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위험 신호
‘조금…, 조금만 더.’
한참을 그 목덜미를 지분대다가 어느 순간 보니 그녀의 입술만 보였다.
콘스탄틴은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입술의 느낌이 어떠한지. 얼마나 부드러운지. 얼마나 달달한지. 그 입 안이 얼마나 촉촉하고 뜨거운지.
“으응.”
그리고 그가 그 잇새를 벌리며 안쪽을 빨 때 얼마나 달콤한 소리가 새어 나오는지도 말이다.
그는 고개를 틀어가며 조금이라도 더 깊게 그 안을 맛보기 위해 혀뿌리까지 파고들었다.
입안 어느 방향도 놓치지 않도록 빠짐없이 핥아대며 맛보았다.
“가지 말아요…. 여기, 있어…….”
꿈속의 사이나는 온전히 그의 것이다. 그 꿈의 잔상일망정 지금은 순간을 누리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 시간을 소유하고 싶었다.
이 꿈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유지되길 빌며, 그리 소원했다. 소원하듯 읊조렸다.
“가지 말아요…….”
가지 말고, 내 것이 되어줘요.
내 곁에 있어 줘요.
아주 오래전, 그도 단맛에 기대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어린 시절.
생일 케이크에 꼽힌 촛불을 불어 끄며 빌 때처럼, 그는 사이나의 입술 사이로 숨결을 불어 넣으며 그렇게, 빌었다.
* * *
-주인아! 네 고조부가 이 회의에 참석했을 때가 기억난다. 그때도 황자가 망나니짓을 많이 하고 다녔거든. 근데 당시 헤베타가…….
다시, 현재.
달콤한 기억을 되살려 곱씹다가 콘스탄틴은 갑작스럽게 상념에서 벗어났다.
-지금 황자도 그런 것 같지? 주인아? 내 말 듣고 있냐?
사이나와 연인 비스름한 사이가 되기까지, 얼마나 힘겨웠던가.
잠시만 눈을 떼었다가는 금세 튕겨져 나갈 것 같은 불안감을 여전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떨궈지지 않기 위해 아직도 많은 것을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줘버리자. 황자 좋고 그 여자도 좋고. 제국도 좋고 나도 좋고. 안 그러냐? 주인아? 주인아?
그런데 황자가? 그녀를 헤베타 따위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주인아? 야, 주인아!
마음이 급해졌다. 얼른 회의를 끝내고 그녀를 만나야 할 것 같다.
“헤베타 파혼 가결안은 그리 알고 넘어가세.”
“예.”
“알겠소.”
로즈데일 공작의 말에 다들 수긍했다.
“인마? 지금 뭐해?”
회의록 귀퉁이를 작게 찢어 쪽지를 만든 뒤 전령새에게 먹이는 콘스탄틴을 보며 애버딘 공작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지금 사랑의 쪽지 날리는 거야? …회의 중에?”
“…….”
“…너 콘스탄틴 크레이머 맞냐? 진짜 맞아? 누가 거죽 뒤집어쓴 거 아니냐?”
“면상 치워.”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점점 가까이 오던 애버딘 공작을 진력난다는 표정으로 보며 콘스탄틴이 말했다.
“와- 놀랄 노자다. 진짜.”
“…….”
그리고는 잠깐 조용해졌던 루카스 애버딘이 갑자기 상체를 바로 세우며 또다시 지껄이기 시작했다.
“하긴, 나도 요즘 관심 가는 여자가 있기는 해.”
나는 네 연애사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 조용히나 좀 해줬으면 좋겠군.
“얼굴은 엄청 도도한데 풍기는 기운이 뭐랄까. 진짜 편안하달까? 처음 보는 느낌인데 이상하게 엄청 익숙하단 말이야.”
“…….”
“근데 또 귀여워. 말투도 귀엽고. 뭔가 묘하게 철벽 같은 것도 귀엽단 말이야?”
“…….”
“아- 또 보고 싶다. 크레이머야. 너의 그 여성분은 어떤 사람이야? 귀여워? 예뻐?”
