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인들은 일제히 손을 내저었다.
그러실 필요 없다고. 저희가 뭔가를 착각했나 보다고.
그렇게 말해도 여인은 요지부동이었다.
죄인과 관인의 입장이 뒤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냉큼 걷지 않고 뭐하냐고 시선으로 질책하며 저택 바깥을 턱짓했다.
무뢰배처럼 저택 안을 급습했던 이들은 마치 잘 배운 학당의 학생들처럼 얌전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그 조용한 움직임을 확인한 세화가 여전히 멍하니 자신을 응시하는 정치화를 보며 픽 웃었다.
“저택에 아버지도 안 계신 모양인데. 네 아버지께도 이 저택에도 아무 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대문 잘 걸어 잠그고 있어.”
“세, 세화야. 뭘, 뭘 할 건데?”
정치화가 그때서야 정신이 든 양 입술을 떨며 물었다.
“어째서 거길 간다고 했어. 가서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걱정하지 말라니까.”
여태 젖어 있는 정치화의 볼 위를 세화가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너도 대가도 없이 나 도와주려 했잖아.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나 도와주려고 했잖아.”
세화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전낭을 건네고, 이유를 설명하려 하는 자신을 막아서던 정치화의 모습을 기억해 내며 덧붙였다.
“그러니 나도 너 도와줄 거야.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되도록 내가 해결해 줄게.”
흔들리는 치화의 시선을 마주하며 세화가 이홍천을 바라볼 때의 냉랭함은 지워 낸 채 말갛고 예쁘게 눈을 휘었다.
“그러니 나 믿고 있어. 알았어?”
* * *
“그럼 그 가뭄이 주가의 신수가 일으킨 것일 수도 있겠네요.”
그러니까 그건 세화가 제 어머니 천수아와 백기하와 함께 백가에 도착한 이후의 일이었다.
세화의 두 오라비가 그들과 합류하지 못한 채 어딘가로 달아났다는 말을 들은 백만용은 즉시 백가의 무사들을 동원해 몇 개의 별동대를 꾸렸다.
주가와 육가가 맞닿는 영지선을 탐색하다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면 안전하게 보호하며 백가로 데려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재회한 주명윤과 천수아 역시도 서로의 무탈한 모습에 안심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짧은 인사는 거기까지였다.
신영의 일을 서둘러 의논해야 했던 것이다.
백기하와 세화, 천수아는 그들이 목격한 것을 육가의 가주와 주명윤이 모인 곳에서 털어놓았다.
오랜 기록들을 떠올린 천가의 가주 역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추측에 힘을 실었다.
그 토론을 듣고 있던 세화에게 무언가가 떠오른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비가, 오래도록 오지 않았어요.”
그 말에 백기하의 주의가 먼저 날아왔고 그의 그런 모습을 따라 육가의 가주들 역시 세화를 응시했다.
“오랜 가뭄이요. 당신도 알죠?”
백기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세화의 적자줏빛 눈동자가 전생에 제가 겪었던 그 상황을 돌이켜보았다.
환계에 긴 시간 비가 오지 않은 일로 많은 생명이 타격을 입었었다. 인계는 더욱 상황이 심각했다.
전에는 그것이 죽어 가는 제 세계가 원인이라 여겼다.
인계와 등을 맞댄 채 시들어 가는 환계의 영향으로 그런 이상기후가 나타나지 않았나 생각했었던 것이다. 하여 그 재해에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지 못했다.
한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비는 태초부터 용이 다스려 오지 않았던가.
만약 살아 있다 추측되는 주가의 용이, 부정한 방법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그 교룡이 가뭄을 만들어 낸 것이라면.
“만약 그렇다면 인계로 내려가 임금을 만나 볼 필요가 있겠어.”
눈을 가늘게 접은 백기하가 말했다.
인간계와 환계를 오가는 통로의 위치에 따라, 주가 환족들은 본의 아니게 이 나라의 임금과 소통해 왔다.
하나 가문이 없는 환족을 생명 취급도 하지 않던 신영이니만큼 인간의 입장을 이해하려 했을 리가 없었다.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제 종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며 속내를 제멋대로 내뱉었을지 모르고. 그런 재해를 일으키면서도 당연한 제 것을 받아 가듯 뻔뻔하게 요구 사항을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것을 알아보러 세화가 이곳에 온 것이다.
