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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80화 (80/233)

80화. 수컷 욜리는 부끄럽다

동그랗고, 내부가 파인…. 얼핏 방패인가 했으나 손잡이가 없고 뭔가 본 듯한 형태였다.

사이나는 그것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폈다.

…수반! 황성에서 봤던 그 수반과 어쩐지 비슷하다.

흠 없는 백색이었던 황성의 그것과 색은 미묘하게 다르나, 형태가 같고 금속 같기도 하고 석재 같기도 한 재질이 주는 느낌이 비슷했다.

“그건 무기가 아닌데, 흠…. 이쪽 방에 섞여 있었던 모양이군요.”

“…이거 혹시 수반인가요?”

“맞습니다. 어찌 알았습니까?”

“……이것도 그럼… 뭔가를 알아내는 그런 용도인가요?”

“그걸 어찌……. 맹약자가 계약한 수호령의 속성을 알아내는 용도로 사용되던 수반입니다.”

“…….”

“그 방법은-”

“피를 이용하고요?”

“…….”

잠시 의식의 저편으로 밀어두었던 난제가 갑자기 다시 등장한 기분이다.

갑자기 둘 사이에 끼어든 냉랭한 기류에 공작은 당황한 듯했지만, 사이나의 의식은 과거로 끌려가 걱정에 휩싸였다.

“…사이나?”

콘스탄틴이 안색이 흐려진 사이나의 손에서 수반을 떼어 한쪽에 대충 두고는 그녀를 일으켰다.

“나중에 치우도록 합시다.”

“……혹시 말이에요.”

“……예?”

그건, 문득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헤베타가 중앙 귀족에서 뽑히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사이나의 난제지만, 그라면… 콘스탄틴이라면 혹시 그 답을 알까 싶어서.

“중앙 귀족… 말입니까? 그런 경우는 없었을 텐데요?”

“그냥… 혹시, 혹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요. 황명이 떨어진다면… 그럼 따라야 하는 거겠지요? 이런 쪽에서 황명이 떨어진 적이 이전에 아예 없었을까요?”

“…….”

주절주절 저도 모르게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답을 원하는 게 아니다. 그저 답답함을 어딘가에 호소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왜 이런담.’

사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몇 번의 심호흡을 거치자 그나마 심신이 조금 안정되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그런, 사례가 있었는지 알고 싶은 겁니까?”

“…있었을까요?”

“제가 아는 한은 없으나, 수백 년 전 사료까지는 찾아본 적 없으니 모르는 일이지요.”

“아.”

“알아보겠습니다. 나도 궁금하군요.”

“…감사합니다.”

콘스탄틴은 그녀의 볼과 관자놀이 근처를 손끝으로 쓸고는, 바깥으로 이끌었다.

지상으로 올라와 신선한 공기를 접하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기분이다.

문득 들이친 걱정이 마음을 잠식했으나, 약간은 괜찮아진 기분.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부디, 언제라도 요구하세요.”

아니, 그가 함께 걱정해주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진심입니다.”

정말, 진심이 느껴져서.

사악, 불어온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사이나는 웃었다.

“고마워요.”

“…….”

“진심이에요.”

방금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되돌리며,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맑게 웃는 그녀의 웃음을, 그가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 * *

“어서 와!”

“오랜만이야!”

전에 사이나 병문안을 목적으로 찾아왔을 때 이후로 처음 만나는 친우들이다. 굉장히 반가웠다.

게다가 오늘은 다들 모여 외박까지 하며 놀 테니 더더욱 반갑기 그지없었다. 설레기도 하고.

젖먹이 시절조차 독방을 쓰는 게 귀족이다 보니, 타인과 함께 잠을 잔다는 건 정말 희귀하면서도 생소한 행사다.

특히 귀족 영애들은 친구에게도 맨얼굴이나 잠옷 차림은 보여주지 않는다. 약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잠옷을 입고, 화장을 다 지운 얼굴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친밀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잠옷은 모두 챙겨왔어?”

“응.”

“섹시한 걸로?”

“…응?”

키얼스틴이 갑자기 사이나가 챙겨온 잠옷을 한번 봐야겠다며 가져온 짐을 받아 들었다.

“아유, 그냥 싹 가렸네. 가렸어. 너 이런 잠옷밖에 없어?”

“…응. 다 비슷비슷한데?”

“너무 길고! 너무 두껍고! 너무 답답하잖아!”

잠옷이 왜 짧고, 얇고, 훤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이나는 그냥 얌전히 눈알만 굴렸다.

“담에 나 잠옷 맞추는 데서 네 것도 좀 같이 맞춰야겠다.”

“…….”

사이나는 차마 괜찮다는 말은 못 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넷은 일찌감치 편한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함께 저녁을 먹고, 이후 놀이실로 옮겼다. 보드게임도 하고 차를 마시며 수다도 떨었다. 그리고 마침내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결국 오늘 함께 동행한 욜리를 데리고 사이나는 키얼스틴의 침실로 이동했다.

“너 오늘은 정말 얌전히 있어야 한다?”

“큥?”

영문을 모르겠다는 욜리를 데리고 키얼스틴의 침실에 도착하자 이미 다들 잠옷 차림으로 모여 있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수다의 장을 열어볼까?”

“신난다.”

벽난로 앞에는 이미 커다란 러그가 겹겹이 깔리고, 쿠션과 담요가 잔뜩 세팅된 채였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핑거 푸드들과 술들도 준비되어 있었다.

정말 편하게 뒹굴거리며 술 한잔하기 딱 좋은 그런 분위기였다.

“오, 키키. 오늘 잠옷 좀 섹시하다?”

