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3월 초. 입춘과 우수가 지나고도 한참 만에야 첫 봄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새해의 새봄이 다가오는 신호로 여기며 기쁘게 여겼다.
4월. 곡우에도 부스스한 안개비만 몇 차례 지나갔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흩어지듯 흩뿌려지고 그쳤기에 그것을 비라고 불러도 될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5월.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않아 사람들의 불안이 컸다. 소만이 되었음에도 물이 충분치 않았으나, 시기를 놓칠까 봐 걱정된 사람들의 손이 분주히 경작을 시작했다.
6월. 낮이 길었다. 날이 무더워지며 우물이 빠르게 마르기 시작하였다. 벌써 두 달 넘게 비가 오지 않은 일로 사람들의 불안이 컸다.
7월. 뜨거운 태양 아래에 도성 주변을 흐르는 내가 돌바닥을 하얗게 드러냈다.
밭의 흙은 물기가 없이 버석버석했다.
우물은 두레박을 한참을 내려야 물을 뜰 수 있었고, 치솟기 시작한 묵은 곡식값이 빠르게 치솟아 하늘과 맞닿고 있었다.
8월. 입추와 처서가 지났음에도,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이 막힐듯한 더운 날씨가 이어졌다.
여전히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고 쌀과 약초는 금과 같았다.
도성 바깥의 상황은 특히 더 좋지 않았다.
마을이 함께 쓰는 우물은 벌써 바닥을 드러냈고, 마실 물이 없어 짐승의 목을 잘라 피를 받아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도성 주변을 지나치는 혜류강 역시 강바닥을 드러냈다. 그 많은 강물을 삼키고도 하늘은 자비 없이 청명하기만 했다.
9월. 사람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제는 짐승을 잡을 수 있는 것조차 행운이었고, 먹을 것이 없는 이들이 산을 온통 벗겨 먹었다.
배고픔이 극에 달한 사람들의 눈빛이 흉흉했다.
어수선한 민심을 바로잡기 위해 임금은 예조판서 정승택을 시켜 세 번의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으나 조금의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매일매일 불같은 열기를 태워 댔다.
* * *
정흥생은 내실 안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붓이 움직일 때마다 얇은 창호지 위에 완급이 선명한 선들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생겨났다.
애틋하게 서로를 끌어안은 두 남녀가 하얀 종이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미리 그려져 있던 선을 따라 그리기라도 하듯 손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하지만 붓을 고정한 손끝이라든가 시선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처럼.
뭔가를 잠시 잊거나 자신을 뒤흔드는 불안을 잠재우고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그때 누군가가 그 내실 안으로 황급히 들어왔다.
“아씨!”
“어떻게 되었느냐!”
“책, 책임을 면치 못하실 거랍니다!”
“뭐?”
정흥생이라는 가명을 쓰며 남장을 하고 있던 정치화가 황급히 붓을 집어던졌다.
“말이 되느냐? 대체 가뭄이 왜 내 아버지의 책임이란 말이냐! 하늘께서 땅을 바짝 말리시기로 한 것을 내 아버지가 한낱 인간의 힘으로 대체 어떻게 하라고!”
“어, 어쩌죠. 세 번의 기우제를 실패한 책임을 모두 지시려면 귀양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아씨, 이러다 주인어른께서 잘못되시면 어찌합니까. 식구들이 모두 연루되는 걸까요?”
“이판께서는? 그분은 별말씀이 없으셨다더냐? 아버지를 비호하지 않으셨대?”
정치화의 다그침에 몸종인 춘영이 울상을 하고 대답했다.
“나라님께서 결정하신 일을 이판께서 어찌하시겠어요. 그분도 혹시 엮여 들어갈까 봐 대문도 닫아걸고 전전긍긍하시는 모양이십니다.”
비가 오지 않기 시작한 지 반년.
봄과 여름내 자란 푸르른 것들의 수확을 기대해야 할 시기에 땅은 전부 비쩍 말라 갈라져 버렸다.
자라지 못했음에도 모두 거둬져 한 줌 식량의 역할을 한 올해의 곡식들은 완벽한 지옥이 펼쳐질 겨울의 재앙을 예견하고 있었다.
도성 안에서야 그나마 상황을 걱정한 양반들이 여유분 안에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비가 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죽하면 혜류강이 다 말라붙었는데도 견딜 수 없도록 뜨겁고 건조한 날만 이어지고 있으니.
도성이라 하여도 다른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아 희망이라고는 없는 것이다.
세 번의 기우제가 모두 실패한 지금에 와서는 더더욱.
게다가 임금께서는 백성들이 자신의 덕을 의심하기 전에 기우제를 준비한 신하의 목을 죄어 책임을 피하기로 한 듯했다.
