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갑자기 결혼?!
고민이 길었지, 진행은 빨랐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콘스탄틴은 다음 날 바로 결혼 발표를 해버렸다.
사교계를 비롯한 황도가 발칵 뒤집혔다.
“…….”
물론, 집도 발칵 뒤집혔다.
왼쪽부터 아버지, 세이지, 유모.
사고를 거나하게 치고 나서 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여럿의 매서운 시선을 받고 있자니, 사이나는 식은땀이 송글거리는 기분이었다.
심지어 제일 오른쪽 끝. 욜리까지 합세해서 그녀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꼬리를 탁탁대고 있었다.
“결혼 안 하고 이 아비와 영원히 산다 하지 않았느냐!”
영원히…라는 단어까지 썼던가 싶지만 비슷한 말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저번에는 마음에 둔 남자가 있냐고 물어보지 않으셨어요?”
“정말로 결혼을 할 줄은 몰랐지!”
말만 하면 곧바로 그쪽 집안에 혼담이라도 넣을 것처럼 하지 않으셨나요…….
“사야, 그렇게 먼 곳으로 널 보낼 수 없어! 가까이 사는 놈도 많잖아!”
세이지가 외쳤다. ‘놈’이라는 단어는 그렇다 치고…….
“뭐가 멀다는 거야?”
“크레이머 령이 얼마나 먼지 알아? 오가는 것만 한 달은 걸릴걸!”
사이나는 워프 게이트 이야기를 해줬다. 공작님들이 귀찮을까 봐 비밀로 하는 거라고 했으니까, 가족에겐 말해도 되겠지.
“……그런… 사기적인…….”
듣고 세이지도 어이없는지 잠시 멍해졌다.
“컁! 컁컁컁! 캬아아앙!”
욜리도 방방 뛰며 뱅글뱅글 돌아댔다. 온몸으로 마음에 들지 않음을 표시하고 있었다.
“…….”
새삼스럽지가 않다. 욜리는 그녀가 콘스탄틴을 만나고 올 때마다 저랬으니까.
“아가씨! 그렇다고 어찌 우리 쪽에 언질도 없이 이리 발표를 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요! 도둑장가를 가는 것도 아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그녀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궁색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데, 갑자기 집사가 찾아들었다.
“백작님. 크레이머 공작 각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갑자기? 사이나에게도 예고하지 않은 방문이었다.
‘수습하러 온 건가.’
그녀의 동의도 없이 사고를 쳤으니, 어쩌면 당연하긴 했다.
그리고 십 분 후.
“…….”
“…….”
아버지, 세이지, 유모, 욜리의 못마땅한 시선을 감당하는 사람은 이제 사이나가 아니라 콘스탄틴이 되었다.
심지어 아까보다 심했다.
불손하게도 아버지와 세이지가 팔짱을 낀 채 ‘어디 변명을 해 보시지.’라는 태도를 공작에게 취하고 있었다.
유모는 태도 자체는 공손했으나 표정이 매우 불순했으며, 욜리는 꼬리를 탁탁 치는 것으로 부족해 뒷다리까지 탁탁 치며 콘스탄틴을 노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먼저, 사과를 드리지요.”
콘스탄틴이 작위를 떠나 사위된 자의 포지션을 취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드보프 백작을 위해서인지 경어까지 썼다.
“제가, 사이나 영애에게 마음이 있어 청혼을 했고 다행히도 그녀가 받아 주었습니다.”
…음?
먼저 청혼을 한 게 콘스탄틴은 아니지만 사이나의 체면을 생각해 그가 적당히 각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쪽에 언질도 없이 바로 발표를 해버리시면 어찌 합니까!”
드보프 백작이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래, 그 점은 나도 당황스럽다고요.’
“각하께서는 대단한 분이시지만… 사실 지위가 높은 남자보다 제 딸이 좋아하고, 제 딸을 아껴주는 남자에게 보내고 싶은 것이 아비 된 제 입장입니다.”
“…….”
사이나는 놀랐다.
아버지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대놓고 공작에게 불만을 표할 정도로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기분이 매우 이상해졌다.
‘근데 나는 전생에…….’
좋아하지도 않고 나를 아껴주지도 않는 남자와 억지로 결혼해서 그리 비참하게 살았으니… 아버지는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새삼 또 지난 시간에 대한 참담함이 몰려왔다.
“후,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백작의 말에 콘스탄틴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이나, 그녀에게 제 작위는 그다지 큰 매력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넌지시 건네 오는 콘스탄틴의 시선을 받으며 사이나는 몸을 굳혔다.
‘…뭔 말을 하려고.’
“사이나는 아주 매력적이고…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라도 제 마음을 받아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으음?
“지금도 사실, 꿈만 같아서… 서두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음. 사야가 좀 그렇긴 하지.”
세이지가 중얼거렸다.
‘오라버니는 또 왜 저래?’
“그간 제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녀의 근처를 맴돈 것은 아시겠지요.”
콘스탄틴은 목이 탄다는 듯 제 앞에 차려진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혹시 저번 전시회 때 그게 그럼…?”
그사이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알아냈다는 듯이 세이지가 눈을 번뜩였다.
“그렇습니다. 사실, 드보프가의 역사를 내가 알아 무엇 하겠습니까.”
콘스탄틴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응수했다.
“하…. 역시!”
세이지는 예상한 것이 맞았다는 듯 손바닥으로 제 허벅지를 쳤다.