“관심, 꺼라.”
차갑게 말하면서도 콘스탄틴은 순간 속으로 움찔했다.
그도 처음에 특유의 기운이 느껴져 그녀를 인지하지 않았던가. 콘스탄틴이 느낄 수 있는 기운이라면, 루카스 애버딘 역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루카스가 그에게 퍼레이드를 대신 가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콘스탄틴은 물끄러미 애버딘 공작의 얼굴을 보며 ‘만일’의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아, 왜, 왜!”
콘스탄틴과 달리 루카스는 여성에게 말을 거는 데에 상당히 능숙했고, 대화를 이끌어가는 것도 잘했다.
그로서는 그다지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면상이지만 여자들이 저 새끼의 곱상한 얼굴을 꽤 좋아하는 것도 안다.
루카스가 사이나에게 눈웃음을 치며 말을 걸고 구애하는 장면을 떠올리자,
“…….”
“아, 왜 그러냐고!”
그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이 나빠져서 미간을 구겼다.
“생긴 게…….”
“…잘생겼다고?”
“주먹을 부르는군.”
“아니, 크레이머야. 왜 이리 성격이 나빠? 애인이랑 싸웠어?”
곧이라도 맞을 것 같은 살기를 느꼈는지 루카스가 몸을 부르르 떨며 멀어졌다. 그리고 그 살기를 빌미로 애버딘의 말 새끼가 또 다시 튀어나와 푸르르 침을 튀겨댔다.
“야! 넌 왜 나왔어! 들어가!”
“후…….”
자꾸만 튀어나갈 것 같은 주먹을 말아 쥐며 콘스탄틴은 전령새를 손에 들고 한쪽 테라스로 가서 문을 열었다.
포르르 날아가는 새를 잠깐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회의를 마저 끝낼 시간이다.
* * *
회의가 끝나고 콘스탄틴은 황성에서 제공받은 자신의 방을 찾았다.
시간상 보물찾기를 하고 있을 때라, 연회장으로 간들 사이나를 바로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달빛 무도회에 참석한 모습을 못 봤군.’
평소에도 예쁘지만 연회용 드레스를 차려입은 모습은 분명 더 예뻤을 테지.
콘스탄틴은 성장한 상태였으나 연회용은 아니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깐 들른 것이다.
손에는 그녀가 선물해준 흰색 가죽 장갑을 착용했다.
새 부츠를 착용하고 머리도 다시 빗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는 동안 녀석이 또 지겹도록 중얼거렸다.
-뭐야, 오늘 왜 이리 꾸며? 예쁘게 보이고 싶나 봐? 곧 짝짓기라도 할 건가? 인간들은 짝짓기를 해서 아이를 낳잖아. 그치?
“입 닥쳐, 칼리고.”
-그 아가씨 난 좀 별로던데. 다른 여자랑 짝짓기 하면 안 돼? 이봐, 주인아. 주인아! 대답 좀 해 보거라. 엉?
“하.”
최대한 녀석의 소리를 머릿속에서 차단하려 노력하며 다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오전에 면도를 했는데 턱 밑에 그새 수염이 약간 자라난 것 같다.
조금 꺼끌꺼끌해진 턱을 쓸어보며 고민하던 그가 이내 욕실로 들어섰다.
그 사이 기운을 살짝 개방해서 검은 새를 호출해두었다.
‘면도를 다시 해야겠어.’
작은 보울에 면도용 크림을 개며 턱 밑을 살폈다. 재빨리 크림을 동그란 브러시로 턱에 펴서 바르고는, 각잡힌 움직임으로 면도날을 들었다.
서걱. 서걱.
손가락이 미는 날의 방향을 따라 짧게 돋아난 수염들이 금세 밀려나갔다.
-꽃단장하는 거냐, 주인아! 구애의 춤이라도 추려고? 결혼할거야? 다른 여자랑 하면 안 되는 거냐?
