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날 얼마나 만만하게 봤으면
“그렇지, <아를-프로메사>에 미쳤다던 사야의 소문이 거짓말이 아니었어!”
“…….”
미, 미친 수준까지는 아닌데…….
어째서 소문이 그렇게 난 걸까요.
플로리아는 플로리아대로 당황스러웠다.
그간 그녀는 꽤 많은 상처를 받았다. 애버딘 영지에서 주욱 나고 자란 그녀는 정말 친구가 갖고 싶었다.
하지만 영지에는 그녀와 나이가 맞는 또래 여자들이 많지 않았고, 나이가 맞다 싶으면 신분이 맞지 않아 그녀에게 절절매는 사람들뿐이었다.
오빠를 졸라 이른 데뷔탕트를 치르고 황도에 머문 이유는 다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러니 처음에 자신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기뻤겠는가.
얼마 가지 않아 깨져버린 기쁨이었지만 말이다.
황도 영애들의 친절함에는 대부분 이면이 있었고, 그 이면에는 플로리아의 오빠이자 미혼인 공작에 대한 탐심이 있었던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런 일을 무수히 겪다 보니 플로리아는 아주 낙심하고 말았다.
그렇게 친구고 뭐고 다 포기하고 다시 영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할 무렵, 키얼스틴을 만났다.
쿨하고 거침없고 주관이 뚜렷한 키얼스틴.
그녀는 자신의 오빠와 가문보다 플로리아 자체에 더 큰 흥미를 보인 유일한 사람이었다.
믿고 있는 키얼스틴이 데려온 또 다른 영애. 당연히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이나가 ‘애버딘’이라는 이름에 눈을 반짝이는 것이 아닌가. 플로리아는 속으로 매우 실망했다.
알고 보니 애버딘에 대한 흥미가 유니콘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공녀님은… 자주 보실 수 있죠, 수호령?”
아까 한 의심 때문일까. 반짝거리는 눈으로 저런 질문을 받으니, 플로리아는 굉장히 양심이 찔렸다.
“아니. 의외로 그렇게 자주 보지는 않아.”
“…어째서요?”
“오빠가 성내에서는 실체화를 잘 시키지 않거든. 전투 때나 퍼레이드 때, 남에게 보일 필요가 있을 때. 그럴 때나 꺼내놓는 편이라 나라고 그렇게 자주 볼 수는 없어.”
플로리아는 애버딘의 수호령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보기에 예쁜 외양과 별개로 그 유니콘은 커다란 흠이 있었다.
“아, 그렇군요….”
사이나가 굉장히 실망한 기색으로 목소리가 작아지자 플로리아는 얼른 덧붙였다.
“사고뭉치가 따로 없어. 가까이서 봐봐야 실망만 할걸. 그냥 지금처럼 멀리서만 보는 게 나아.”
“네? 왜요?”
“…그 녀석. 성격이 좀… 그래.”
사실 좀 그렇다는 정도로 표현할 수준이 아니라, 개차반이 따로 없었다.
성내에서 실체화를 안 하는 이유도 사고를 몇 번 쳐서 그런 거니까.
애버딘 공녀이기는 하지만 플로리아라도 다른 수호령들을 가까이서 본 경험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오빠에게 들은 바가 사실이라면, 수호령들은 대부분 거지 같은 성격인 듯했다.
“장난기 엄청 심하고 변태 끼도 있어. 아무튼… 하, 그냥 별로야. 궁금해하지 않는 편이 나을걸.”
사이나는 정말 의외라고 생각했다. 고귀하고 도도해 보이는 그 유니콘이 변태라니….
하지만 애버딘 공녀가 하는 말이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까 서점에서 산 그 책에도 이런 정보가 있을까? 집에 가서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음… 말을 놓았으면 좋겠는데.”
“공녀님께 어떻게 말을 놓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키얼스틴 언니도 내게 공대를 해야 하는데, 뭔가 이상하잖아. 우리끼리 있을 때만이라도 부탁해.”
“음…. 시도는 해볼게요. 초반에는 좀 우왕좌왕할지도 몰라요. 아니, 몰라…….”
“응. 시도, 해줘…….”
아까 너무 쌀쌀맞게 말했던 것 같아……. 속으로 찔린 플로리아의 말투 역시 점점 사그라졌다.
서로의 속사정과 달리 이후 대화는 화기애애했다.
사이나는 주로 듣는 편이기는 했으나, 모든 대화가 흥미로워 귀를 뗄 수가 없었다.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10년여를 더 살았음에도, 다른 영애들이 어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사이나가 사교 생활에 워낙 미숙했던 탓인지도 모른다.
이미 뚜렷한 주관하에 행동하고 움직이는 이들은 나이 몇 살 더 많네, 적네의 기준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성숙함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사교계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쯤 되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티 파티가 아니라 수다 파티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넷은 열심히 수다를 떨다가 헤어졌다.
다음번 모임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 * *
수요일. 로하튼 거리.
사이나는 또다시 외출에 나서야 했다.
일전에 엘리자베스로부터 온 요청에 딱히 거절할 구석을 찾지 못했으므로.