이홍천은 그들이 압송하는 건지 그들을 압송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위치에서 앞서 나가는 여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하인 김자송이 조용히 옆으로 붙어 물었다.
“정말 저분을 관아로 모셔, 아니 끌고, 아니 데려가시는 겁니까?”
“…….”
“무슨 죄목으로요? 예조판서 나으리의 여식과 동무라는 죄목입니까?”
“…….”
“시선이 너무 쏠리고 있는데요.”
혜류강이 말라붙으며 도성의 상황 또한 도성 바깥의 상황과 그다지 다르지 않게 변해 버렸다.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픔이 극에 달한 이들은 지붕을 엮은 짚마저 뜯어다 씹을 지경이었다.
임금이 계시는 도성임에도 잠시만 방심하면 납치 사건이 일어났다.
민심이 더없이 흉흉해 관인들 역시도 범인의 색출은커녕 길을 오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예조판서를 비참한 모습으로 압박하는 일이 필요했다.
쉬이 죽이지는 않으면서 오래도록 사람들의 원망과 분풀이를 대신 받을 수 있도록.
한데 지금은 그런 사람들마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관인들에 앞서 부드러운 걸음을 내딛는 여인의 외모는 극심한 굶주림마저 잠시 잊게 할 만큼 놀라웠던 것이다.
입추가 지났다 해도 여전히 땅은 지독할 만큼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눈물로 흘릴 수분조차 없는 이들에게서 마저 땀방울을 쥐어짜고 있었건만.
그런 계절과 열기가 저 여자에겐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귀한 옥처럼 맑고 투명한 피부는 조금의 탄 자국도 없었고, 여리게 홍조가 올라온 얼굴은 마치 홀로 새 생명이 용틀임하는 봄을 살아가고 있는 듯 생명력이 넘쳐 흘렀다.
그리하여 홀린 듯 무게 없는 시선들은 세화가 가는 족적마다 따라붙어 관아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관아 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호송관에 그녀를 처넣을 수 없었던 이홍천은 그녀를 면담실로 인도해 편안하게 앉을 수 있도록 상석을 제공했다.
그녀 역시도 당연한 듯 그가 내어 놓는 자리에 앉은 채 “그럼,” 하고 운을 띄웠다.
“내가 나라님을 좀 뵙고 싶은데 어찌하면 되지?”
“……예?”
이홍천은 이리 바보같이 되묻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냉정하고 절도 있는 판단력으로 유명한 이였는지는 예조판서 정승택을 감시, 조사하는 일에 발탁된 것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사실 모르는 이가 드물 것이다. 이 가뭄의 책임이 정승택에게 돌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세상은 제 불행을 퍼부을 곳이 필요했고 임금은 제게로 향할 화살을 돌릴 곳이 필요했으니. 아무리 안쓰럽다 해도 정승택이 희생될 수밖에.
하여 그런 그를 압송하고 사람들의 앞에 세울 때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책임자가 필요했고 그렇게 발탁된 이가 이홍철이었다.
그런 이홍철을 감정 없이 응시한 세화가 한숨 같은 신음을 흘려내며 다시 물었다.
“내가. 전하를. 뵙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찌해야 하느냐. 물은 것이네.”
마치 아이에게 가르치듯 단어 단어를 끊어 말하는 태도에 모욕을 당한 것처럼 이홍철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나 감히 그런 그녀를 탓하지 못해 다시금 바보 같은 물음을 꺼내 놓았다.
“전하는 어찌하여 뵙고자 하십니까?”
경멸 어린 시선이 이홍철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은 전하께 말씀드릴 일이지 당신에게 할 말이 아닌데?”
“…….”
그리하여 이홍철은 제 상관에게 조심히 다가가 이 이상한 죄수에 대해 고했다. 상관은 몹시 화를 냈다.
“그 무슨 해괴망측한 말이냐. 그딴 바보 같은 소리가 어디 있어!”
궁 안의 분위기를 뻔히 알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릴 늘어놓는다고? 자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리 일침 하며 면담실로 들어온 상관은 세화를 발견하고서 조용히 문을 닫고 다시 나갔다.
그 상관의 상관과 그 상관의 상관의 상관 역시도 같은 말을 하며 면담실로 들이닥쳤다.
그리고 또다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들이 그렇듯 세화에 대해 고한 끝에, 오후가 되기 전에 임금은 그녀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누가 봐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그 이상한 죄수를 만나 보기로 결정하였다.
