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는 교룡이 사라지고 나서도 계속 이어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제대로 반기지도 못하던 사람들은 검붉은 영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마자 엉엉 소리를 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비다! 비가 온다고! 비가 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큰 소리로 환호하기도 하고, 온몸으로 비를 끌어안은 채 감격에 겨워하는 이도 있었다.
“삐이이.”
교룡의 영력에 땅으로 곤두박질쳤던 매가 정신이 들자마자 비틀거리며 세화에게로 날아왔다.
여러 번 피를 토했던 세화가 걱정스러운지, 빙빙 곁을 돌며 날다가 부리로 콕콕, 어깨를 두드렸다.
세화가 미미하게 웃었다.
“하나도 안 지쳤어. 괜찮아.”
콕, 콕.
“알았어. 조금만 더 보고…….”
매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제 주위를 도는 것을 알면서도 세화는 기쁨에 젖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 찬찬히 아래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를 발견한 세화가 입술을 물었다.
수없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정말 잠시 떨어져 있었던 건데도, 너무 보고 싶었던…….
“백기하.”
담담히 아래를 살피던 세화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파르르 떨리는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한 번 더 꾹 물고.
치미는 감정을 꾹꾹 눌러 삼킨 그녀가 제게로 달려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백기하.”
이상하다. 정말 괜찮았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주세화!”
왜, 당신을 보니 이렇게 다리에 힘이 풀리고 주저앉고 싶어지는 걸까.
억수같이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백기하가 제단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몰려 있는 사람들을 밀쳐 내고, 단번에 가까이 다가온 남자가 세화를 끌어안았다.
“맙소사. 그대.”
백지장처럼 희게 질린 얼굴을 한 그가 숨을 헐떡였다.
인계의 문을 결계로 막던 백기하가 이상 징후를 느낀 건 하늘 높이 강력한 붉은 사기와 빛이 충돌할 때였다.
혈호에서 느껴졌던 것과 똑같은 역겨운 영력은 그녀의 힘을 짓누르고 있었지만, 위험을 알려줄 거라던 영단엔 변화가 없었다.
신호가 가지 않도록 그녀가 영단에 무슨 일을 해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무사한 것인지.
문을 막아 달라는 부탁을 받은 상태이니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도 없고.
거센 영력의 파동들만 읽어 내며 얼마나 마음을 졸여야 했던가. 그런데 결국 이런 모습이라니.
“이 피는 뭐야.”
“백기하.”
“다친 거야? 어디, 어디를 다친 건데!”
신령한 빛의 풍성한 영력이 그녀를 감싼 채 치유하는 중이긴 했지만, 그 안쪽의 옷은 피와 교룡의 검은 진액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내상으로 피를 토하기도 해, 입가도 엉망이었을 것이다.
“이러려고 나보고 인간계 문을 막고 있으라고 한 거야? 그대가 다치면 나는……. 난……!”
그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정말로 잘 알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웃음이 나오려 하는 걸까.
세화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두 입술을 눌러 붙여 간신히 참았다. 그 모습을 보였다면 이 사람이 더 화를 낼 테니까.
“안 다쳤어요.”
“거짓말하지 마. 지금 그대 모습이 어떤 줄이나 알아?”
괜찮다고 안심시켜야 하는데.
보기엔 이래도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를 보자 갑자기 피로가 밀려왔다.
당장 눕고 싶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도 어렵고. 그럼에도 품의 남자를 단단히 마주 끌어안고 싶기도 했다.
숨을 크게 내쉰 세화가 백기하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최장명에게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고 말하려 했는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나 너무 힘들어요.”
“…….”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세화의 속삭임에 백기하가 가볍게 그녀를 안아 들었다.
세화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떨리는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그대는 아프면 안 돼. 다시는.”
“응.”
“건강하고, 건강해야 한단 말이야.”
“응, 알았어요.”
백기하의 말에 응, 응, 고개를 끄덕이던 세화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빗방울이 이렇게 거센데, 이 품은 대체 왜 이리 따뜻한지.
성익권과 정치화에게 말도 전해야 하는데.
두 눈이 가물가물하더니 이내 잠이 쏟아졌다.
세화가 작게 하품하자 그 교룡을 당장에 잡아 와야겠다, 목숨을 끊어놓겠다 이를 갈던 백기하의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졌다.
가만가만, 이마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막는 손에 세화가 밀려오는 잠을 이겨 내며 입을 열었다.
“……안 다칠게요.”
“……응.”
“아프지도 않을게요.”
“응.”
“그러니까 백기하. 당신도 하나 약속해요.”
“…….”
“……당신 꼭 행복해야 해요, ……내 곁에서.”
오래오래.
