로 등극하고 나면 적룡의 영단을 내보이며 사용할 수 있게 되니, 뭘 시도하든 그때 한 번은 더 기회가 있으리라.

“그래, 맞아. 적룡의 영단!”

그걸 사용하면 영기들이 영력이 부족해 멈출 걱정도 없지 않은가!

“거기 누구 있느냐!”

신영의 노성에 방문 밖에 시립해 있던 이보관은 눈조차 들지 못하며 서둘러 들어왔다.

“넌 가서 적룡의 영단의 봉인을 풀어라. 등극식 전에 마쳐야 한다! 알겠느냐!”

“예?!”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고야 말았다.

봉인을 풀면 영단은 안에 들어 있는 강렬한 힘을 단 한 번 외부에 발휘하고는 그대로 소멸하고 만다.

“시, 신영! 그, 그것은. 그렇게 되면 신영의 증표가, 주가의 신기가 영영 소멸됩니다! ”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이다! 어차피 삼키고 흡수시켜 내 힘으로 만들지도 못할 계륵 같은 것이 아니냐. 뭐가 대수냐! 명대로 시행하라!”

“신, 신영! 그래도 그것은-.”

“너부터 죽고 싶으냐!”

“!”

핏줄이 설 정도로 살기 등등한 신영의 기세에 이보관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던 이보관이 결국 “네.” 하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그의 명을 수행하러 나갔다.

이를 악문 신영이 안광을 형형히 빛냈다.

“고작 이런 일로 나를 이겼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힘주어 틀어쥔 그의 손안에서 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누구의 목숨줄이 더 빨리 끊어질지 경쟁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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