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보아선 안 될 것을 목격해 버렸다
얼떨결에 하게 된 연애라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쪽지를 가진 검은 새가 날아들 때마다 설렘을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있었다.
‘이게…… 연애하는 기분인가?’
사이나의 방 콘솔 서랍엔 목함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새 주고받은 쪽지가 가득이었다.
그 가득 채워진 쪽지들을 보고 있자면 어쩐지 심장이 술렁거렸다.
[달빛 무도회에는 참석할 예정이에요.]
[그럼, 그때까지 잘 참아 봐야겠군요.]
…뭘 참는다는 거지?
사이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목함에 또 한 장의 쪽지를 추가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자 수호의 주간 가장 마지막 날을 제국에서는 ‘흑야(黑夜)’라 부른다.
마지막 날은 해가 떠도 어딘가 어둡고, 밤에는 달이 떠도 삭월이 떠서 그 빛이 아주 약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묘한 어두움이 지속되다 보니 마지막 날을 흑야라 불렀다.
흑야에는 전국적으로 이러저러한 행사가 많았는데 특히 황성에서 열리는 ‘달빛 무도회’가 대표적이었다.
달빛 무도회는 흑야의 오후 무렵부터 신년의 첫날 새벽까지 이어지는 행사다. 달빛이 유독 없는 날에 열리는데 왜 달빛 무도회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시간별로 여러 가지 이벤트가 열리고는 했는데 그중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바로 심야에 열리는 ‘보물찾기’ 행사였다.
찾은 보물의 수에 따라 황가에서 큰 선물을 내리고는 했다. 사냥제나 토너먼트 등과 달리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에 인기가 매우 좋았다.
‘와, 그러고 보니 드디어 이 행사에 참가하는구나!’
사이나 역시 열심히 참여할 예정이었다. 등수를 노리는 것은 아니어도 나름 열심히.
사이나의 목적은 명확했는데, 남들은 웃겠지만 상품이 목적이 아니었다. 보물찾기 때 보물로 숨겨지는 그 매개체 자체에 관심이 컸다. 그 매개체가 수호령을 본뜬 인형이기 때문이다.
흑야 행사는 데뷔를 치른 자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이나로서는 처음인 것이다.
‘5대 아니, 최소 4대 수호령을 다 모았으면 좋겠다.’
황가의 수호령 인형은 개수가 딱 한 개뿐이라고 하니 기대조차 안 한다.
‘아니, 딴 건 몰라도 유니콘 인형은 꼭 찾았으면……!’
제사보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격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쩌랴. 사이나의 관심사가 그런 것을.
촌스럽게 굴고 싶지는 않았으나, 기대감이 부풀어 오른 것도 사실이었다.
* * *
날들은 금세 흘러 흑야가 찾아왔다.
아침부터 날이 우중충했다. 마치 해가 베일을 두르고 뜨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기하게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은 항상 이리 어두웠다.
황성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렇다고 없던 빛이 더 생기지는 않았다.
낮에도 어둡더니 달빛조차도 어딘가 빛이 바랜 것 같은 느낌.
‘근데 무도회 이름이 달빛 무도회라니….’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아이러니 그 자체다.
사이나가 탄 마차는 느지막이 황성에 도착했다.
아니, 사실 꽤 늦었다.
보물찾기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이틀 내내 달빛 무도회에서 죽치고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일부러 늦게 오기도 했다.
‘그래도 너무 늦었나?’
사이나는 연회장에 들어가기 전에 주변을 살폈다. 아무래도 정문보다는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호명관이 참석자의 입장을 크게 알리는데 사이나는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정문이 아니라 휴게실 등으로 연결된 뒤쪽 루트로 살며시 스며들기 위해 사이나는 건물 외곽을 따라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구두 아래로 잔디가 밟히며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렸다.
연회가 좀 더 무르익어 밤이 깊어지면 딴짓(?)을 하러 바깥으로 빠져나온 사람들 역시 많아지며 정원도 사람들이 틈새 틈새 찰 테지만, 아직은 뭐 거의 없을 테니 크게 조심하지 않고 걸었다.
“흣.”
묘한 음색이 들려온 것은 그때.
흠칫, 놀란 사이나의 몸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자신의 예상이 틀렸나 보다. 벌써부터 딴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사람이 올 수도 있습니다.”
“싫어, 더 해다오. 응?”
길을 잘못 든 걸까? 밀애를 나누는 목소리가 왜 이리 가깝게 들리는 것인지.
분명 속삭이듯 하는 대화인데 바람이 소리를 하필 이쪽으로 실어다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이나에게는 매우 크게 들렸다.
“으응, 응…. 좋아…….”
질척하게 숨결이 섞이는 소리가 점차 농밀해졌다.
아, 이런. 난 왜 자꾸 이런 걸 목격하게 되는 걸까.
사이나는 한숨을 내쉬며 돌아갈 길을 살폈다.
“자, 잠시만요. 거긴…….”
“나만 이리 좋은 것이냐? 아니지 않느냐.”
그러다 사이나는 움찔했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인데…….’
여자 쪽의 목소리가 특히 익숙하다. 근래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다. 여자치고는 톤이 낮은… 그리고 저 특이한 말투…….
“후, 각오하십시오. 전하.”
“각오 좋지. 어디… 앗, 으읍!”
그래, 얼마 전…!
사이나는 순간 숨을 쉬는 것마저 잊었다.
‘……서, 설마!’
