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술기운에 나와 버린 예전 버릇
이미 추정한 사실임에도 입으로 확답을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조건은 들어맞지만, 그렇다고 해도 굳이 침실일 이유가 있을까?
게다가…….
“저, 그럼… 저쪽 너머가 제 방이고요?”
이 방에는 익숙한 형태의 연결문이 있었다. 사이나의 방에도 있던 그 연결문과 같은 형태의 문이다. 그리고 공간적인 구조를 맞춰보아도 저 너머에는 사이나의 방이 맞았다.
“그렇습니다.”
“……연결문이 있는데요. 그럼 제가 머무르는 방이 설마… 공작부인의 방인가요?”
“…그렇기는 하나, 공작부인이 지금 없으니 뭐 어떻습니까.”
“그, 그래도…….”
“이 층이 가장 보안이 좋습니다. 절대적으로 입이 무거운 사람들 외엔 드나들지 않지요.”
아, 그런 이유 때문이었나.
약간 이상한 의심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 갑자기 또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작은 말을 하다 말고 성큼성큼 바깥으로 나가버리더니, 한참 후에 사이나의 방 쪽에서 연결문을 열며 이쪽으로 넘어왔다.
“이 문은 닫으면 자동으로 잠깁니다. 여는 것은 영애의 방 쪽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아… 그런 기능까지는 몰랐다.
“이 문을 열어 두겠습니다. 술을 마시고 졸려지거나 피곤해지면 얼마든지 돌아가서 쉴 수 있도록.”
마시다가 문만 쏙 닫고 침대로 들어가서 자면 된다는 거지?
이렇게 일일이 설명을 듣고 보니 아주 좋은 선택 같았다.
사이나는 아까 불순한 의심을 했던 마음가짐을 금세 싹 잊고는 공작의 침실 안 벽난로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타닥타닥.
벽난로 안에서 장작이 타오르는 소리가 튀어 올랐다.
저녁이 가까운 시간대인지라 빈속이 걱정되었던지, 음식이 잔뜩 올라왔다. 그냥 술과 곁들이는 간단한 안주 수준이 아니라 한 끼 식사나 다름없었다.
미리 말해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올라온 와인을 잔에 채워 사이나 쪽으로 밀어주고, 공작 본인의 잔에는 독주를 따랐다. 주홍빛 액체가 찰랑거리는 크리스털 잔은 그의 기다란 손가락 안에서 굉장히 잘 어울렸다.
잔에 있던 술을 마시며 넘어갈 때 목울대가 꿀꺽하는 모습이 어쩐지 시선을 끌었다.
“공작님. 이거 좀 같이 드세요.”
너무 술만 들이켜는 것 같아, 사이나는 안주를 권했다.
술을 삼키며 공작이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영애도, 잘 챙겨 먹도록 해요.”
차마 음식을 입에 대줄 수는 없어, 말로만 권하기는 했는데 공작은 알았다고만 하고 여전히 술만 마셨다.
마주 보고 술을 마신다는 것 자체가 약간은 어색해서 초반에는 말없이 마시기만 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고 나니, 긴장이 풀리며 말문이 트여 나왔다.
“그러고 보니 제가 감사하다는 말을 드렸던가요?”
공작은 눈썹을 들썩할 뿐 무얼 감사하느냐 되묻지는 않았다.
“절 또 구해 주셨잖아요.”
“…….”
“어찌 알고 딱, 나타나셔서.”
정말 그 외진 곳에 어떻게 온 걸까. 신기했다.
그녀의 말에 공작의 눈 밑이 살짝 떨렸다가 정상으로 돌아갔으나, 사이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게다가 너무 멋있었어요. 수호령을 부리는 모습. 헤헤.”
사이나는 손짓 한 번으로 건물 잔해들을 싹 날려버리고 사람을 구해냈던 그의 모습을 다시 회상했다.
“모레프를 타고 달린 것도 너무 좋았고요. 잔뜩 쌓인 눈도 하나도 상관없다는 듯이, 정말 날아가는 것같이…….”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수호령을 실체화하여 탈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 했으니 말이다.
“그런 건 얼마든지 또 해드릴 수 있습니다. 좋았습니까?”
“네에…….”
약간 몽롱해진 얼굴로 사이나가 대답했다.
“…좋았군요.”
평소 덕질하던 대상을 만난 팬의 얼굴을 한 사이나의 표정이 묘했으나, 그런 사이나의 얼굴을 보는 공작의 표정도 묘했다.
“흠. 또 타 보고 싶습니까?”
“앗! 당연하죠!”
알코올 기운이 조금 돌자, 기분이 상기된 사이나가 발랄하게 대답했다. 게다가 수호령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더욱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눈발이 좀 사그라들면, 나가보지요.”
“정말요?”
사이나의 눈빛이 반짝반짝해졌다.
“근데 귀한 수호령을 그런 식으로 대해도 될까요?”
탈 것 취급을 해도 되나 싶다. ‘그’ 수호령 아닌가.
근데 공작이 코웃음을 쳤다.
“상관없습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써먹어 주는 데에 감사해야 할 놈이니.”
“…네?”
말하는 게 뭐랄까. 이 정도 대우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이런 느낌이었다.
멀리서 보기만 하던 사람들은 언약자와 수호령의 관계를 약간 성스럽고 엄숙한 느낌으로 막연하게 상상하고는 했는데, 이 부분은 사이나도 그리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저번에 플로리아 영애가 한 말도 그렇고, 지금 공작의 발언도 그렇고, 약간 골칫덩이를 어쩔 수 없이 달고 살아간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차마 ‘혹시 공작님의 수호령도 성격이 더럽나요?’ 하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 사이나는 수호령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신령하고 고고한 그런 존재라고 믿고 싶었다.