세화의 말에 백기하의 눈이 잠시 굳어진 채 껌뻑였다.
어서 답하라는 시선에 백기하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혹시 그녀가 보지 못했을까 봐, 알았다는 말까지 연신 덧붙였다.
세화는 안심한 듯 그의 품 안에서 정신없이 잠에 빠졌다.
그녀가 잠에 빠져들며, 세화의 주위를 감싸던 밝은 빛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세화를 안은 채 백기하가 천천히 제단을 내려왔다.
걸음을 옮기는 그들을 발견한 사람들이 감히 방해하지 않으려 빠르게 몸을 물렸다.
그 사이를 걸으며 그는 혹여 세화가 추울까 커다란 몸을 굽혀 빗방울을 막았다.
더없이 다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오래오래 행복해야 한다고.
백기하에게 그건 아주 쉬운 문제였다.
“그건 그대만 내 곁에 있으면 돼.”
이 여인이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 너무 좋아서.
그저 제 곁에서 행복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나 좋아서 잠시 마음이 흐트러졌다.
물론 이 행복을 만끽하기 전,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다.
백기하가 그녀의 옷 곳곳에 묻은 더러운 사기의 흔적을 보며 이를 사리물었다.
감히.
두 눈을 시리게 뜬 백기하의 얼굴이 더없이 단단해질 때였다.
누군가 그런 그의 곁으로 허겁지겁 다가왔다. 성익권이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굽히며 권했다.
“비가 많이 오고 있습니다. 궁이 가까우니 잠시 비를 피하고 가시지요.”
* * *
세화가 눈을 떴을 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온통 처음 보는 낯선 공간뿐이었다.
번쩍 눈을 뜬 세화가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누군가의 손이 나직이 그런 그녀의 몸을 도닥였다.
쉬. 쉬.
괜찮아. 궁이야.
‘아, 그다. 그가 옆에 있어.’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누워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따뜻한 불빛을 가진 작은 초가 타고 있었다.
손 아래로 비단 금침의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누운 곳 옆에 앉은 채 백기하는 가만히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한 번 더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세화는 이미 잠이 다 깬 상태였지만 그의 힘에 거부하지 않으며 그대로 누웠다.
“여긴 어디예요?”
“궁이야.”
궁?
너른 방 안에는 어둑하게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주변은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어떤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나고 있었다.
“이거, 바람 소리예요?”
“빗소리야. 아직 비가 오고 있어.”
비가 계속 오고 있구나.
그 말에 마음 깊은 곳이 편안해지며 몸에서 긴장이 빠져나갔다.
“사람들이 많이 기뻐했어요. 당신도 봤죠?”
“…….”
“환석도 모두 사용했고, 그 비에 푸른 거북이의 영력까지 아낌없이 담았으니 잘 회복될 거예요.”
다행이라고. 정말 다행이라고.
건강한 혈색으로 돌아오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나직이 웃던 세화의 생각이 갑자기 어딘가에 닿았다.
“아 참. 최장명은요? 저택으로 돌아갔어요? 사람의 모습으로는 돌아왔나요?”
“…….”
“응? 혹시 아직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한 거예요?”
놀란 세화가 몸을 일으켰으나 백기하는 어두운 얼굴을 한 채 고집스레 입을 열지 않았다.
“왜. 뭔데요. 무슨 일 있어요? 내가 가 봐야 하는…….”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네?”
“그대가 피를 얼마나 쏟았는지 알아? 죽을 뻔했다는 거 아느냐고.”
백기하가 이를 악물었다. 몸이 잘게 떨려왔다.
“제단이 피범벅이었어.”
“…….”
“그대 역시도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이 밤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대를 내가 무슨, 무슨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는지 알아?”
“백기하.”
“그런데 사람들이 기뻐하더라고? 그 매가 인간으로 돌아왔냐고?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건.”
내 피가 아니었다고 거짓말이라도 해 안심시키려던 세화가 입을 다물었다. 백기하가 그것조차 구분하지 못할 이는 아니었으니까.
분통을 터트리는 백기하의 모습에 어느새 세화의 자세가 얌전해졌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제가 생각해도 좀 너무하긴 했다.
‘제단이 교룡의 사기와 내 피로 엉망이었을 텐데. 그 사이에서 괜찮다고 말하고는 바로 의식을 잃었으니 저 남자가 얼마나 놀랐을까.’
게다가 저 남자도 문을 막아서느라 고생하고 돌아왔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은 채 쓰러진 그녀의 뒷수습까지 맡겼으니.
“……걱정 끼쳐서 정말 미안해요. 한데 만약 또 이렇더라도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나한테 푸른 거북이의 영력이 있어서 스스로 치료가 가능하고-.”
