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좋으면서도 괴로운
“……?”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분명, 흐느끼는 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그녀의 방과 그의 방이 이어져 있기는 하나, 벽이 두터워 방음이 약하지는 않건만 어째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일까.
그 울음은 작았지만 그의 귀에는 이상할 정도로 크게 들렸다.
‘혹시 문이 열려있나?’
두 방 사이에 있는 연결문이 혹시 열려 있는 상태인가 하고 당겨보았으나, 역시나 그렇지는 않았다.
-주인아! 잠이나 자라, 뭐 하는 거냐! 나 오늘은 안 떠들고 얌전히 있을 테니까 가서 자자?! 응, 주인아?
콘스탄틴은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조심스레 돌려보았다.
-아니!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야밤에 여자 방을 이렇게 함부로 열고 들어가다니! 언제부터 이 가문에 이리 예의도 법도도 없었단 말이냐!
역시나 은근히 허술한 이 여자는 문을 잠그지 않았다. 이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를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인지…….
‘문을 잠갔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기분이 이상할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으니 잠시 살펴보기나 하자고 마음먹었다.
별일이 아니라면 금세 돌아서 나가면 되는 거니까.
“흐으… 윽…….”
이런. 들어와 보길 잘했다.
밤사이 열이 치솟은 듯, 슬쩍 짚어본 사이나의 이마가 불덩이였다.
-주인……!
많이 괴로운지 질끈 감은 그녀의 눈 사이로 눈물이 방울방울 새어 나왔다.
미리 약이라도 먹이고 재울 것을.
괜찮아 보여서 간과했던 자신을 책망하며 그는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쉬이……. 사이나.”
평소에야 차가워서 사람들에게 소름이나 돋게 하는 피부지만, 이렇게 열이 나는 이마에는 좀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그의 생각대로 그 시원함이 달가운지, 그녀가 자신의 손바닥을 계속 파고들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픈 여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모습이 가히 사랑스러웠다.
“아무 일도 없어요. 편히 자면 됩니다.”
나직하게 그녀를 도닥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사이나는 눈물을 그쳤다. 거칠던 숨결도 차츰 가라앉아 가는 것 같다.
“으…….”
하지만 숨결의 뜨거움은 여전해서 해열제를 얼른 먹여야 할 것 같았다. 하얗게 거스름이 일어난 입술을 보니 물도 먹여야 할 것 같아 잠시 손을 떼고 일어났다.
콘스탄틴은 해열용 물약과 물을 가져와 침대 옆 협탁에 놓고 그녀의 뒷목을 잡아 약간 상체를 세웠다.
뒷목에서 느껴지는 체온도 엄청났다. 약을 먹여도 열이 안 잡히면 당장 모레프를 타고서라도 어디서 의사를 잡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스탄틴은 물 컵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기울였다. 하지만 의식이 없어서인지 삼키지 못하고 죄다 바깥으로 흘려버렸다.
‘숟가락으로 떠 먹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입가를 굳혔다가, 그 물을 자신이 마셔 입 안에 머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맞대어 사이를 벌리며 물을 흘려 넣었다.
“으음.”
마침 목이 말랐는지 사이나는 그에게 매달려왔다. 바짝 붙어오며 더 많은 물을 원했다.
‘……그냥 물을 먹이는 것뿐이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으려 콘스탄틴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몇 번이고 물을 머금어 넣어주며 해열 물약도 같은 방법으로 먹였다.
쓴맛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이 살짝 구겨지며 삼키지 않으려 하기에 그는 그녀의 코를 잡았다. 숨구멍이 막히자 입으로 숨을 쉬기 위해 자연스럽게 액체가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학, 벌어진 발간 틈새로 콘스탄틴은 다시금 물을 머금은 제 입술을 내렸다.
그의 입 안에 있는 물을 다 삼키겠다는 듯 핥아오는 그녀의 입술과 혀의 느낌에 자꾸만 황포해지려는 감각이 들었다.
‘하, 이 여자야….’
그는 제 의지를 벗어나 치솟은 몸의 반응을 가라앉히느라 상당히 고난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다른 의도는 없다고 생각하려 했으나 실상은 순수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물을 먹인다는 빌미라고 하기엔 그의 입술이 그녀의 것 위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고는 했으니 말이다.
“사이나…….”
들릴 듯 말듯 되뇌는 이름마저 달았다.
그녀는 생명수라도 받아먹는 것처럼 그의 입술에 매달렸다가, 충분히 목을 축였는지 점차 힘이 약해졌다.
열이 올라 달뜬 몸은 여전해서 그의 서늘함을 찾아 들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한밤중 예기치 않은 방문이었던 터라 콘스탄틴은 나이트가운 하나만 걸친 상태였다. 그런데 사이나가 자꾸만 그 가운을 젖히며 맨살에 얼굴을 비벼왔다.
찬 피부에 그녀가 들러붙자 마치 뜨끈한 탕파 주머니들을 몸 위에 잔뜩 올린 기분이다.