돌아가려던 몸이 삐걱거리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머리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못 본 척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빼꼼하게 내밀어진 고개가 구석으로 기울었다.
커다란 관상수와 건물 외벽 사이 틈에 한 커플이 진하게 입맞춤을 나누고 있었다. 그 틈새가 굉장히 교묘해서 이곳 지리에 꽤나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잘 모를 듯한 구조였다.
‘…어쩌다 이리 왔을까.’
사이나는 전생에 억지로 참석한 사교 행사에서 사람들을 피해 매번 구석으로 숨어들다 보니, 눈에 잘 안 뜨이게 이동하는 스킬이 꽤 훌륭했다.
그렇다고 이런 것까지 알게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황녀 전하…….’
설마 했지만 역시나였다. 황녀 전하가 맞았다.
자신이 저 밀회를 알게 되었다는 것을 들켰다가는 경을 치는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해져서 얼른 다시 몸을 다잡았다.
저쪽에서 알아채기 전에 얼른 물러나야 하지 않겠는가.
널찍한 등과 덩치, 높은 키, 허리춤에 찬 검과 의상.
저 남자의 뒷모습만 봐도 매우 단련된 형태의 기사로 보이니, 들키기 십상……
‘어, 잠깐…… 기사? 기사?’
…헤비아탄 경?
‘세상에.’
저 머리 색! 저 덩치! 저 제복!
맞는 것 같다. 황녀의 호위 기사인 샤피로 헤비아탄 경이 틀림없었다.
사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막았다. 놀라서 감탄사가 새어 나올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읏, 으응…….”
“전하, 하아….”
전에 소개받았을 땐, 하루 종일 말을 한 마디나 할까 싶을 정도로 과묵해 보이는 남자였는데, 이리 보니 열정적이기가 그지없다.
아무리 봐도 단순히 몸만을 나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둘 사이에 흐르는 농밀하면서도, 친밀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절대 들키면 안 돼….’
사이나는 둘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기척을 죽이며 몸을 물렸다.
지나치게 긴장한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려다 보니 다리에 쥐가 나는 느낌이었으나, 결국 해냈다.
“후아.”
사이나는 다른 쪽으로 조용히 돌아 성공적으로 연회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어머, 사야?”
“늦었네?”
“어서 와.”
호명관의 외침 없이 조용히 연회장으로 들어왔으나, 사이나의 친우들은 금세 그녀의 존재를 알아채고는 다가와 인사했다.
왜 다들 모여 있나 했더니, 또 하퍼 영애 파벌과 한판 붙은 모양이다. 일레인 반즈는 없었다.
가끔 보면 키얼스틴과 에비앙은 하퍼 영애와 한판 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가끔은 저 실랑이가 일종의 취미처럼 보일 때도 있을 정도였다.
싸우기 위해서 일부러 다른 파벌을 형성하기라도 한 것처럼.
또 보나 마나 별것도 아닌 이유로 티격태격하는 중이겠지만, 이번에는 무엇 때문인가 싶어 그들을 보다가 다른 쪽에서 시선이 들러붙는 것을 느꼈다.
무심코 그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더니, 엘리자베스였다.
그녀는 하퍼 영애 파벌의 저 끄트머리에서 묘하게 가라앉은 표정을 한 채 사이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왜 저렇게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사이나는 잠깐 그녀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사이나.”
“응?”
그 사이 플로리아가 스윽 다가오더니 나직하게 그녀를 불렀다. 비밀이라도 말하듯 속살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오빠 지금 황도에 와 있다.”
음? 플로리아의 오빠? 애버딘 공작?
“……그렇, 구나?”
갑자기 저 말을 하는 저의를 알 수 없어서, 의문형의 반응이 나왔다.
“회의 끝나면 곧 만날 수 있어.”
“음……. 아하!”
사이나는 배시시 웃으며 플로리아에게 말했다.
“…….”
“오라버니 많이 그리웠나 봐?”
왜 뜬금없이 오빠 이야기인가 했더니, 그간 가족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귀엽기도 하지.
그런데 플로리아가 볼을 크게 부풀리더니, 홱 돌아서 가버렸다.
“……?”
딱 봐도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다.
‘또 내가 뭘 잘못했나…….’
플로리아는 이따금 저렇게 알 수 없는 행동을 했는데, 사이나로서는 왜 그런지 알아내는 게 쉽지 않았다.
역시나 자신은 사회생활엔 젬병이라며, 혼자 시무룩해할 뿐.
“사이나 영애.”
또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사이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삐끗 굳었다.
“위, 위대한 수호가 고귀한 피를 따라 영원하기를.”
황녀였다. 방금 전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보게 된 탓에 지레 찔린 몸뚱이가 식은땀을 흘렸다. 사이나는 겨우 인사를 마쳤다.
“언약의 축복이 깃들기를.”
황녀는 사이나의 버벅거림을 알아채지 못한 듯 그저 반가워했다. 자연스럽게 사이나의 눈동자가 주변을 훑었는데, 헤비아탄 경은 보이지 않았다.
“…혼자 오셨습니까, 전하?”
“그러하다네. 달빛 무도회는 파트너 없이 참석하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은가.”
“그렇… 다고는 저도 들었습니다.”
“그대도 혼자인가?”
“예.”
“하긴, 파트너 할 사람이 지금 회의에 매여 있으니.”
“…예?”
황녀가 다 안다는 듯, 짓궂은 표정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