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254)

정치화가 눈만 황망하게 끄덕였다.

갑작스레 돌아온 친구를 만난 이 상황이 현실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눈앞에 있는 이가 그 친구가 맞는지도 잘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 볼 땐, 나 좀 달라져 있을 거다?”

그렇게 덧붙였던 말을 실천하듯 외형이 너무 많이 달라졌던 것이다.

‘어떻게 고작 몇 달 만에 이렇게 변하지?’

분명 눈을 보면 세화라는 걸 알겠는데 시선을 잠시 다른 곳으로 옮긴 것만으로도 다른 이가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마음을 안다는 것처럼 세화가 피식 웃었다.

다시 한번 “가자.” 하고 재촉하며 정치화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정치화는 마치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저를 부축하는 사람을 따라 걸었다.

* * *

“아, 앉아. 그런데 내줄 수 있는 게 없어…….”

“괜찮아. 그런 건 상관없으니 너도 앉아.”

친구는 마치 제집처럼 앞장서 정치화를 예조판서의 저택으로 데려왔다.

와서도 대체 어떻게 안 건지 치화의 방을 한 번에 찾아 들어가서는, 자신의 집처럼 편하게 맨바닥에 앉은 채 권했다.

정치화도 엉거주춤 친구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너…….”

정치화가 차근히 응시할수록 더욱 낯설어 보이는 친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세화, 맞지? 맞는, 거지?”

“응. 나야.”

“한데 얼굴이…….”

“그렇게 됐어. 그나저나 곡식은, 약초는 준비해 두었어? 왜 울고 있었어?”

“응?”

“아까. 거기서 왜 울고 있었냐고.”

“??”

정치화는 세화가 묻는 질문의 의도를 몰라 잠시 또 눈만 껌뻑였다.

이 저택이 내 아버지의 저택이라는 것도 알고.

내가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도. 내 방이 어딘지까지도 알면서 내가 왜 울고 있었냐고 묻는다고?

사람들이 모두 예조판서 정승택에 대해 떠드는 걸 듣지 못했다고?

“왜 그랬는데. 치마는 왜 입고 있고. 남장은 그만뒀어? 뭔가 문제가 생기기라도 한 거야?”

“…….”

망연히 목만 고르던 정치화가 뭔가에 홀린 듯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세 번의 기우제를 치르셨고 실패하여, 이제 그 대가를 치르셔야 할 거라고.

혜류강까지 말라 버린 이상 처벌은 절대로 피해 가실 수 없을 거라고.

네가 가뭄에 대해 미리 알려 줬는데 내가 잘 대비하지를 못했다고.

곡식과 약초도 너무 함부로 풀어 버려서 얼마 남지도 않았고 앞으로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고.

그 몇 가지 대답을 꺼내 놓는 데도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렀다.

마치 이르는 것처럼 울먹이며 대답하고 있을 때였다.

쾅! 쾅!

문 밖으로 큰 소리가 연이어지며 많은 사람들의 발소리가 분주하게 흩어졌다.

“나오시오! 당장 죄인 정승택은 당장 나와 어명을 받으시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정치화가 그 목소리를 듣고 얼어붙었다.

“어, 어명?”

그녀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문을 걷어차 열고 저택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온 수많은 관인들이 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곳곳을 헤집고 있었다.

“아, 저, 저 여잡니다! 저 여잡니다!”

그때 누군가 정치화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정치화도 그 사내를 알고 있었다.

그녀가 여러 개의 우물을 팔 때 고용했던 치수사였다.

그 사내의 외침에 주변 전각들을 뒤지던 관인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누군가 다가와 정치화의 앞에 서며 물었다.

“네가 예조판서 정승택의 딸 정치화냐?”

“……네. 그렇습니다.”

“몇 달 전 저 사내를 만난 적이 있고? 사내 복식을 한 채 저 사내를 시켜 우물 자리를 찾게 했다는 것이 맞느냐.”

“…….”

“맞느냐고 물었다.”

“마, 맞습니다.”

“뭣들 하느냐! 당장 포박하여 끌고 가라!”

“네, 네? 잠시만요! 잠, 잠시만요!”

겁에 질린 그녀가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이라도 듣고 싶어 외쳤으나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는 이가 없었다.

저택의 하인들은 감히 관인들의 일에 나서지 못했고 그녀가 우물을 파도록 지시했던 사내는 연신 그녀가 맞다고 소리치고 있었으니까.

새빨간 포승줄이 옷 위로 틀어 매였다. 여린 살을 짓누르며 단단히 파고 들었다.

두려움에 멈췄던 눈물이 다시 터져 나왔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미리 가뭄을 대비했던 것이 들켰구나. 이제 또 이 가뭄이 예조판서의 짓이라며 난리가 나겠구나.

“당장 끌고 가라!”

그 명령을 따라 치화를 줄로 포박한 관인이 겁먹어 굳어진 그녀를 억지로 잡아끌 때였다.

“잠깐만 기다리지 그래.”

어떤 낭랑하고 맑은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누군가는 감히 관아의 일에 참견하는 이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누군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

그리고 잠시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향한 이들은 모두가 그곳에서 돌이 된 듯 멈춰 버렸다.

사람들의 반응에 뒤늦게 시선을 돌린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마저 우레처럼 들려올 정도로.

마치 그곳만이 다른 세상이 된 것처럼 무엇으로도 깰 수 없을 지독한 고요가 사람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 정적 사이를 세화가 가볍게 걸었다.

바짝 마른 땅 위를 자국도 내지 않고 걷는 발걸음은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 가벼웠고 다가오는 움직임은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걸음걸이는 당당하면서도 우아했고 이 많은 관인들을 앞에 두고도 조금의 두려움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유려한 모습으로 제게 다가오는 상대를, 치화 역시도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게 굳어진 시선으로 멍하니 응시했다.

