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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71화 (71/233)

71화. 수발드는 공작님

다섯 손가락을 구부리지도 못하게 통으로 감아둔 덕분에 펜은커녕 스푼도 들어 올리지 못하게 생겼다.

“필요한 수발은 내가 돕지요. 그대는 손이 잘 낫도록 푹 쉬기나 해요.”

“…예?”

공작님이 직접 수발을 드신다고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말이야 방귀야 싶던 그 발언의 의미는 금방 밝혀졌다.

정말로… 정말로 그가 사이나의 수발을 들었던 것이다.

식사를 이리 올리라 했는지 방 안으로 음식이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은 위에 부담이 없거나 먹기 편한 것들 위주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치, 대단한 환자라도 된 기분이다.

크리미한 스튜를 스푼으로 떠서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 대며 그가 말했다.

“벌려야죠.”

“…….”

“아.”

아, 하라며 그가 진지하게 반복했다.

“제, 제가 할…. 읍.”

“너무 작게 벌리니까 다 안 들어가지 않습니까.”

부드러운 스튜가 입 안으로 침입해 혀를 적셨다.

“입술에도 묻고.”

스푼을 스튜 그릇에 올려놓은 그가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훑었다.

할짝. 그리고는 자신의 엄지에 묻은 스튜를 혀를 내어 핥았다.

“…….”

쿵, 하는 심장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착각일까.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착각일까.

그녀가 먹는 모습. 특히, 입술을 지나치게 뚫어져라 보는 것 같은데, 이 역시 착각일까?

알 수 없다. 혼란스러우면서도, 또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아서 더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다시, 아- 하세요.”

환자가 아닌데요…….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사이나는 얌전히 입을 벌렸다. 일정한 속도로 다가온 스푼 안의 음식물이 안전하게 입 안으로 들어왔다.

“잘 먹는군요.”

둘 사이에 흐르는 이 기류가 남녀 사이의 긴장감 같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요상한 칭찬을 듣고 있자니 그냥 어린애를 보살펴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특별히 혼자 하겠다며 고집 피우지 않고 그가 주는 대로 먹고 식사를 끝냈다.

침대에 누워 잠들 준비를 하는 그녀의 이불까지 꼼꼼하게 펴서 덮어주고는, 공작은 예의 그 수상한 연결문을 열고 떠나갔다.

“…….”

이상한 일이 잔뜩 일어난 날이다.

내일이면 그래도 눈이 그치겠지.

‘하루니까…….’

나름 그렇게 위안하며, 사이나는 잠이 들었다.

* * *

“흐으…….”

추위와 상처를 다 잘 넘겨냈다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밤사이 열이 치솟았다.

동상은 피했으나, 감기는 피하지 못한 모양이다. 발갛게 열이 올라 몽롱해진 의식의 틈새로, 지난 기억의 편린들이 스며들었다.

‘콜록! 콜록!’

어느 날부터 기침이 멈추지 않더니, 각혈이 시작되었던 기억.

‘몰골이 왜 이 모양이야? 여자가 어찌 이리 꾸밀 줄도 모르고, 쯧쯧.’

아픈 것을 알아채기는커녕 병색으로 초췌해진 모습을 나무라던 남편.

‘어머, 얘. 너 혹시 폐렴 같은 거 아니니? 전염성이 있으면 어쩔 거야? 요양을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아픈 며느리를 걱정하기는커녕, 병이 옮을까 꺼림칙해하던 시어머니.

결국 허약한 몸을 이끌고 지방 영지로 떠나야 했던 그녀.

요양이라는 명목하에 사이나는 방치되어 죽어갔다.

“흐으… 윽…….”

외롭고 처참하게 죽었던 기억은 생각보다 깊게 각인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의 장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반사적으로 방울방울 눈물이 넘쳐흘렀다. 흐느낌은 악몽처럼 새어 나와 어두운 방 안에 가라앉았다.

“쉬이……. 사이나.”

누군가 그녀의 이마를 쓸었다. 뜨끈하게 열이 오른 이마 위로 서늘한 손바닥이 닿자 기분이 좋았다.

사이나는 커다란 손바닥 안으로 얼굴을 디밀며 그 서늘함을 파고들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편히 자면 됩니다.”

단조로운 듯, 낮은 목소리가 안정적으로 스며든다. 목소리에도 굳기가 있다면 아주 단단하다고 느낄 만한 그런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 안정감을 느끼며 사이나는 서늘한 감촉을 더 느끼고자 진원지로 파고들었다.

“으….”

몸이 너무 뜨거웠다. 불과 얼마 전엔 추워 죽을 것 같더니 지금은 뜨거워 죽을 것 같다.

그런데다 그녀의 뺨을 시원하게 해주던 손길이 떠나갔다.

‘…안 돼!’

돌아와요, 제발.

서느렇던 기운에 매달려 있다가 없어지니 왠지 더 뜨거운 것 같았다.

이제는 목 안까지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일어나 종을 칠 힘도 없었다.

물. 누가 물을 좀 주었으면…….

사이나는 그저 누워서 괴로워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걸쳐진 상태로 제대로 잠들지도,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 끙끙대는 게 다였다.

“사이나.”

그때, 서늘한 손길이 다시 느껴졌다.

아아. 사이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낸 사람처럼 그 선선함에 매달렸다.

목덜미에 차갑게 식은 손이 감겼다. 뜨끈하던 목 뒤의 온도가 내려가자 깨질 것 같던 두통이 약간 가시는 기분이었다.

