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키스해도 돼?
다행히 카펫에 걸린 발이 빠지자마자 디딤을 잘한 덕분에 완전히 쓰러지지는 않을 수 있었다.
“사, 사이나! 괜찮… 아?”
카이언이 허둥지둥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주려 팔을 잡았다.
“읏…….”
대체 뭘 붙잡고 넘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딱딱해서 팔 안쪽이 아파 왔다. 멍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스르륵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동공 없는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흐앗?!”
순간 깜짝 놀랐으나, 짙은 음영이 드리운 동공 없는 눈동자가 곧 진짜 사람이 아니라 조각상의 얼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깜짝 놀랐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는데, 일으키다 보니 전체적인 자신의 자세가 갑자기 깨달아졌다.
거의 올 누드에 가까운 남성의 조각상, 사이나는 그 허벅지 부분에 고개를 처박듯이 꼬옥 껴안은 상태였다.
아까만 해도 아름다운 남성미를 매우 훌륭하게 조각해낸 뛰어난 작품이라고 감탄하던 그것이, 지금은 ‘왜 하필 이게 여기 있어서는….’ 하고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
카이언의 침묵이 갑자기, 매우, 신경이 쓰였다.
고개를 돌려 그를 볼 생각을 하니 너무 민망해졌다.
사이나는 망연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러자… 다시금 조각상의 은밀한 부위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댄 것 같은 자세가 되었다.
‘으앙, 이런 자세에서 고개를 숙이면 어떻게 해!’
사이나는 화들짝 놀라 급작스럽게 손을 놓아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불균형하게 매달려 있던 몸인데 손을 놓으니 바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앗!”
물론 카이언이 그녀를 붙잡고 있었던 터라 완전히 자빠지지는 않았지만, 대신 카이언의 팔을 붙잡으며 쓰러졌다.
“사이나! 어, 괜찮아?”
“어, 음…….”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사이나는 창피해서 두 손에 고개를 묻었다.
“흐.”
카이언으로부터 공기 빠지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아하하하하!”
커다란 웃음이 결국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야! 왜 웃어!”
크크극 대며 웃어젖히는 카이언의 모습에 사이나는 민망했다가, 체념 어린 한숨이 나오더니, 이내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음이 났다.
“푸흐… 아하하하.”
결국 사이나도 같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한참 웃다 보니 자신의 웃음소리만 남았다. 채 지우지 못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사이나는 카이언을 보았다가 흠칫했다.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지긋하게 사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입가 쪽을.
“…….”
아니, 잠깐. 이 분위기는… 설마, 그건가?
‘아냐, 아니겠지. 카이언과 나 사이에 무슨…….’
사이나는 당혹스럽지만 애써 표정을 수습하며 그리 생각했다.
“…키스해도 돼?”
“어?”
하지만 사이나는 또 틀렸다.
키스라니…….
단 한 번도 카이언을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사이나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이제 그녀에겐 콘스탄틴이 있으니 더 이래서는 안 되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카이언의 고개가 점점 내려왔다.
“어어? 어?”
사이나는 황급하게 뭔가 훌륭하게 거절할 수 있는 말을 떠올렸으나, 머리가 먹통이었다.
“어? 아, 안…….”
점점 가까워지는 카이언의 얼굴에 점점 더 당황스러워지기만 했다.
“안 돼!”
결국 입 밖으로 나온 것은 단호하다 못해 숫제 경고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방금의 분위기 때문일까. 이렇게 단호한 거절의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카이언은 매우 당황한 기색으로 사과했다.
“…미, 미안…….”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얼굴이 붉어졌으리라.
“어,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
“이, 이러면 안 될 것 같아, 우린.”
이렇게까지 정색하며 안 된다고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 그렇게 터져나와 버렸다. 사이나는 어떻게 잘 설명해보려고 애써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아니, 내가 사과해야지…….”
“…….”
“미안…….”
“아냐. 나도 미안해…….”
서로 사과를 늘어놓고 나자 할 말이 끊겼다.
“근데… 우리가 이러면 안 될 것 같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까?”
그리고 한참 후에 카이언이 조심스레 물었다.
“응? 그… 우리가 음, 키스를 할 사이가 아니잖아?”
“아, 그렇지…….”
연인 사이도 아닌데 무슨 키스를 하느냐는 식으로 돌려 말했다.
이미 콘스탄틴과 키스 먼저 하고 나중에서야 관계를 정립한 전적이 있는 사이나로서는 약간 찔렸지만, 카이언은 모르니까.
“나, 실은…….”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던 걸까.
갑자기 카이언이 부끄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뭔가를 말하려 했다.
금방이라도 고백의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타이밍을 느낀 사이나는 또다시 급해졌다.
“카이언! 넌 좋은 사람이야!”
“…….”
“그리고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
사실 좋은 사람이니 좋은 친구니 하는 말은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다. 카이언은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다.
“…….”
어색한 침묵의 물결에 사이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까 넘어지면서 카이언의 외투가 벗겨진 모양인지,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사이나는 그 외투를 들어 툭툭 털고는 카이언에게 돌려주었다.
“…안내 고마웠어. 잘 자고.”