‘……저건, 또 ……누구지.’

친구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도통 믿어지지 않았다.

조금 전 다시 만났을 때도 알던 것과 외형이 많이 달라져 있었는데, 지금은 또 다른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 아이라고?’

아까까지는 분명 단정하게 묶여 있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지금은 길게 풀어 헤쳐져 있었다.

허리 아래로 늘어져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는 모습은 양반댁 규수라면 생각지도 못할 모습이었으나 아무도 그 모습에 지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잘 어울려 머릿속이 텅 비어버릴 정도였다.

투명할 정도로 하얗게 빛나는 피부는 황위와도 바꾸지 않을, 가장 진귀한 옥과 같았고 그 피부가 만들어 내는 유려한 얼굴선은 완벽한 하늘의 조화가 담겨 있는 듯했다.

가늘게 접힌 눈의 기다란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사람들의 목이 바짝 말랐다.

한번 사로잡히면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진하게 음영 진 눈동자와 그 사이로 뻗은 작은 코. 비율이 완벽한 새빨간 입술까지.

마치 이야기 속 선계에 발을 잘 못 디뎌 천녀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충격적인 용모의 상대를 굳어진 채 바라보았다.

“일단.”

그 존재가 매혹적인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리며 서두를 띄웠다.

“내 동무를 이렇게 데려가면 내가 곤란하고.”

그녀의 말 한마디에 정치화를 억누르던 포승줄이 마치 보이지 않는 칼로 난도질을 한 것 마냥 아래로 갈라져 떨어져 버렸다.

“!”

“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지 연유부터 좀 알아야겠고.”

“으아아!”

이어진 말에 정치화를 가리키며 손가락질하던 사내가 그대로 허공을 날아 끌려왔다.

그들의 앞에 강제로 무릎이 접힌 채 꿇어 앉혀졌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믿을 수 없는 일에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사내가 당장 메마른 흙바닥에 이마를 비비며 애원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지켜보던 세화가 제게로 쏠린 시선 중 복식이 남다른 이 하나를 가볍게 응시했다.

복식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달랐던, 관인대장 이홍천이 여러 번 울대를 떨고 나서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아가씨께서는 누, 누구십니까.”

예조판서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거칠게 하대를 하던 이들이 세화를 보면서는 깍듯이 말을 높였다.

봉을 쥐고 있던 손은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였고 얼굴에는 긴장의 빛이 넘쳐 났다.

관인들은 제 상사가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깍듯이 대한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알아차렸더라도 그들 역시 별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누군지, 왜 여기 와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나 단 한 가지, 저 여성은 인세의 존재가 아니라는 그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으니까.

“그건 지금 알 것 없고. 그래서 내 동무는 왜, 어디로 데려가려 하는 것인데?”

“동, 동무요. 동, 동무분께서는 그러니까 예조판서인 정승택의…….”

“예조판서이신 정승택 나으리라고 해야지.”

“…….”

세화가 그의 말을 끊고 지적하자 다시 한번 마른침을 삼킨 이홍천이 제 말을 정정했다.

“그러니까…… 네. 제 말은 예조판서이신 정승택 나으리의 여식이신 정치화 아가씨께서.”

“응.”

“아, 가씨께서 그러니까 남장을 하고 계셨는데…… 그분이 가뭄이 본격화되기 전부터 이미 우물을 여러 개 파고 곡식을 비축하는 등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여…….”

“그 남장한 인물이 정승택 나으리의 여식인 줄은 어떻게 알았는데?”

“……아, 그러니까 그건 그 남장한 인물과 오래도록 친분을 유지하던 서적상이 있었는데 그자가 아무래도 제가 아는 인물이 예조판서 댁의 사람인 듯하다고 밀고하여.”

“그래서?”

“가뭄에 대해 미리 알고 대비하라 일러 주었다고요. 그 말을 듣고 조사하던 중 같은 인물이 그 시기 우물을 파는 등 가뭄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홍천은 제가 왜 이렇게 순순히 모든 정황을 낱낱이 털어놓게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여성이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설명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대체 누가 그런 일을 하였는지 밝히고자 예조판서 어른의 저택을 밤낮으로 감시하던 중. 그 사내와 얼굴이 똑 닮은 누군가가 여성의 복식을 하고 출입했다 하여 저택을 급습한 것입니다.”

“한데 아까 내 동무를 데려가려 하기 전에 예조판서 나으리까지 압송해 가려고 했잖아? 왜?”

“그야…… 그것은.”

“그것은?”

“……그것은.”

이 부분은 차마 설명하지 못하고 이홍천이 말을 더듬었다.

임금이 책임의 화살을 피하고자 어떻게든 예조판서의 목을 백성들의 앞에 매달기로 결정하였다고.

자극적인 광경이 펼쳐질수록 잠시나마 자신에게로 쏟아질 원망이 흩어져 나갈 거라는 생각인 듯.

어떤 작은 건수라도 잡아 무조건 예조판서 정승택을 포박해 사람들의 주시하에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관아까지 끌고 오라고 명 받았다고.

그 말을 여기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예조판서를 나으리라 부르게 하고 그의 여식을 제 동무라 부르는 이 여성의 앞에서.

그가 그렇게 껌뻑껌뻑 제 목소리만 삼켜낼 때였다.

듣지 않아도 상황을 알겠다는 듯 혼을 빼앗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의 눈꼬리가 냉담하게 휘었다.

빨간 입술이 움직이며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신 갈게.”

“……네, 네?”

이홍천이 여인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여인이 그런 그를 보며 성의 없이 덧붙였다.

“지금 당신이 내 동무를 데려가려던 곳 말이야. 거기 내가 대신 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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