“으음.”

입가에 딱딱한 무언가가 닿아 물을 흘렸다. 하지만 입 안으로 들어오는 물보다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물이 더 많았다. 바싹 마른 목줄기를 적시기엔 양이 너무 적어 입을 다셨다.

더, 더…. 제발…….

그녀의 바람을 누군가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입 안으로 물이 가득 들어왔다.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던 차에 채워진 액체는 달다고 느껴질 만큼 기꺼웠다.

“하아…….”

보드라운 감촉과 함께 물을 제공해주는 무언가에 사이나는 바싹 매달렸다. 중간에 쓰디쓴 액체가 들어와 인상을 구겼으나, 갑자기 코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입 안에 남은 쓴 기운은 추가로 들어온 물에 희석되어 사라졌다.

만족할 만큼의 물을 섭취한 사이나는 그제야 매달려 있던 손에 힘을 뺐다.

열 기운도 아까보다는 참을 만한 기분이었다.

사이나는 점차, 평온해지는 스스로를 느끼며 다시금 무의식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 * *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때, 사이나를 맞이한 것은 눈앞이 꽉 막힌 답답한 장벽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끔벅거렸다.

전방을 가득 채우는 살색.

살색…….

다시 한번 눈을 깜박인 뒤 살폈으나, 아무리 보아도 살색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왼쪽 뺨을 붙이고 있는 곳이, 누군가의 맨살인 듯…….

“……!”

사이나는 새삼 그 깨달음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태 맨살끼리 붙어 있던 탓인지, 맞닿은 피부가 떨어지며 쩌억 소리가 났다.

‘……으아?!’

자신의 침대에… 자신의 아래에… 크레이머 공작이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침대 헤드에 기댄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밤에 그녀를 돌보다가 여기서 잠이 든 모양이다.

자신의 팔이 그의 허리를 감고 있는 형태로 보아…… 안 간 것은 아니고, 못 간 것 같다. 도망 방지용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단단하게도 감아 붙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미쳤…….’

밤새 열이 올랐던 게 꿈은 아니리라.

뜨거운 볼을 식혀보겠다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적댄 것 역시 꿈이 아닌 것 같고.

‘미쳤어어!’

말 그대로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를 하고 싶은 심정이다.

대신 사이나는 그를 칭칭 감고 있던 손을 풀어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 미친 듯이 그의 눈치를 보았다.

대체 자는 동안 그녀가 얼마나 그에게 치댔던지, 가운이 죄다 벌어져서 꽉 짜인 가슴과 복부의 근육이 다 드러나 있었다.

‘……이거 거의 추행 수준 아닌가?’

얼굴에 열이 급속도로 오르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대체 공작님 얼굴을 어찌 본담…….’

당장에라도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든 피해보고 싶은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게도, 그의 눈꺼풀이 스르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아, 안 돼…! 더, 더 주무시라고요!’

당장에라도 그의 머리를 쳐서 다시 기절이라도 시키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사이나는 그저, 나무토막처럼 굳어 그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이나?”

공작은 그녀를 인지하자마자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손으로 사이나의 얼굴을 쓸었다.

급작스러운 접촉에 사이나는 움찔, 더 굳고 말았다.

“…열이 다 떨어진 줄 알았더니, 다시 올랐습니까?”

“…….”

“약을 더 먹어야겠군요. 잠시 여기….”

“아뇨, 아니에요!”

사이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막았다. 손을 뻗어 붙잡으려다 벌어진 가운 외에 잡을 데가 없어 급히 다시 수거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얼굴이 빨간데요?”

“그, 그건…….”

“……?”

“민망해서…….”

뭐가 민망하냐는 얼굴로 사이나의 표정을 살피던 공작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더니 아차 싶은 기색을 내보이며 말했다.

“아, 내 차림새가 적절하지 못했군요. 못 볼 꼴을 보여 미안합니다.”

공작은 서둘러 가운을 여미며 끈을 다시 조였다.

‘아니… 그거 아닌데요…….’

민망한 건 지난밤의 제 자신이랍니다. 아무리 봐도 공작님께서는 인간 해열제 역할을 해주신 게 다인데… 제가 아주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요…….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던 변태성을 향해 중얼중얼 뇌까리는 동안, 그가 손을 뻗었다.

다시금 서늘하고 커다란 손바닥이 터억, 이마를 덮자 사이나는 깜짝 놀라 몸을 들썩였다.

“금세 다시 열이 떨어졌군요? 얼굴색도 돌아왔고…….”

공작은 지금은 어떠냐며, 사이나의 상태를 꼼꼼하게도 물어왔다.

“아니, 다시 빨개지고… 있군요? 급성인가?”

민망함에 다시금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공작은 점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뇨오……. 정말 괜찮아요.”

“별로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다만? 의사를 불러야겠습니다.”

당장에라도 의사를 불러오려는 듯 몸을 일으키는 공작을 향해 사이나는 소리치듯 고백했다.

“-부끄러워서 그런 거예요!”

공작은 그녀의 외침에 움직임을 멈추고 잠시 생각을 하는 듯했다.

“……음. 내가 배려심이 없었군요. 씻고 옷을 갈아입으시겠습니까? 하녀를 올리라 하지요.”

아니, 자고 일어난 맨얼굴을 보여서 부끄럽다는 게 아닌데……. 아니, 아니, 그것도 부끄럽기는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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