그러니 아버지에 대한 처벌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정치화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뭘 하면 좋을까.
하지만 자신이라고 별 수 있나.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일단 제 아버지를 위해 목소리를 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일단 만나야 한다는 것뿐.
“내가 이판 대감을 만나 뵈어야겠다. 옷을 내오거라.”
“아이고 아씨. 절대 안 됩니다. 지금 담장 밖이 얼마나 흉흉한지 아십니까. 오죽하면 주인어른께서 아가씨를 데려다 이곳에 가둬 두셨는데요.”
춘영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사람들의 눈에 독기가 가득해 시커먼 장정들도 몸을 사리며 다녀야 합니다. 잔뜩 굶주린 이들 천지라 지금은 옆집 사는 사람들을 잡아먹기 일보 직전이라는 걸요.”
“그거야 도성 밖의 이야기겠지. 도성 안은 아직 내 아버지에게 책임을 돌릴 여력이 있으니 상관없다. 어서 옷을 내와!”
“아가씨, 다시 생각하십시오. 괜히 나가셨다가 예판 대감 댁 아가씨라는 것이 알려지면 큰 곤욕을 치르실 수도 있습니다.”
끔찍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도성 사람들에겐 희생양이 필요했다.
먼저 책임을 돌리거나 불만을 표출할 수 없는 나라님을 탓하는 대신, 도성 사람들은 기우제를 실패한 예판을 향해 적의를 불태우기로 한 것이다.
그런 상황이니 춘영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 집안이 이대로 풍비박산 나는 것을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그 말에 시녀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상을 한 채로 발만 동동 굴렀다.
“아가씨가 밝히시기 싫어하신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고 있는데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곡식을 풀고 물을 나눠 주던 그 사람이 아가씨였다고 밝혀 보시는 건 어떠세요?”
“뭐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정말로 큰일이 나는 걸 보고 싶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신 거니까 전하께서도 그걸 아시게 되면 주인어른께 내리실 처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주시지 않을까요?”
“내가 어떻게 그 많은 곡식과 약초들을 비축했냐 물으신다면? 그러면 뭐라 대답해야 하느냐.”
“네?”
“절대 그런 말을 하지 말아라. 그러다 정말로 이 가뭄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게 왜 큰일인지 ……저는 정말 모르겠어서…….”
“기우제가 실패한 것을 내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데, 내가 미리 가뭄을 대비해 우물을 몇 개나 파고 곡식을 비축했다는 것이 알려져 보아라. 이 가뭄조차 우리가 만들어 낸 것으로 말이 퍼지지 않겠느냐!”
“앞으로 반년은 비가 오지 않을 거야. 반년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우물은 최대한 깊게 파야 해. 어떤 상황에서도 마르지 않게. 약초도 마찬가지야.”
이 말을 정치화에게 해 준 친구는 그녀가 본 중 가장 특별한 이였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그 외모 말고도. 몇 번 몰래 보게 된 이상한 능력들 말고도.
가끔 내비치는, 마치 자신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밖에 들리지 않는 이상한 속내들 말고도.
그 친구가 거기 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만들어지는 어떤 이질감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말을 주의 깊게 듣고 대비책을 꼼꼼히 실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치화는 그 말을 듣고 난 이후 곡식과 약초를 잔뜩 사들였다.
쉬이 들키지 않을 곳에 물길을 찾아 우물 역시도 몇 개나 파 두었다.
하지만 그녀는 집을 나온 상태였고 춘화를 그려서 모은 돈은 많다 해도 한계가 있었다.
여러 개의 우물을 준비하고 나니 충분히 만족할 만큼 곡식과 약초를 준비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허황된 말을 믿어 달라 퍼뜨리며 다른 이들 역시도 가뭄에 대비하게 만들 수도 없었고.
‘그래도 빚을 내서라도 더 준비했어야 했는데…….’
한 번도 가뭄을 경험해 본 적 없는 그녀는 반년의 가뭄이 그저 막연하기만 해 상황이 어디까지 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세화의 충고가 있었던 것은 이미 4월의 안개 같은 봄비 이후로 계속 비가 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 역시도 도성 안의 상황은 지나치게 평화로워 위기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하여 가뭄이라 인식되고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섣불리 곡식과 물을 풀었던 것이다.
더 힘들고 지옥 같은 날들이 남아 있을 줄도 모르고. 그때를 대비해 비축물품을 아끼며 신중하게 일을 처리해야 했던 것도 모르고.
‘세화가 반년이라 했으니 곧 비가 오긴 할 텐데.’
하지만.
“가뭄이 지난 다음엔 폭우가 쏟아질 테니까. 그럼 전염병이 창궐할 거야.”
