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칼리고 일생의 소원, 기각
순식간에 넓은 정원을 통과하며 공중정원에 도착했다.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그녀의 모습도 더 선명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위치상 석단 위의 뒷모습만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이나 너머로 다른 색의 드레스 자락이 보였다.
‘여자. 그럼 황자는 아닌가? 그런데 왜 위험 신호가…….’
그는 잠시 속도를 늦췄다. 그가 끼어들어도 되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그는 깜짝 놀랄 상황을 맞닥뜨려야만 했다.
“…사이나!”
사이나가 달려드는 여자를 붙잡았는데 그 손에서 금속 특유의 빛 반사가 잡혔다. 날붙이가 틀림없었다.
‘미친!’
아까 잠시나마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속도를 폭발적으로 올리며 그는 칼리고의 힘을 쏘아 보냈다.
‘안 돼!’
그가 완전히 다다르기 전에 그녀의 몸이 난간 너머로 넘어오는 것이 보였다.
작은 몸이 허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는데, 그의 심장도 함께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칼리고오!!’
그는 최대한으로 힘을 개방하며 그녀 쪽으로 그물을 펼쳤다.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받아내야 한다.
콘스탄틴의 주변에 기운의 폭풍이 일어날 정도로 끌어 올려진 힘이 폭주했다.
* * *
“미친 건가.”
떨어지는 사이나를 받아든 그는 바로 공중정원 위로 몸을 날렸더랬다. 그리고 거기서 헤베타를 발견했다.
황자가 아니라고 했더니 헤베타라?
황성에서 살면 다 머리가 돌기라도 하는 걸까?
“히끅.”
그녀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를 돌아 도망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꺄아아악! 싫어-!”
그림자로 헤베타를 결박시켜 가둬버렸다. 그녀는 제 손조차 보이지 않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가둬졌다.
소리도 시각도 모두 차단된 그곳에서 헤베타가 떨며 울부짖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콘스탄틴은 개의치 않았다.
사이나가 공중에 떠 있던 모습이 뇌리에 박힌 것 같았다. 아직도 심장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다.
‘감히…….’
콘스탄틴에게서 퍼져나오는 스산함에 칼리고조차 입을 다물었다.
“이거, 인적 드문 후원에 잠깐 숨겨둬.”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으나 사이나가 먼저였다.
헤베타를 처리하는 동안 사이나를 잠시 황성에 맡기고 어의를 부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으나, 미덥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헤베타를 정식으로 넘기고 재판을 받게 해야겠지만, 역시나 미덥지 않았다. 황족 체면이 엮이면 유야무야 넘어갈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아니, 황자를 못 믿겠다.
이 사건을 빌미로 황자가 증인이니 대질이니를 빌미삼아 사이나를 자꾸 황궁에 불러들일 것이 뻔했다.
어차피 파혼 직전의 헤베타. 보아하니 독단적인 범행인 것 같고, 여태 본 황자의 성향이라면 이 여자가 사라진다고 해서 크게 반응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림자에 갇혀 있는 시간은 사방에 끈적한 어둠이 달라붙은 것처럼 매우 공포스럽고 끔찍할 테지만.
‘자업자득.’
그가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 * *
파르르.
눈꺼풀이 짧게 떨리더니, 그녀가 깨어났다.
몽롱해 보이는 눈은 아직 현실로 돌아오지 않았는지, 먼 허공을 보고 있었다.
괜찮은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은 듯하다.
죽음의 공포를 떠올렸는지 그녀의 몸이 달달 떨려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이나.”
괜찮습니다. 여기 내가 있어요.
그는 그의 마음이 가서 닿기를 바라며 그녀를 안아 토닥였다.
더 빨리 곁에 가 주지 못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그녀의 몸이 위험에 휩싸였던 그 찰나를 떠올리자, 다시금 헤베타를 향한 살기가 새어 나왔으나, 사이나에게 영향이 갈까 싶어 가까스로 제어했다.
“…콘스탄틴?”
“그래. 납니다. 정신이 좀 듭니까?”
정신이 돌아왔는지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러왔다. 그동안과 달리 너무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음성에 내심 놀랐으나 기뻐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녀가 괜찮은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
“의식이 없어… 이리로 왔습니다. 의사가 곧 올 겁니다. 팔의 상처는 치료했습니다만, 다른 곳은 내가 볼 수가 없어서… 괜찮습니까?”
떨어지던 그녀를 받아내기는 했으나, 자칫 큰 사고가 날 뻔했다.
“아픈 곳은… 없어요. 괜찮은 것 같아요.”
팔뚝이 피로 물든 것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당장 소매를 뜯어 녹각 포션으로 치료를 하긴 했으나, 다른 곳까지는 차마 그가 확인할 수 없었다.
괜찮다고 말을 하긴 하지만, 사람이 놀랐을 때는 통증도 못 느끼고는 하니 조금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게다가 심리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지 않았겠는가. 누가 봐도 걱정을 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는 꼼꼼하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저… 구해주신 거죠?”
동그랗게 그를 올려다보며 감사를 표하는 보랏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생각 외로… 멀쩡해 보이는군.’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걸까. 아니면 정말 괜찮은 것일까.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여태 지켜본 결과 힘든 일이 있다고 불쑥 털어놓고 도움을 청할 타입은 아닌듯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희, 여기까지만 해요.”
역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었나 보다.