들은 척 만 척 콘스탄틴은 면도에 집중했다. 빠른 속도로 면도를 마친 그가 수건으로 하관을 꼼꼼히 닦아냈다.
다른 쪽에 준비해둔 물수건으로 얼굴을 다시금 세심하게 닦아낸 뒤 화장수로 마무리 했다. 손가락으로 슥슥 머리카락을 넘겨 뒤에서 다시 모아 묶었다.
나가서 망토까지 두르자 외출 준비가 끝났다.
때마침, 전령새가 돌아왔다.
“잘 찾아갔나 보구나.”
이전에 사이나의 그림자에 그가 심어둔 힙스의 기운을 기준 삼아 찾아가게끔 되어 있다. 너무 멀지만 않으면 그녀를 찾아내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 여자는 아냐? 주인 네가 몰래 힙스 심어둔 거? 그거 스토킹 아니냐? 여자가 알면 욕할 텐데? 짝짓기 실패다! 주인아. 다른 여자를 찾자!
지긋지긋하다.
이 빌어먹을 놈을 승계 받은 뒤, 콘스탄틴은 정말 말 그대로 하루 종일 녀석의 수다를 들어야 했다.
귀가 아니고 머릿속으로 바로 뚫고 들어오는 사념 전달 방식이라 원한다고 깔끔하게 차단을 할 수도 없었다.
‘진저리가 나는군.’
대체 이런 생활을 언제쯤 끝낼 수 있을까.
보통은 얼른 후계자를 낳아 수호령을 승계시키는 식으로 벗어나는데, 그렇다고 콘스탄틴은 그것을 위해 아무나와 결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아무나와 결혼해서 애를 가지고자 했다면 벌써 가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제국의 안녕이고 뭐고, 자신의 대에서 맹약을 끊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다. 실제로 그쪽으로 생각이 거의 기울기도 했었고 말이다.
‘사이나…….’
하지만 사이나가 나타났다.
그가 생각지도, 상상한 적도 없는 선택지를 가지고 나타난 그녀.
그가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감정을 깨우고, 욕구를 깨우고, 열망을 깨웠다.
그 도자기같이 하얗고 오밀조밀한 얼굴을 얼른 보고 싶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피부를 만지고, 키스하고 싶었다.
더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썩 내켜하지 않아 겨우 억누르고 있을 뿐.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방안에 가둬두고…….
꾸엑.
그때, 검은 새가 무언가를 토해냈다.
끝을 모르고 달려가던 망상이 때마침 끊겼다.
‘…잎사귀?’
아무 글자도 적히지 않은, 아무 표시도 되어 있지 않은 그냥 잎사귀다. 어디냐고 묻는 말에 이걸 보낸 이유는…?
‘아, 거긴가 보군.’
콘스탄틴은 서둘러 방을 나와 건물을 나섰다. 바깥은 이미 어둠의 장막이 가라앉아 있었다.
이런 시간대일수록 그는 더 움직이기가 쉬워진다.
“칼리고.”
짧은 호명과 함께 수호령의 능력을 펼쳤다. 그의 등 뒤에서 새어 나온 검은 기류가 몸을 따라 주변을 휘돌았다.
그는 가볍게 발을 박차며 어둠속으로 스며들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은 채 빠르게 이동했다.
그는 칼리고의 능력을 이용해 빛이 없는 곳이라면 쉽게 은신이 가능했고, 그림자에 숨는 것도 가능했다.
타인이 알면 매우 싫어하고 꺼려할 능력들인지라 모레프를 외부적으로 보여 방패삼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보물을 찾느라 사람들이 튀어나왔지만, 덕분에 크게 방해받지 않고 목적지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힙스?’
그때.
사이나에게 심어둔 녀석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위험, 신호?’
빌어먹을. 궁에서 왜. 설마, 황자인가?
콘스탄틴의 눈에서 갑자기 정광이 새어 나오더니, 속도를 끌어 올렸다.
어둠을 타고 달렸다. 최대한으로 속도를 냈음에도 초조함이 더 빠른 속도로 그를 잠식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