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차 말고 술이요
“…하아, 네…….”
하지만 뭐가 부끄러운지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더 부끄러울 것 같아서 사이나는 대충 대답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 안으로 방금 보았던 탄탄하고 선명한 그의 가슴 근육과 복근이 아른아른 거렸다.
‘훠어이!’
얼른 사라지길 바라며 고개를 휘저었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사이나를 바라보는 콘스탄틴의 걱정만 더 깊어졌을 뿐.
* * *
그리고 사흘째.
사이나는 크레이머 공작가에서 무려 사흘째 아침을 맞고 있었다.
바깥 날씨는 여전히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눈의 양은 좀 줄었으나 눈보라는 여전해서 기존의 쌓인 눈이 전혀 녹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사이나는 여전히 공작으로부터 떠먹임을 당하는 중이었다.
“저, 왼손은 멀쩡한데요….”
오른손을 못 쓴다는 이유로 그가 식사 때마다 일일이 음식을 먹여주었기 때문이다.
“왼손으로 흘리지 않고 먹을 수 있겠습니까?”
“…노력은 해볼 수 있겠죠?”
먹기 편한 음식들 위주로만 올라오고 있어서 왼손으로만 식사를 하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요구를 못 들은 것처럼 여상히 포크를 들어 작게 자른 고기를 찍고는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헙.”
반사적으로 고기를 받아먹은 사이나가 우물우물 그것을 씹었다. 여느 때처럼 공작가의 음식 솜씨는 매우 훌륭하여 나무랄 곳이 없었다.
고기 다음은 구운 야채다. 공작은 중간중간 잔을 들어 주스로 목을 축이게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런 보살핌은 죽을병에 걸렸을 때도 못 받아봤다. 섬세하게 그녀의 필요를 채워주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사이나는 기분이 아주 이상해졌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때도 잦았으나, 그는 꽤 단호했고 그녀의 수발을 듦에 있어 전혀 거리낌이 없이 행동했다.
그녀가 한두 살짜리 아기라도 된 듯 보살펴주는 손길이 처음에는 매우 어색했으나, 그것도 며칠 지나자 익숙해졌다. 아니, 솔직히 말해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문제였다.
‘유모도 이 정도로는 안 해줄 것 같은데…….’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의 병수발을 받자니 양심에 찔리기는 했지만, 그녀가 시킨 것도 아니고, 말려도 소용이 없으니 사이나로서도 별수 없는 일. 그냥 마음 편히 받아들였다.
“저 오늘은 이 붕대 풀어도 된다고 하셨죠?”
게다가 그 수발도 뭐, 이제 끝이 보이니까.
“…약간 붉은 기가 남아 있지 않았던가요?”
“거의 안 보여요. 이따 약 바르면 그마저도 없어질 것 같던데요. 충분히 풀어도 될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그리합시다.”
사이나는 말이 나온 김에 식사가 끝나고 바로 약을 바르자고 종용했다. 방에 갇혀 있다시피 한 생활이 아주 답답했기 때문이다.
붕대를 풀고 그가 또 아주 섬세한 손길로 약을 발라주었다. 매끈해진 손바닥을 보며 사이나가 주먹을 몇 번 접었다가 펴며 웃었다.
“감사드려요. 귀한 물약 덕분에, 흔적도 없이 잘 나았네요.”
“약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치지나 말아요.”
“네.”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사이나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가 그녀의 미소 짓는 얼굴을 뚫어져라 보다가 짧게 한숨을 쉬었으나, 그녀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저 때문에 일도 못 하셨죠? 같이 집무실로 가실래요?”
“그런 걱정은 접어 두십시오.”
“하지만 바쁘실 텐데…….”
“일이라는 게 본래 하려면 끝도 없는 법입니다. 적당히 처리하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공작님께서 일하시는 동안 저도 밀린 작업 좀 하려고요.”
“화급을 다투는 일은 없으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됩니다.”
공작의 철벽은 대단했다. 결국 사이나는 본심을 털어놓아야 했다.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간 지루했습니까?”
“침대에만 있으려니 좀 시간이 안 가기는 했어요.”
그제야 공작은 피식 웃으며 집무실로 향했다.
일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말하더니 막상 책상 앞에 자리하자 공작은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주며 업무에 임했다.
분명 일이 밀리긴 했던 것 같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만 봐도 평소보다 양이 많은 것 같고.
사이나는 자신의 책상에 앉아 간만에 보석을 들여다보았다. 오랜만에 손 위에 올린 블랙 다이아몬드는 여전히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요리조리 돌려가며 보석을 관찰했다. 아직 옮겨 적지 못한 문양이 있는지 더 유심히 보아가며 종이에 베껴 그렸다. 보석치고는 크다고 해도 사실 손바닥보다 작은데, 표면에 적힌 문양을 베껴내는 것만 해도 시간이 굉장히 많이 소요되었다.
새겨진 형태가 겹침이 심해서 글자를 분리해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심력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리해낸 아를어는 또 하필 여태까지 뜻이 알려지지 않은 음 글자와 구조들이 유독 많았다.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겠어.’