“음, 또 궁금한 거 있어요.”
“뭡니까?”
“제가 입고 있는 이 드레스들은… 누구 거예요?”
“드레스 말입니까?”
“네. 크레이머 공작가에는 여자분도 없는데 이렇게 여성용 드레스가 계속 나오는 게 궁금해서요.”
“…본래 비상용으로 갖춰진 의상들이 있지 않습니까? 귀족가라면 대부분…….”
비상용으로 이렇게 많은 드레스가 있다고?
사이나는 홀랜더가에서 살림을 맡던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당연히 비상용 드레스 따윈 없었다. 다들 아귀처럼 각자 돈을 써대느라 정신없었는데 손님용 비상 드레스 따위에 돈을 쓸 리가 없지. 물론 손님을 모실 형편도 아니기는 했지만 말이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드보프 가문을 떠올려 보았으나… 마찬가지로 비상용 드레스는 따로 구비해 두지 않는다.
“…보통 그렇지는 않은 것 같은데……. 여성 손님들이 자주 방문하시나 봐요?”
방문했다가 옷을 갈아입을 일도 많고……?
그런 상황은 대부분 한 가지밖에 없지 않나?
모두 다 자신처럼 폭설에 갇혀 머무르는 것은 아닐 테니…….
그리 생각하자 사이나는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다. 본래 남의 옷이기는 했으나, 더 남의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그거 아닙니다.”
“네?”
“얼마나 여자들이 평소 많이 드나들면 이런 의상이 준비되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닙니까?”
“…….”
그 말 그대로라 변명할 것도 없이 사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가문과 달리 크레이머에는 직계 여성이 없지요. 혹시라도 여성 손님이 방문해 의상이 필요한 경우 대처를 할 만한 가족이 없어 비상용 드레스가 있는 것뿐입니다.”
“아, 네에….”
“이상한 오해는 말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
말 그대로 이상한 오해를 했던지라, 사이나는 조용히 고개를 수그렸다. 괜히 민망해져 눈앞에 있던 잔을 들어 열심히 마시는 시늉을 했다.
그때.
“각하.”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바깥에서 집사 로이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만,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어느 가문이든 보통 이렇게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는 찾지 않는데,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다.
“전 괜찮으니 일 보세요.”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공작이 몸을 일으켜 문 바깥으로 나갔다. 폭설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들리다가 문이 닫히며 목소리가 멀어졌다. 눈 때문에 뭔가 일이 생긴 듯했다.
‘사실, 뭔 일이 생기지 않는 게 더 이상한 날씨네.’
생각해보니 그랬다. 보통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이라 지역 피해가 꽤 클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사이나는 홀랜더 영지의 살림을 도맡아 하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흉작인 해는 흉작이라 힘들고, 풍작이어도 딱히 나아질 것이 없던 그곳.
매 계절이 다른 이유로 지옥 같았지만 겨울은 유독 더 지옥이었다. 겨울마다 죽어 나가던 영지민들이 어찌나 많았던지……. 어떻게든 도우려 했으나 사이나의 힘은 미약하기만 했다.
‘거기 사정은 똑같을 텐데… 거기도 눈이 이리 많이 왔으려나?’
상관없음을 알면서도 걱정이 든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쓴물이 올라오는 기분에 사이나는 잔을 들었다.
갑자기 가라앉는 감정 때문에 홀짝홀짝 마신 와인이 어느새 한 병. 바닥이 드러난 술병을 기울이다가 사이나는 공작의 독주로 시선을 돌렸다.
와인을 더 가져다 달라고 지시하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술을 마시는 것이 더 쉬웠다. 비록 먹어본 종류의 술은 아니지만 말이다.
딱히 술에 강하지 않은 몸뚱이가 술기운에 늘어졌다. 폭신폭신한 털가죽을 손으로 쓸며 사이나는 슬며시 몸을 누였다.
“나 쓰다듬어 줘…….”
그리 술을 자주 마시는 편은 아니었으나, 술에 취하고 나니 예전 술버릇이 나왔다.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사람의 형상을 붙잡고 사이나가 칭얼거렸다.
“얼르은…. 만져줘……. 응?”
유리가 머리를 쓸어주면 잠이 잘 왔다.
‘어휴, 이게. 가지가지하고 있네.’
그녀가 이리 칭얼거리면 유리는 투덜거리면서도 머리를 스윽스윽 쓸어주고는 했다.
시원한 향이 나는 커다란 손이 그녀의 이마부터 정수리까지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이마에 서늘한 손이 지나갈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서 사이나는 배시시 웃었다.
“좋아…….”
평소와 향이 달라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취한 사이나는 이 손길이 유리가 아니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다.
사이나는 그 팔을 붙잡아 더 엉겨들며 어리광을 피웠다. 뭔가 그리운 느낌이 나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아…. 톡톡 해줘…….”
얼른 자라고 할 때마다 이마와 콧잔등을 톡톡 두들기던 유리의 습관을 요구하며 사이나가 얼굴을 내밀었다. 눈은 감은 채였다.
그가 톡톡 해주면 바로 잠이 들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물론 사이나는 콧잔등을 내미는 거였으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마치 입술을 내미는 것 같았다.
“…율이 누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