카이언은 좋은 남자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대체 왜 자신이 좋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그를 받아줄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면 그리 깊은 감정은 아닐 테니 금방 잊지 않을까. 사이나는 그리 생각 했다.
사이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왔던 길을 걸어 나왔다.
갑자기 지금은 겨울이라는 게 새삼 와 닿으며 얼어붙는 기분이다.
벽난로 앞에서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 * *
“왜 데려갔어. 여기다 두고 안고 자려고 했더니.”
욜리를 데려가겠다고 할 적에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에비앙이 사이나를 보자마자 투덜거렸다.
“음, 수컷인데, 걔.”
“…근데?”
“좀 부끄러워하는 것 같더라고. 다들 얇게 입고 있다 보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진심이다. 사이나가 보기에 욜리는 분명 고개를 돌리며 내외했다.
사이나가 끄덕거리자 에비앙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은근히 웃겨, 너.”
키얼스틴과 플로리아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짠데……?’
진심으로 하는 말인데 왜 농담인 줄 아는 걸까….
친우들은 욜리가 단순한 강아지가 아니라는 걸 모르니까 그렇겠지만, 분명히 알고 있는 사이나로서는 녀석을 이 방에 계속 둘 수 없었다.
“아, 편하고 좋다.”
“그러게. 밤에 우리끼리 이렇게 노니까 너무 좋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이미 방 안에는 음주가 한창이었다.
다들 손에 잔 하나씩을 들고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 동그란 모양이 왠지 굉장히 따뜻한 느낌을 선사했다.
아까 느꼈던 한기는 금세 어딘가로 사라져버린 것 같다.
사이나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그 안으로 파고들어 자리 잡았다.
“근데 너 왜 이리 늦게 왔니?”
갑작스러운 질문에 일순 흠칫했으나, 사이나는 태연한 척 대답했다.
“음…. 배가 더부룩한 것 같아서, 좀 걷다 왔어.”
“흐응?”
키얼스틴이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갸름하게 뜨며 콧소리를 냈다.
뭐지, 혹시 카이언이랑 있었던 거 들켰나?
바로 올 것을. 괜히 산책을 한답시고 돌아다녔다. 후회가 막심이다.
그렇다고 카이언의 누나한테 ‘언니, 내가 언니 동생을 대차게 거절해 버렸어요.’라고 고백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나저나, 사야 너 비혼주의자랬나?”
키얼스틴이 몸을 느른하게 누이며 물었다.
“음. 그런 편.”
“왜 결혼 생각이 없어?”
“이상한 놈 만날까 봐. 그러느니 그냥 아빠랑 오라버니랑 사는 게 낫잖아요.”
“어머, 어머. 너무 좋은 생각이다.”
“…언니도 비혼주의자야?”
“나? 아니?”
키얼스틴의 대답은 단호했다.
“응…?”
그럼 왜 좋은 생각이라고?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어서 사이나는 갸우뚱했다.
“그럼 결혼 안 하고 계속 드보프가에서 살 거라는 거지?”
“그러면 좋지. 오라버니가 결혼해서 새언니가 생기면 음, 그땐 지방 영지로 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뭐? 아니, 왜?!”
“…응? 그, 신혼인데 미안하잖아…. 새언니가 싫어할 수도 있고.”
“그럴 리가 없어! 새언니는 너와 같은 건물에서 살면서 매일 같이 밥 먹고 그러고 싶을걸?”
“그런… 분이 과연 있을까?”
“있어! 분명 있단다. 후후, 기다려 보렴.”
…뭐지? 이 확신에 가득 찬 말은…….
“요즘 우리 오라버니 누구 만나는 여자 있어?”
“후훗, 글쎄?”
“……?”
자신의 오빠가 연애하는지를 키얼스틴에게 묻는 상황도 이상했지만, 키얼스틴이 뭔가 아는 듯 의뭉을 떠는 상황은 더 희한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묻게 되었다. 뭐, 대답을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플로리아, 애버딘 공작님께선 황도에 오셨니?”
잠깐 끊어진 대화의 흐름을 파고들어 에비앙이 플로리아에게 물었다.
“아, 주중에 올 것 같아.”
“수호의 주간이 다음 주부터지.”
“잘하면 4대 공작님들을 모조리 뵐 수 있겠는걸?”
“글쎄. 그분들 회의하느라 바빠서 막상 연회는 잘 참석 안 하시지 않아?”
“달빛 무도회는 그래도 참석하시지 않을까?”
“그것도 가봐야 알 듯해.”
수호의 주간이라…….
여름 햇살이 선명할 때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는데,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주간만이 남았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삶 역시 정신없이 흐른다.
사이나는 내년, 스무 살이 되는 해가 되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약간, 궁금해졌다.
* * *
콘스탄틴은 꽤 바쁜 것 같았다.
수호의 주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혹시 황성에 올 일은 없습니까?]
회의가 연이어 있다 보니 콘스탄틴은 황성에서 살다시피 하는 듯했다. 그래선지 이런 쪽지를 보내왔다.
슬쩍 미소가 배어 나왔다.
[네, 제가 황성에 갈 일이 뭐가 있겠어요.
많이 바쁘신가요?]
[예. 시간을 빼기가 쉽지 않군요.
그럼 흑야에도 오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