하여 세화는 해가 지기 전에 알현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여전히 제대로 된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세화를 경계하며 무관들이 곳곳에 배치되어있었다.
하나 그런 무관들조차 세화가 알현실 안으로 발을 디디던 순간 경계심은 잠시 잊은 채 눈을 끔뻑거렸다.
생전 처음 겪는 충격에 무관들이 세화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마른침만 삼킬 때였다.
“그대가 날 보자 하였나?”
임금의 입장을 전하는 상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건만 어느새 열린 장지문을 가로지르며 누군가가 조용히 입장했다.
이 궁의 주인인 반현종 성익권이었다.
세화의 눈이 어좌에 앉는 그의 면면을 주시했다.
건장한 체구와 곤룡포 밖으로도 느낄 수 있는 단단한 근육들은 눈앞의 사내가 제법 용맹한 성격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하나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푸르스름한 안색이었다.
하늘에 용서를 빌기 위해 임금도 식사를 줄였다고 하더니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볼 역시도 초췌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 밑으로는 그늘이 어둡게 드리워져 있었고 입술은 창백했다.
세화는 그 모습을 보며 그녀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 임금의 얼굴 위로, 세화와 눈을 마주치는 순간 명백한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대는 사람인가? 아니라면 정말로 하늘 위의 존재이기라도 한 것인가?”
세화는 그 말엔 무시한 채 냉랭히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는 걸 스스로도 알지 않나?”
“……뭐?”
“너도 임금이라면, 백성의 어버이를 자처한다면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이다.”
“…….”
성익권이 입을 열지 못하고 멈칫했다.
“…….”
“…….”
잠시 후 그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알현실을 빈틈없이 지키던 무관들과 내관들이 발소리도 내지 않으며 방에서 빠져나갔다.
“모두 전각 밖으로 물러나라.”
성익권이 한 번 더 명령하자 방 밖을 지키던 내관이 복창했다.
“모두 전각 밖으로 나서시오.”
알현실 주변과 그 너머 복도에서도 인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조용한 그 공간 안에서 세화는 당황한 듯 긴장한 듯 펄떡이기 시작하는 임금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초조한 듯 곤룡포 안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던 그가 약간의 두려운 기색을 담아 세화에게 다시 물었다.
“귀, 인은 누구십니까. 혹 지금 이 나라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아시는 겁니까.”
“알지.”
가볍게 인정한 세화가 차게 그를 응시했다.
“누군가 뭔가를 이루기 위해 사람들의 생명을 요구했고, 네가 그 일에 동의해 제 백성의 생목숨을 깎아 내고 있다는 걸 왜 모를까.”
“……!”
성익권이 입술이 조금 떨렸다.
두려움 섞인 헐떡거림이 얇고 색이 없는 입술 사이를 가늘게 빠져나왔다.
“어찌, 아시고 오셨습니까. 그분들과 같은 곳에 계시는 분이십니까?”
“그분들?”
한쪽 눈썹을 치켜든 세화가 바닥을 내리쳤다.
탕!
“정신 차리거라! 네 자식들의 생목숨을 요구하는 짐승들에게 굴복해 이 상황을 만든 것만도 한심하거늘. 그런 치들에게 임금이란 자가 말을 높여?”
분노한 그녀의 주위로 오색의 영력이 휘몰아쳤다.
절대로 몰라볼 수 없는,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짐승들과는 완전히 다른 그 신령한 기운에 성익권이 어좌를 박차고 내려왔다.
이 가뭄의 원인이 무언지 이미 알고 있던 임금은 하루하루가 불밭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더불어 그는 기실 정승택을 사람들 앞에 희생양으로 세우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러지 않고는 분노한 백성들의 손에 제가 먼저 끌려 나갈 판국인데, 그가 이 자리에서 사라지면 그를 위협한 짐승들은 누가 막아 낼 것이란 말인가.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이 지옥을 빠져나갈 방도를 일러 주십시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대한 죄책감에 오래도록 시달려 온 그가 세화의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그런 성익권의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던 세화가 물었다.
“방도를 일러 주면, 그것을 지킬 생각은 있는 것이냐? 네 백성의 목숨을 뽑아내는 일을 당장이라도 멈출 의지가 있어?”
“물론입니다.”
“그것이 네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일이라 해도?”
성익권이 창자를 끊어 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씀처럼 제 자식들의 목숨조차 지키지 못하고 있던 아비입니다. 어찌 자신의 목숨만을 아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