무의식적으로 서늘함을 찾아 이런다는 것을 알지만 자꾸 몸을 비비적대며 그를 자극해오는 탓에 상당히 곤란한 처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나 은근히 그의 허리를 감아오는 힘이 집요해서 그녀를 깨우지 않으면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곤란하다고 해도 깨울 생각은 없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몸에 느껴지는 그녀의 굴곡이 너무 선명해서…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마음대로 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콘스탄틴은 자신의 한 팔을 들어 머리 위 침대 헤드를 붙잡았다. 다른 한 팔은 옆으로 뻗어 빈 베개를 움켜잡았다.
‘…죽겠군.’
좋으면서도 괴롭다. 웃긴 일이다.
그렇게 그는… 그 귀한 적요감 속에서도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여야 했다.
* * *
사이나는 정말 그에게 다양한 감정을 선사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이토록 등락을 그리며 요동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제는 마수를 잡는 일 조차도 긴장감 없이 기계적으로 처리한다고 할 정도로 굳어진 이 마음이 이렇게 오락가락할 수 있는 것이었나.
신기할 정도다.
“율아…. 톡톡 해줘…….”
그녀가 먼저 술을 마시자 해서 나름 설렘을 가지고 기대했더랬다. 애송이 같지만 그랬다.
그런데 로이터의 급한 보고사항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사이나가 취해버렸고, 술기운에 흐물흐물해진 그녀가 누군가의 이름을 애절하게 불러댔다.
급속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율이 누굽니까?”
율? 율이라. 저번에도 들어봤던 그 이름 아닌가? 대체 누구인가. 사이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남자인가.
차사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취중에 새어 나오는 진심을 엿듣기 위해 넌지시 물었다.
“율은… 유리. 나쁜 놈…. 톡톡… 얼른…….”
누군지는 몰라도 꽤나 친밀했던 사이였던 것이 분명하다.
‘놈이라고 하는 거 보니 확실하게 남자고.’
‘톡톡’이 뭔지는 몰라도 둘만 아는 비밀스러운 접촉인 것 같은 데다…… 내밀한 사정도 있는 것 같다.
당장은 들리지 않지만, 숨어든 그림자 안에서 칼리고가 자신을 향해 킬킬 웃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멍청한 새끼. 헛물 제대로 켰군.
“하…….”
스스로에게 새어 나오는 욕설을 목구멍 안쪽으로 삼키며 그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옆방에 사이나를 누인 후,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고는 한참동안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그녀가 탐난다고 해도 이미 연인이 있는데 억지로 무얼 어떻게 하거나 강제력을 발휘할 생각은 없었다.
‘저번에 키스할 때는 그럼 왜 날 밀어내지 않은 거지.’
처음은 어쩌다 그랬다 쳐도, 오후에는 그리 오래 물고 빨았는데…….
자신이 싫어서라기보다는 비혼주의자라서 그렇다는 변명을 믿었건만. 그게 아니었나.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는 다음 날, 일부러 그녀를 피했다. 그녀가 폭설로 인해 자신의 저택에 갇히다시피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도무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그 밤.
꽤 오랫동안 꾸지 않았던 악몽이 다시 찾아왔다.
연초를 몇 대나 피우고, 독주를 거의 한 병 다 비우다시피 해서 겨우 든 잠이었거늘, 그 결과는 악몽이다.
칼리고를 승계받기 위해 진을 새기던 당시의 기억.
열 살부터 시작해서 열여덟까지 매년 추가된 진을 새기던 그 과정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매번 그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기절하기도 하고 입술을 짓씹어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
진을 새기는 그 과정은 단순한 육체의 고통에서 끝나지 않았다.
마치 피부 깊은 곳, 심장 한중간에 얼음송곳을 수백 개 꽂아 넣는 것 같은 그런 소름끼치는 감각이 그를 미치게 했다.
그리고 그 감각은 곧 타인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고작 열 살에서 열 몇 살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고통이었고 지독한 외로움이었으나, 크레이머의 성을 달고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그것을 감당해야만 했다.
“으윽…….”
깨어나고 싶었다. 차라리 불면으로 새벽을 새우는 것이 낫다.
그러나 몸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잠에 드는 것도 난항, 깨어나는 것도 난항이다.
그는 반쯤 잠긴 의식 속에서 악몽의 파노라마 사이를 헤매며 누군가 자신을 깨워주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쾅!
그때, 귓전을 때리는 소리가 나며 누군가의 인기척이 확 스며들었다. 퍼뜩, 몸이 반응했다.
악몽을 이루던 장면과 장면들이 타라락 접혀 사라지며 그녀가 등장했다.
‘사이나……?’
자신의 무의식 속의 바람이 그녀를 불러낸 것인가?
향기가 비강을 파고들고, 전에 느껴본 적 있었던 실크 같은 피부가 손바닥에 달라붙었다.
드러난 하얀 목은 그의 입술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 전 욕실에서 그리 맛보고 싶었던 그 목덜미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에 입술을 묻었다.
“하…….”
떨어져 맡을 때보다 훨씬 진한 향기가 폐부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악몽의 괴로움이 순식간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며, 고요감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랬다.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고요, 한계까지 치밀어 오른 그의 폭력적인 화급함을 순식간에 꺼버리는, 잔잔하지만 깊고 거대한 호수 같은 고요함이었다.
그러면서도 따스했다.
따스한 고요라니. 지독히도 멋지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