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254)

제일 먼저 거대한 빛의 뿔이 날개처럼 허공을 뒤덮으며 펼쳐졌다.

이전처럼 짐승으로 변화하진 않았다. 그저 짐승의 형상을 한 빛이 그녀의 몸에 덧씌워졌을 뿐.

짐승은 용을 닮은 듯도 사슴의 모양과 닮은 듯도 했다.

발굽 사이로는 푸른 생기가 흘러 마치 대지처럼 든든히 거대한 몸체를 받치고 있었다.

고통에 신음하던 교룡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홉뜨곤 몸을 뒤틀었다.

―설마, 설마 여기서……. 설마……. 네년 따위가!

교룡의 붉은 사기가 세화의 세찬 영력에 옅어지기 시작했다.

누구도 그 빛을 견딜 수 없었다.

제단 아래의 사람들 역시 허겁지겁 꿇어앉아 마치 절을 하듯 제 얼굴과 눈을 가렸다.

어둠을 가르고 태양을 끌어온 듯한 그 빛은 교룡에겐 칼날이나 다름없었다.

불완전했던 피부가 녹아내리듯 벗겨지고, 붉은 근육이 드러났다.

―너는 이날을 후회할 것이다! 다음에 다시 만나는 날, 네년을 빛도 들지 않은 감옥에 처박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고통과 절망을 매일매일 안겨 줄 테니까!

제단의 아래에서 고통에 손톱으로 돌바닥을 긁어내리던 그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그것이 온전히 네 힘인 줄 아느냐? 너는 그 힘을 사용할수록 너 자신을 잊게 될 것이다! 기억이 지워지고 몸이 사라지고! 종래에는 먼지로 변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너를 기억하는 이 또한 아무도 남지 않게 되어 버릴 것이다! 그건 원래 그런 힘이야. 그런 힘이니까!

세화는 고요한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한 걸음씩 계단을 밟았다.

그녀가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제단의 주변에 쌓여 있는 환석들이 감응했다. 세찬 영력을 온 사방에 공명시키며 그녀의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어둠은 빛의 폭포에 갈라져 버린 지 오래였고 푸르른 하늘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세화가 교룡이 했던 것처럼 힘을 담은 팔을 횡으로 그었다.

명령이라도 받은 듯 하늘 위로 높게 올라간 빛들은 이내 여러 갈래로 흩어져 날아갔다.

쿠르릉-.

먼 하늘에서 나직이 우레가 울었다.

바람이 불었다.

첫 번째는 보통의 바람이었으나 곧 빠르고 거칠게 바뀌어 어디선가 눅눅한 습기를 끌어모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두 인외 존재의 싸움을 지켜보지 못하고 땅으로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때였다.

톡. 톡.

그런 그들의 등을 무언가가 두드렸다.

뒤늦게 그 변화를 눈치챈 누군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제가 본 것을 믿지 못해 잠시 눈을 껌뻑거렸다.

그 와중에도 톡톡, 그 무언가는 사람들의 몸을 때리며 계속해서 떨어져 내렸다.

“……맙소사.”

누군가 흙 묻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마르고 거친 손바닥 위로 차가운 무언가가 고여 들었다.

“……비다.”

비가 오고 있었다.

쏴아아.

작은 물방울 하나는 이내 사람들의 온몸을 적시는 소나기로 변해 쏟아졌다.

* * *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억수 같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반년만의 비에 마냥 기뻐해야 하건만.

그때껏 끝나지 않은 괴물들의 전쟁에 사람들은 마음 편히 제 몸을 적시는 비를 즐길 수도 없었다.

다만 조용히 허겁지겁 빗물을 받아 마셨다. 젖은 얼굴을 닦아 내고, 바싹 말라 갈라졌던 입술이 충분히 젖어 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계속해서 참아 왔던 이들의 눈물이 그 빗속에서 조용히 흘러나왔다.

세화는 피와 비로 젖어 엉망인 몸을 한 교룡에게 발을 내디뎠다.

환석의 힘을 담은 빗방울이 햇살을 담은 듯 빛을 내며 온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영력이 사라지고 있다고는 해도 환계는 환계.

힘을 가진 땅 위에선 신수로 탈피할 때 사용하는 것 외에 값어치가 없었으나, 인계에선 아니었다.

대단한 치유의 힘을 담은 이 환석들은 생명력이 사라진 땅을 치유하고, 풀을 돋게 할 것이며 병든 사람들에게 힘을 줄 터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교룡이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화의 빛에 살이 덕지덕지 녹아내려 엉망이 된 모습이었으나 살기 어린 눈빛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다 잡은 먹이를 놓친 데 대한 아쉬움만 남아 있을 뿐.

―나를 이긴 것 같지? 이건 고작 내 그림자일 뿐이야.

교룡이 번뜩이는 시선으로 거친 웃음을 흘렸다.

―그러니 즐길 수 있을 때 마음껏 즐거워하거라.

교룡이 입을 움직일수록 살점이 더더욱 빠르게 녹아내렸다. 바닥에 닿은 교룡의 살들이 검고 찐득한 액체로 변했다.

치익, 치이이익,

녹아내린 액체가 닿자 돌에 낀 이끼와 꽃들이 시들고 썩어 문드러졌다.

세화 역시 이 교룡의 모습이 그의 본체가 아닌, 영력 일부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희망을 품으면 품을수록 그것을 빼앗겼을 때 더한 절망으로 바뀔 테니.

교룡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한계까지 끌어내 사용해 보니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히 영력이 섞였다고 말하기 어려운, 뭔가 다른 힘이었다.

하여 이 힘을 계속 사용하다 보면.