“그럼 매주 수요일의 만남도 그겁니까?!”
“…그건, 정말 사이나의 아를어 실력을 높이 사서…….”
세이지의 집요한 눈빛에 콘스탄틴이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사심도 있었지요.”
“하! 황도에 이리 오래 머무시는 것도요?”
“사이나 때문이 맞습니다.”
…으으음??
‘아니, 대체 이 남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보아하니 사이나를 생각해서 자신이 프러포즈한 것으로 입장을 바꿔 말해주려고 저러는 것 같기는 한데, 너무 심하게 오글거렸다.
“그, 그럼… 설마…… 폭설 때도?!”
뭔가 갑자기 생각이 났는지 찻잔을 들다가 덜컥거리며 백작이 물었다.
“설마… 일부러 집에 안 보내신 겁니까?!”
“…….”
아니, 거기서 입을 다무시면 어떻게 해요!
사이나는 어이가 없어져 콘스탄틴을 노려보는 드보프가의 행렬에 합류했다.
“우리 사야에게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캬아아앙!”
갑자기 욜리까지 합세해서는 비명을 같이 질러댔다.
“…….”
갑자기 골치가 아파져 지끈거리기 시작한 이마를 짚으며 사이나가 고개를 숙였다.
그게 세이지에겐 또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켰는지 속삭이듯 그녀에게 묻는다.
“사야, 혹시… 네가 원치 않는… 그, 뭔가… 그런 게 있어서 그, 그런 일 때문에 그런 거면…….”
“…….”
“…무슨 일 있었어? 이 오라비에게만 살짝, 말해도 돼, 응?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오라비가 막아 줄 테니까.”
“아니거든!”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세이지의 오해가 끝 간 데 없이 깊어지는 거 같아서 사이나가 외쳤다.
물론… 이런저런 일들이 있기는 했지만! 강제로 무슨 일을 당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그런 거지같은 상황 때문에 결혼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고!
“아무리 공작이라도 네가 원하지 않으면….”
“원해!”
“뭐?”
“내가 원하는 거야, 내가 좋아서 결혼하는 거 맞아!”
“…….”
“…….”
의견 표출이 너무 격렬했던 걸까.
사이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내가 무슨 말을!’
입가의 미소를 띤 채 묘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콘스탄틴과 눈이 마주치자 사이나의 얼굴이 급속도로 달아올랐다.
“그렇습니까, 사야?”
“…….”
‘내가 원하는 거야, 내가 좋아서 결혼하는 거 맞아!’ 방금 제 입에서 나간 말이 귓가에서 몇 번이고 반복 재생이 되며 더 붉게 달아올랐다.
“기쁘군요. 나도 그래요.”
느른하게 눈을 접으며 그녀를 향해 웃는 콘스탄틴의 얼굴을 보며 사이나는 발개진 얼굴이 곧 퍼엉- 하며 터질 것 같았다.
“…….”
“…….”
“…….”
“……큐.”
아버지와 세이지, 유모 모두 입을 다물며 잠시 침묵이 흘렀다. 비슷하게 침울한 얼굴을 하고 말이다.
욜리는 앞발에 턱을 대며 엎드려 힘없는 목소리를 내고는 올망졸망한 표정을 하며 사이나를 올려다보았다.
“…흠. 어여쁜 딸을 결혼시키시려니 서운한 심정은 이해합니다. 최대한, 자주 황도를 오갈 수 있도록 할 테니 걱정 마십시오.”
이쯤 수습을 할 때라고 생각했는지 콘스탄틴이 말했다.
“…일 년에 절반. 반년 정도는 황도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허락을 하는 대신, 드보프 백작이 조건을 걸었다.
어떻게든 결혼이나 해서 헤베타를 면할 생각이나 했지, 그 외에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사이나가 아버지의 의견에 약간 놀랐다.
‘황도에 그리 오래 있어도 되나?’
4대 공작가는 마수 문제 때문인지 죄다 영지 기반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 일찍 시집보낼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니, 결혼을 안 할 거라 해서 그리 믿고 있었거늘…….”
“…….”
또다시 침울해진 드보프 백작을 보며 콘스탄틴이 몸을 굳혔다.
사이나도 뭔가 큰 죄를 지은 기분이 들어 허리를 바로 세웠다.
“큐우우…….”
음울한 욜리의 추임새가 더해지자, 백작의 눈매는 더욱 슬퍼졌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염려 놓으십시오, 백작님.”
‘…정말요?’ 빈말로 약속을 하는 타입이 아닌 게 분명한 공작인지라, 사이나는 깜짝 놀랐다.
“그럼, 결혼식 세부 사항들은 빠른 시간 안에 의논하도록 하시지요. 오늘은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백작은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잠시 사이나와 이야기 좀 나누고 가겠습니다.”
“…둘이서요?”
하지만 콘스탄틴의 요청에 다시 눈매가 뾰족해졌다.
“…예. 둘이.”
“단, 둘이요?”
“…….”
더 매서워진 백작의 표정에 콘스탄틴이 침묵했으나, 요청을 회수하지는 않았다.
그에 사이나가 작게 한숨을 쉬며 나섰다.
“아버지.”
“아버지라니! 시집간다고 벌써부터!”
“…아빠.”
“크흑.”
“먼저 나가셔도 괜찮아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얘야.”
드보프 백작은 얼굴을 가까이 가져오더니 그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작위를 떠나 모든 남자는 짐승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