사이나는 복병처럼 또 기함할 만한 말을 내뱉었으니 말이다.
-우와아아! 저 여자! 아주 똘똘한 여자였네! 그래 잘 생각했다, 여자야. 내 주인은 아주 나쁜 놈이야. 얼른 집에 가라!
“…….”
대체 왜 저런 결론이 나왔을까. 내가 방금 한 행동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었나? 뭘 놓친 걸까.
어떤 생각의 흐름을 거쳐 저런 결론이 나왔는지 그로서는 고민에 고민을 더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왜인지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유가 뭐가 있어! 그냥 주인 너가 싫은 거지! 남자가 질척거리는 거 아니다!
그가 한 것이라고는 구조와 걱정뿐이었는데 어째서?
결국, 물어야만 했다.
“아무래도 저 결혼해야 할 것 같아요.”
“…….”
-으하하하. 잘 생각했다, 여자야. 주인은 남편감으로 별로지?
그리고 나온 대답에, 그는 더더욱 혼란에 빠졌다.
‘결혼? 갑자기?’
분명 비혼주의자라고 하지 않았나? 왜 마음이 변한 거지?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왜 나를 내쳐야 하는 거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내가 그리 모자라나?’
…역시 나이가 너무 많아서? 매력이 부족해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결혼 대상자 후보에조차 올라가지 못하는 현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난, 후보에조차 들지 못하는 겁니까? 내가… 그리 형편없습니까?”
“…네에?”
“내 어디가 그렇게 별로입니까? 말해주면 고치도록 하지요.”
“……그게.”
역시 너무 스스럼없이 군 게 잘못이었던 걸까? 기회만 생기면 만지려 하고, 안고, 닿아 있으려 했던 게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자제했어야 하는 건데…….”
후회가 막심했다.
-그래. 이 짐승 같은 주인아.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 멋있게 뒤돌아서서 떠나는 게 그나마 품위를 지키는 방법이다. 자! 훌쩍 떠나자!
도대체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해야 할지 도무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공작님이 문제가 아니고요! 개인적인 사정이…….”
그런데 사이나가 난감한 표정을 한참 짓더니 입을 열었다. 근래 황자의 행동과 헤베타, 그리고 자신의 결심 등.
“…과연.”
왜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이해할 법하다. 여전히, 왜 그는 후보조차 아닌 것인지는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지만, 결국 그는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다.
그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다른 남자 찾지 말아요.”
-주인아! 넌 자존심도 없냐!
그는 그저 비는 수밖에 없었다. 직설적으로 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로는… 안 됩니까?”
나는 이미 그대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공작님께 너무 부족하니까요…….”
부족하다니.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대만, 괜찮다면, 그 남자 내가 되고 싶습니다.”
제발.
“날, 선택해 줘요.”
-정말 제정신이 아니구나! 정신 좀 차려라! 주인아! 넌 크레이머 가의 공작이자, 이 위대한 칼리고의 맹약자이고, 천년을 이어온…….
그는 진심을 담아 그녀를 직시했다.
“그대가 하는 고민, 어려움, 그 무엇이라도 나를 통해 해결해 주십시오.”
“…….”
“내가 해답이 되겠습니다.”
자신의 간절한 바람이 가서 닿기를 바라며.
“정말 저로…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이 여자는 또 왜 이래! 이 여자야!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마라!
다행히 그의 마음이 느껴진 것일까. 그녀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왔다.
“괜찮다마다요. 간절히 원합니다.”
“…결혼인데요?”
결혼. 더 좋다. 합법적으로 그대를 내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 내 곁에 둘 수 있겠지.
이전에 그가 갖고 있던 결혼관에 대한 생각은 모조리 사라졌다.
“그대가 허락하기만 한다면.”
-주인아! 제발 이러지 마라! 결혼이라니! 결혼하지 마, 응?
무슨 상관이랴.
“내일 당장에라도.”
-내가 너무 시끄러웠지? 결혼만 안 하면 내가 앞으로는 안 떠들게! 자제할게!
자신은 결혼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만들고 싶다.
-아니, 밤에는 아예 말 안 할게!
누구라도 상관없다면, 나를 골라요. 나를.
-아니, 아니! 낮에도 조금만 할게!
내가 그대의 최고의 남자가 되어 주겠습니다.
-그것도 안 돼?! 그럼……. 그럼… 너가 하라고 할 때만 할게!
고개만 끄덕이면 됩니다. 허락만 한다면…….
“결혼해요, 우리.”
-제발 결혼만 하지마라! 주인아아!
그의 절실한 바람에 결국 그녀가 승낙했다.
“하, 사이나….”
-으아아! 안 돼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마치, 엄청난 전쟁의 순간을 지나온 기분이다.
그는 순간의 감격을 참지 못하고 그녀를 당겨 안았다. 짧게 소리를 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는 더 꽈악 끌어안았다.
-안……!
흐려지는 칼리고의 목소리를 뒤로하며 그는 웃었다.
그 얼굴에 피어난 웃음은 드디어 그녀를 얻었다는 만족감 때문인 것 같기도 했고, 그녀를 잃지 않았다는 안도감 때문인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선 이유 같기도 했다.
당장 자신이 직면한 감정의 정체를 정확하게 모른 채로, 다만 그는 미소 지었다.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미소가, 그렇게 그려졌다.
그의 내면의 계절이, 봄처럼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