곡식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약초 역시도 돈이 있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올해는 수확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세화가 말한 폭우 후의 전염병과 긴 겨울. 다음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 때까지의 시간들을 이제 무어로 버틸 것인가.
흥생의 복식을 벗고 치마로 갈아입는 정치화의 안색이 새까매졌다.
하나 지금은 먼 곳의 일보다 당장 코앞에 닥친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던 그녀가 춘영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하인들을 대동한 채 이판의 저택으로 향했다.
* * *
“그만 돌아가시지요, 아씨. 몇 번을 말씀 주셔도 지금 저희 주인어른께서는 아무도 만나 뵙지 않으십니다.”
“소식만이라도 전해 주시게. 자네도 내 아버지와 이판 대감께서 얼마나 돈독히 지내셨는지 잘 알 것 아닌가.”
“하나 그것도 그분께서 연이어 기우제를 실패하시기 전까지의 이야기 아니겠습니까요.”
“……뭐야?”
“그렇잖습니까. 지금 민가에서는 예판 대감께서 하늘에 단단히 밉보인 것이 아니냐는 말들이 돌고 있는데.”
문을 막아선 하인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덧붙였다.
“거기다 나라님이 그분을 이미 엄하게 책망하시기로 결정을 내리셨는데, 감히 친분을 이어 가며 책임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정치화는 기가 막혀 입만 벌렸다.
분한 마음에 책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재앙이 일개 한 사람의 잘못을 벌하시는 것이겠느냐. 책망할 거면 나라님의 부덕함을 탓해야지 어찌 그것이 내 아버지의 책임이 돼!”
그 말에 하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어찌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감히 전하를 탓하시다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아가씨를 역심을 품은 죄로 관가에 고발해도 상관없으시겠습니까?”
하인이 목소리를 낮추며 충고했다.
“그 댁 어른과 저희 주인어른의 그간의 친분을 보아 제가 이 정도라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가씨께서도 더는 괜한 소란 일으키지 마시고 얼른 돌아가십시오.”
“이보게!”
“그리고 감히 조언 드리건대 관병들의 습격이 있기 전에 조금의 패물이라도 미리 숨겨 놓으십시오. 그런 거라도 있어야 지금 이 시기에 죽이나마 며칠 더 드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기가 막힌 응대였으나 임금이 제게 돌아올 비난과 책임을 피하려 제 아버지를 희생양으로 내세우기로 한 순간부터 다른 미래가 없긴 하였다.
혹여 역모로 몰리기라도 할까 봐 단번에 왕을 탓하지 못한 이들은 임금을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의 아버지를 공격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니 이것은 방법이 없는 일이었다.
정치화는 포기하지 않고 평소 아버지가 두텁게 친분을 쌓았던 이들을 만나기 위해 민심이 흉흉해진 거리를 열심히 돌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평소엔 제 아비와 일생의 동지를 자처하며 함께 어울렸던 어떤 이도 그녀를 만나 주지 않았다.
그뿐이랴. 오히려 이 시기 누가 가장 확고히 그와 관계를 단절하는지를 내보이고 싶은 것처럼 정치화를 격하게 내쳤다.
험하게 밀어젖히고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도록 소리소리 지르며 그녀를 모욕했다.
적의 어린 시선들이 곳곳에서 그들을 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흙바닥에 엎어진 그녀를 춘영조차 다가와 부축하지 않았다.
“…….”
바싹 마른 흙을 움켜쥔 정치화의 턱이 벌벌 떨렸다.
당장의 비참함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로 이 상황에 대한 책임을 억울하게 뒤집어쓰고 식솔 모두가 명을 달리할 수도 있겠구나 싶어 완연히 겁이 난 것이다.
가뭄이 올 걸 알고 있었는데. 그 이후의 상황도 이미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대체 이 정보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는 더욱더.
지저분한 그녀의 얼굴 위로 눈물이 쏟아졌다.
너무 두려웠다.
춘영의 말처럼. 그나마 남아 있는 곡식만이라도. 약초만이라도 나라에 바치고 선처를 부탁해 볼까, 하는 얄팍한 방법밖에 더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녀도 아직 어린 나이였던 것이다.
“어허어어엉.”
정치화가 그렇게 흙바닥에 엎어져 울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런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흙 묻은 그녀의 치마를 털고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의 몸을 지탱했다.
춘영이겠지. 그리 여긴 정치화가 너도 내게서 물러나라며 손을 치우려 할 때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돌아가자.”
생각지 못한 음성에 정치화가 눈을 번쩍 떴다. 지저분한 얼굴 위로 젖은 눈을 깜빡이며 제 앞에 있는 사람을 확인했다.
“……세, 세화……야?”
나중에 보자며 어딘가로 사라졌던 친구가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