사이나가 아를어의 모든 문법과 체계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그런 사람은 현시대에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보석에 새겨진 문자들을 모조리 다 해석해 내겠다는 각오를 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런 식이라면 반도 해내지 못할 것 같아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했던 번역 작업이 점차 까다로워지자 슬쩍 한숨이 새어 나오면서 딴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사이나는 왼손에 있던 다이아몬드를 슬쩍 내려놓고 그 손에 턱을 괴었다. 쀼루퉁해지는 입술을 수습하며 눈알을 굴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작의 모습이 또 시야에 잡혔다.
‘귀족의 표상 그 자체네.’
정해진 양식 외의 행동으로는 일말의 힘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절제된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참 우아하네 싶다가도, 사람이 저렇게 잠시도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려면 힘들지 않나, 하는 의문도 뒤따랐다.
자신은 책 한 장을 읽을 때도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가, 발을 까닥댔다가, 손가락을 톡톡 두들겼다가 하는데 말이다.
‘그나저나 참… 잘생겼단 말야.’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얼굴. 높은 눈썹뼈 아래 짙은 속눈썹, 남자답게 기다란 눈매와 높은 콧날, 단단한 턱선.
그와중에 단정하게 이마 뒤로 넘겨 묶은 머리카락 중 몇 가닥이 빠져나와 관자놀이 쪽에 늘어진 모습을 보니 손을 뻗어 귀에 꽂아주고만 싶다는 이상한 충동이 든다.
말끄러미 그를 보는데 공작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
훔쳐보던 것을 딱 들키고 말았다.
“…뭐가 잘 안 됩니까?”
“네, 네?”
“할 말이 있는 듯 보입니다만.”
머리카락… 넘겨드려도 될까요? …라고 물어볼 수는 없지 않은가.
들켰는데도 어째서인지 자제가 잘 되지 않고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대체 내가 왜 이런담.
“아뇨! 아니에요……. 흠.”
사이나는 얼른 시선을 내리며 손을 꽉 쥐었다.
공작은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라는 표정으로 딴청을 피우다가, 다시 보석을 들여다보며 일을 하는 시늉을 하는 사이나를 향해 고개를 슬쩍 갸우뚱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그가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모습에 사이나는 속으로 적잖이 당황해 더 보석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척했다.
“잠시 쉽시다.”
“…예?”
“회복한 첫날부터 너무 무리하면 좋지 않습니다. 차나 한잔하지요.”
“아…. 그럴, 까요?”
어차피 집중이 깨진 판에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싶었다.
그런데 뭔가 마신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다른 게 마시고 싶었다.
“차 말고 술이요.”
“술, 말입니까?”
“네. 술이 마시고 싶어요.”
공작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허나… 환자지 않습니까.”
“아닌데요. 아픈 데 하나 없어요.”
멀쩡했다. 사실 상처에 비해 공작이 너무 과잉 대처를 한 것이다.
“나이도…….”
“저, 술 마셔도 되는 나이인데요.”
그리 달려들 땐 언제고 어린애 취급을 하시면…….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성인이다. 술맛도 알고 자신의 술 취향을 알 정도로 마셔보기도 했다. 이번 생의 경험은 아니지만.
계절에 맞지 않는 폭설로 인해 저택에 갇힌 꼴이었으나,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정경만 보면 꽤 운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뜨끈한 벽난로 앞에 앉아 창밖에서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술 한잔하기 딱 좋은 그런 날씨였다.
처음엔 당황한 표정이던 공작은 사이나의 나름 단호한 결심을 느꼈는지, 약간의 한숨 섞인 미소를 내보이고는 그러자고 했다.
“그럼… 자리를 옮깁시다.”
“벽난로가 있는 곳이 좋아요! 벽난로 앞에 푹신하게 러그가 깔린 그런 곳이요.”
“바닥에 앉을 생각입니까?
자신이 너무 편하게 굴고 있는 걸까? 공작이 약간 놀랐다는 듯 묻는 것을 보니 그런 생각이 약간 들었다.
“앉은 자리에서 바깥에 눈이 내리는 걸 바로 볼 수 있는 커다란 창도 있으면 좋을 것 같네요.”
하지만 오늘따라 술이 매우 당겼다. 남의 집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자각이 약간은 있었지만, 여태까지 보여준 공작의 태도를 보면 믿을 만하기도 하고.
“그런… 곳이 딱 한 군데 있기는 하군요.”
“어, 정말이요?”
“보고 결정합시다. 별로면 다른 방을 찾으면 되니.”
사이나는 종종종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점차, 익숙한 길이 보여서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으로 가면…… 내 방 아닌가?
뭐지, 하며 따라가는데 공작이 사이나가 머무르고 있는 방의 문을 지나 다음 문을 열었다.
들어가니 커다란 개인용 응접실이 나왔고, 그 안에서 또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방이 하나 더 나왔다.
넓은 벽 한 중앙에는 널따란 벽난로가 있어 장작이 타오르고 있었고, 좌측으로는 테라스로 연결되는 커다란 창이, 우측으로는 4인용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침대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가구도 별로 없는 단조로운 구조의 방이었으나 벽난로 앞에 놓인 기다란 장의자를 비롯해 바닥에 깔린 여러 겹의 털가죽과 쿠션이 깔린 영역만큼은 꽤 포근한 분위기를 풍겼다.
조건은 완벽했다. 아까 사이나가 말했던 요건들이 정말 모두 있었다.
문제는…… 아무리 봐도 여기가 침실로 보인다는 거지만.
“여긴…….”
“내 침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