“그런 말을 듣자는 게 아니잖아. 스스로 치료가 가능하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몸을 다쳐도 괜찮다는 거야? 내가 그렇게 다치고 그런 말을 해도 그대는 그렇구나, 할 거야?”
“…….”
빠르게 입을 다문 세화가 눈만 굴렸다. 솔직히 그건 엄청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녀가 차마 최장명이 갑자기 매가 되어서, 탈피가 잘못된 듯한데 그것이 신경 쓰여 그랬다며, 어물어물 제 변명을 꺼내 놓았을 때였다.
백기하는 깊은 한숨과 함께 하늘로 시선을 올린 채 제 속에 들어차는 무언가를 다스렸다.
그러더니 불쑥 주먹을 쥔 채 제 손을 내밀었다.
누가 들어도 급격하게 만들어 낸 기운 빠진 목소리가 이어 나왔다.
“……나도 다쳤어.”
“응? 다쳤다고요? 어디를요?!”
“여기.”
그곳엔 핏기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붉은 실금이 나 있었다.
세화의 시선이 상처에 한 번, 당당하게 제 손을 내놓고 있는 백기하의 얼굴로 한 번, 번갈아 움직였다.
“…….”
“봐 봐. 보여? 여기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이거 상처야.”
혹여 너무나 가느다란 상처가 제대로 보이지 않기라도 할까 봐.
하여 세화가 그것을 모를까 봐 걱정한 백기하가 신중한 태도로 제 상처의 끝과 끝을 알려 주었다.
“나 다친 거 보여? 잘 보고 있어?”
“…….”
“뭐야. ……어떻게 웃을 수 있어? 나 다쳤다니까.”
그의 목소리가 충격을 받은 듯 낮아지자 세화가 제 입술을 꾹 깨물며 웃음을 삼켰다.
“당연히 걱정되죠. 당신이 다쳤다는데 걱정하지 않을 리 없잖아요.”
‘하지만 이건…… 정말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
하얗고 가는 그녀의 손가락이 그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입가로 가져가 상처 위로 따스한 입김을 불었다.
그렇게 세화가 백기하의 상처 근처를 몇 번 쓰다듬으며 나비 날개 같은 긴 속눈썹을 다시 들어 올렸을 때였다.
백기하의 시선엔 이미 몰라볼 수 없는 열기가 들어차 있었다.
“저, 내가 생각해 봤는데요.”
그가 한발 늦게 대답했다.
“……응? 응. 아. 뭐를?”
세화가 화들짝 놀란 그의 말투를 모른 척하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말마따나 내가 영력을 많이 써서 그런지 몸이 좋지 않아서 영력을 또 사용하기는 좀 그래서요.”
“뭐라고? 몸이 안 좋다니.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데?”
세화가 손가락을 들어 백기하의 입술을 꾹 눌렀다.
“잠깐 일단 들어 봐요. 그래서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응.”
그녀가 여전히 두 손으로 쥐고 있는 그의 손 등 위에 쪽, 입술을 눌렀다.
“!!”
“어디서 들었는데 상처에 이렇게 바람을 불어 주고 입을 맞추면…… 빠, 빨리 낫는다고 하더라고요.”
“…….”
“정말이에요. 정, 정말 많이 퍼진 민간요법인데.”
세화가 더듬거리며 얼굴을 붉히자 백기하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알지, 나도. 나도 들어 봤어. 나도 엄청 많이 들어 봤어.”
“당신도 들어 봤군요. ……그래서 일단 요 상처는 굳이 영력을 쓰기보다.”
그녀가 눈가를 붉히며 그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당신 아플 때마다 내가 이렇게 입을 맞춰 주면 어떨까요?”
귀까지 붉어진 백기하는 제 그런 상태를 모르는 듯 표정 없는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다가 한쪽 볼을 내밀었다.
“여기도 봐 봐. 나 여기도 상처 있어.”
그 옥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피부엔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세화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꺼내 들었다.
“그러네요. 내가 몸이 좋지 않아서 영력을 쓰기는 좀 그런데. 입술이라도 눌러 놓을까요? 이렇게?”
쪽.
아이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세화는 제가 하고도 얼굴을 붉혔다.
표정은 냉랭한데 목 끝까지 새빨개진 백기하의 상태는 그녀보다 더했다.
그 상태로 둘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어둑한 방 안. 근처에서 인기척을 발견할 수 없는 둘만의 세상.
빗소리마저 그들의 소리를 감춰 주고 있었다.
천천히 가까워진 얼굴 사이로 숨결이 먼저 맞닿았고 그다음엔 마른 입술들이 겹쳐졌다.
아무것도 망설이지 않고, 흰 손끝들이 서로의 의복을 벗겨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