그리하여 조금씩 발을 담그게 된 그 빛의 폭포에 언젠가 완전히 잠식되고 나면.

그대로 환계를 키우는 양분이 되어 저 자신을 잃어버릴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강력한 양날의 검이었다.

하지만 교룡의 빤히 응시하던 세화는 그저 웃었다.

“그래. 어디 한번 또 마음대로 해 봐.”

그리곤 저주의 말을 내뱉는 교룡을 한 발로 짓밟았다.

―크윽, 아아악!

세화의 몸을 뒤덮은 빛의 짐승이 거대한 뿔을 휘저으며 우우우웅! 산울림 같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빛과 어둠이 맞부딪치자, 낙뢰가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제단 위가 번쩍거렸다.

세화가 힘을 거두었을 땐 이미 검붉은 영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 발악처럼 남은 검은 물줄기만 돌 아래로 흘러내릴 뿐.

그것을 밟아 없앤 그녀가 더는 신경 쓸 가치가 없다는 듯 차갑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헛소리를 들어 주기엔 내 시간이 너무 귀해.”

* * *

“기우제는 시작했대?”

“글쎄, 뭔가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시작을 한 것 같기는 한데.”

“……그려.”

꾀죄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지친 시선으로 밭을 내려다보았다.

일단, 시키는 대로 마른 밭에 씨앗을 뿌리기는 했으나, 그들은 답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한들 싹이 틀 리가 없다는 사실을.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을 뻗어 땅을 짚었다. 마르고 퍼석퍼석한 땅이 살갗에 닿았다.

땅은 이미 죽어 가고 있었다.

두 발로 걸음을 걷던 시절부터 평생을 농사를 지어 온 이들이었다.

당장 비가 온다 해도 이런 땅이라면 그저 물만 약간 머금은 모래 같을 뿐.

무언가를 키워 낸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나라님이 기우제를 지낸다는 말에, 반응이 좋지 못했다.

물론 정말 비가 조금이라도 내린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나아지겠지만. 그래도…….

“……괜히 기운 빼지 말고 그냥, 지금 다시 줍는 건 어뗘?”

아내의 물음에 남자가 기우제가 열리고 있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며칠째 음식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던 터라 이렇게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아내의 말처럼 그냥 낟알들을 주워 한 끼라도 먹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인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이 애들한테 그랬지. 아무리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이 보여도, 쉽게 주저앉지 말자고.”

침묵을 반복하는 남편의 왜소한 등 뒤에 대고 아내가 힘없는 목소리를 연이어 꺼내 들었다.

“그 마음 알어. 하지만 그것도 목숨이 붙어 있을 때의 일 아니겠어.”

남자가 땅을 응시했다,

자신들만 있었다면 이렇게 씨앗을 뿌리며 기운을 빼지 않고 당장에 배를 불렸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소문을 듣고 희망에 두 눈을 반짝이던 제 자식들이.

먹지 못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도 분명, 나아질 거라 믿는 아이들이.

그래서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믿는 것처럼 희망을 저 두 손에 안겨 주고 싶어서.

‘……하지만 이젠, 걷어 내야 하나.’

희망도 살아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내가 한 번 더 종용했다.

“……애들 줍시다. 희망은 주지 못하니 그 잠깐의 행복이라도 줍시다.”

당신 마음은 알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자고.

비쩍 마른 아내가 마른 밭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의 뒤에서 천천히 낟알을 주워 올렸다.

아내가 무얼 하는지 알면서도, 남자는 쉬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것이 제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때 남자의 손등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 여보. 여보!”

순간,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아내는 고개를 치켜든 채로 하늘을 보고 있었다.

툭, 투툭.

무언가가 다시 한번 그들의 몸 위로 떨어졌다.

남자 또한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진한 먹구름이 그들의 머리 위를 덮어 가고 있었다.

비가 쏟아진 것은 오래지 않아서였다.

“아버지! 어머니!”

집의 대문이 벌컥 열리더니, 비를 발견한 조막만 한 아이들이 환한 얼굴로 뛰어나오기 시작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방방 뛰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니, 어디서 저런 기운이 났나.

제게 뛰어오는 아이들을 안아 들려던 남자가 아이들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을 때였다.

손바닥으로 젖어 드는 땅을 짚은 남자가 놀라 아래를 응시했다.

손에 움켜쥔 흙은 메마르고 모래 같았던 땅이 아니었다.

가뭄이 오기 전처럼 기름지고 비옥했던…….

혹시 꿈이라도 꾸는 건 아닐까.

망연히 땅을 응시하던 남자는 곧 자신들이 뿌렸던 낟알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굳어졌다.

그들이 뿌렸던 씨앗에 싹이 돋고 있었다.

어떻게? 대체 어떻게.

남자가 멍하니 마른 대지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았다.

빗방울 사이사이로 반짝반짝한 빛 조각들이 섞여 있었다.

환한 빛을 담은 물방울이 지면에 닿으며 빛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퍼져 가던 빛은 이내 한낮처럼 환하게 세상을 물들였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내다보던 사람들도 문을 열고 뛰어나왔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소리도 내지 못하고 흐느꼈다.

누구 하나 알려 주지 않았으나 모두 알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깜깜한 어둠은 이제 끝이 났다는 걸.

빛이 스민 빗줄기가 닿을수록 병들어 마른 팔뚝이 이내 건강한 혈색을 되찾았다.

온 땅에 푸릇푸릇한 싹이 돋았고, 말라 가던 나무가 힘을 얻어 가지를 뻗고 어린잎들을 틔워 냈다.

“흐으, 흑. 흑.”

손으로 한 움큼 흙을 움켜쥔 누군가가 숨을 들이켰다.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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