에비앙의 칭찬에 키얼스틴이 치맛자락을 끌어 올려 허벅지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후후. 어때? 좀 짜릿한 디자인이지?”

“그래. 얼른 시집가.”

“누가 남편이 될지는 몰라도 아주 잡아먹히겠다, 언니.”

전에도 잠옷 파티를 한 적이 있다더니, 키얼스틴의 취향에 익숙한 모양이다.

얇디얇은 디자인의 잠옷은 같은 여자인 사이나도 얼굴을 붉힐 만한데 에비앙과 플로리아는 깔깔대며 웃는 선에서 그쳤다.

“……음?”

어딘가 어색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사이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욜리는 여태 쫄래쫄래 잘만 따라 다녀놓고는, 지금은 어딘가 매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더니 등을 돌리고 슬금슬금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 가서 나오질 않았다.

“욜리? 욜리야?”

“어머, 얘 왜 이래?”

“뭐 하니, 이리 온? 우쭈쭈쭈?”

다들 욜리를 나오게 하려고 온갖 수를 썼지만 더 깊이 들어가기만 했다.

‘설마…… 수컷이라서 그런가?’

똘똘한 녀석의 행태나 반응을 보면… 어쩐지 신빙성이 있는 가설이다.

다들 내밀한 옷차림을 하고 있으니… 특히 키얼스틴의 잠옷은 너무 섹시하니까…….

보기에 좀 부끄러워진 거거나, 아니면 대놓고 훔쳐보려고 사각지대로…….

“…….”

사이나의 미간이 좁아지며 의심의 눈초리로 욜리를 보았다. 아무래도 방에 데려다 놓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욜리, 방에 데려다줄게. 이리 와.”

아무래도 훔쳐보기 위함은 아니었던 듯 사이나의 말이 나오기 무섭게 쪼르르 나와 품에 안겼다.

같이 모여 놀다가 한 공간에 잠이 들지라도 기본적으로 개인 방은 제공되었다. 짐도 놓고, 옷도 갈아입고 해야 하니 말이다.

그녀는 다들 아쉬워하는 친우들을 뿌리치고 욜리를 방에다 두고 나왔다.

바로 돌아가려다가 사이나는 마음을 바꿨다. 평소보다 이것저것 많이 먹어서 배가 좀 무거운데, 돌아가면 또 무언가를 먹을 분위기라 가볍게 산책이라도 하고 가야되겠다 싶었다.

잠옷 위로 숄을 걸쳤다. 사이나의 잠옷은 키얼스틴의 것처럼 얇지 않아서 이 정도로 충분했다.

‘후원이 열려 있을까 모르겠네.’

남의 집이다 보니 좀 조심스러웠다.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는 인상을 줄 수도 없으니, 어디를 걸을까 잠깐 고민이 되었다.

‘아, 이쪽에 복도형 화랑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애크로이드가에는 몇 번 왔다고 지리가 눈에 익었다.

엄청 환한 것은 아니었지만 불빛이 있기는 한 것을 보니 구경정도는 할 수 있겠다 싶어 사이나는 걸음을 옮겼다.

살짝 서늘한 느낌에 숄을 조금 더 깊이 여미며 천천히 움직였다. 벽에 걸린 그림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사이나는 시각에 집중하며 그것들을 들여다보았다.

“…사이나?”

“헉!”

해가 내린 복도에서 혼자라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사이나는 진심으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놀라게 했어? 미안.”

“아, 카이언.”

카이언이다.

아까는 안 보이더니 어쩐 일로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만났다.

“오늘 잠옷 파티한다더니 너도 온 모양이네?”

“응.”

숄을 걸치기는 했으나 잠옷 차림으로 카이언과 맞닥뜨렸다는 생각이 들자, 약간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토옥. 그런데 개의치 말라는 뜻인지 카이언이 사이나의 어깨에 도톰한 외투를 걸쳐주었다.

커다란 외투까지 걸치고 나니 잠옷인지 뭔지 구분하기도 쉽지 않아졌다. 약간 서늘했는데 따뜻해지기도 했고.

“고마워.”

“뭘.”

“근데 카이언, 넌 어쩐 일로 여기 있어?”

“아, 난 일 끝나고 올라가던 길에 이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기에 와 봤어.”

“어, 혹시 여기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는 곳이니?”

“그런 건 아닌데 암묵적으로 고용인들은 돌아다니지 않는 구역이기도 해.”

“그렇구나.”

고용인은 아니지만 그만 보고 돌아가야겠다 싶어졌다.

“그림 말고 저쪽에 조각도 있는데, 봤어?”

“어? 아니?”

그런 차에 카이언이 안내를 자처했다. 얼결에 사이나는 더 깊숙한 곳까지 따라 들어갔다.

“이거랑 저거랑 연작이야. 유작이기도 하고. 이 작품은 알지?”

“아, 그러네. 와, 이게 애크로이드가에 있었구나.”

미처 본 적 없던 대가의 마스터 피스들이 코너를 돌자 잔뜩 있었다. 사이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이것저것 열심히 구경했다.

빛이 강하지 않아 더 자세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애석할 정도로 멋진 작품들이 잔뜩 있었다.

“날 밝으면 한 번 더 와서 봐. 또 느낌이 다를 거야.”

“응. 그럴 것 같아. 지금은 음영이- 으앗!”

너무 조각품만 열심히 들여다보며 걸은 탓인지, 카페트의 모서리에 발이 걸리고 말았다.

카이언이 그녀를 붙잡아 주려 했으나 늦고 말았다. 이미 그의 손을 벗어난 몸이 앞으로 쏠렸다.

뭐라도 붙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눈앞에 있는 단단한 것을 꽉 안았다.

“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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