또한, 데뷔탕트 볼과 이후 종막 연회에서 묘하게 대치 상태였던 것이 걸리기도 해서 한번 만나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약자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로하튼 거리에서 가장 유명한 귀족 전용 찻집에 들어서자 매니저가 물었다.
엘리자베스의 이름을 대자 안쪽으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예약석은 비어있었다. 엘리자베스보다 사이나가 먼저 도착한 듯했다.
곧 오겠지 싶어 사이나는 별로 개의치 않으며 기다렸다.
“사야?”
잠시 후, 약간은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사이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아우, 미리 나와서 가볍게 쇼핑을 하다 너 만나려고 오려고 했는데 소매치기를 만났지 뭐야.”
“…….”
“허둥지둥하는 나를 이 신사분이 도와주셨어. 너무 고마운 분이라 차라도 대접하고 싶어서 모셔왔는데… 잠시 합석해도 괜찮을까?”
“…….”
그 말처럼 엘리자베스는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 한 남자를 동행한 차였다.
그리고… 이 상황은, 뭔가 굉장히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다.
‘…어째서 이 시점에 이 상황이 벌어지는 거지?’
전생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그땐 열여덟이었고 지금은 열아홉이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사야?”
“하하. 썩 내켜 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전 괜찮습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겠지요.”
본인이 호인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호방하게 웃는 남자.
“아니에요. 그럴 순 없죠. 앉아서 같이 차라도 드시다 가세요. 제가 너무 감사해서 그래요.”
엘리자베스는 울상을 지으며 남자에게 변명함과 동시에, 사이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습니다. 소매치기 자식이 때마침 제 옆을 지나가기에 붙잡은 것뿐.”
“무슨 소리세요. 얼마나 용감하게 악당을 붙잡아 혼내주시는지 제가 다 봤는걸요. 정말 대단하셨어요.”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그저 영애의 소지품이 무사하니 다행입니다.”
그래. 과찬일 것 같다.
사이나가 아는 저 남자라면 절대 소매치기를 붙잡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테니.
그리고 ‘똑같은 말’을 전생에도 들었었다. 똑같이 엘리자베스를 만나기로 했던 날이었고, 똑같이 엘리자베스가 늦었고, 똑같이 소매치기를 당했는데 어느 신사분이 도와주었다며 이 남자를 데려왔었다.
전생에서는 그게 첫 만남이었었지.
‘와, 정말 다행이었네요. 베쓰를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뭣도 모르고 사이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덩달아 고마움을 표했었다.
하지만 1년의 시간이 뒤틀린 지금도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건… 이게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이라도 된다는 걸까? 아니면…….
여전히 사이나가 말없이 둘을 바라보기만 하자, 점차 둘의 표정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다.
“흐흠. 통성명이라도 할까요? 저는 홀랜더가의 후계자 조지라고 합니다.”
그래. 조지 홀랜더.
전생에 사이나의 남편이었던 지긋지긋한 놈팡이.
“전 발데즈가의 엘리자베스예요.”
방그레 웃으며 엘리자베스가 이름을 밝히고는 사이나를 보았다. 너도 얼른 인사하라는 눈치였다.
“되게 고마운 분이네.”
“응. 정말 이분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그렇구나.”
“응! 그래서 말인데-”
“그럼 난 갈게.”
“…뭐?”
사이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자베스의 얼굴에 진한 낭패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지만 사이나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고마운 분께 사례 잘해드리고, 잘 이야기 하고, 그러고 가. 내가 끼어 있어 봐야 뭐 하겠어.”
“사야, 아니. 그게 아니라.”
“난 괜찮아. 다음에 둘이 또 보면 되지. 고마운 분이 먼저 아니겠어.”
“…….”
사이나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엘리자베스가 어버버하는 동안 그녀는 거침없이 자리를 정리했다.
조지 홀랜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면전에서 사람을 무시한 꼴이 되었으나, 예도 표할 사람에게나 표하는 거다.
저자의 본성이 어떤지 이미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잠시 얼굴을 마주 대는 것조차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그가 무시당한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었다.
“아, 근데 둘이 원래 알던 사이 아니야?”
“어, 어…?”
“왜 꼭 모르는 사람처럼 대하는지 모르겠네. 몰래 데이트라도 하는 건가? 그냥 그렇다고 말하면 될 것을. 흠, 잘 지내다 들어가렴.”
이미 데뷔탕트 때 파트너로 같이 온 것을 보았는데, 이런 수작이라니. 대체 사이나를 얼마나 만만하게 본 것일까.
‘전엔 워낙에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으니……. 말도 안 섞어본 사람은 기억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실제로 예전의 사이나는 관심 밖의 사람은 얼굴도 잘 기억 못 했다. 아를-프로메사 외의 일에는 아는 것이 없어 엘리자베스가 말하면 말하는 족족 다 믿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사이나는 아니다.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엘리자베스를 뒤로하고 사이나는 미련 없이 찻집을 나섰다.
“아, 잠시만요! 영애.”
조지 홀랜더가 쓸데없이 뛰쳐나와 사이나의 앞을 막아섰다.
거침없이 손목을 잡아 오는 손길에 깜짝 놀라 뿌리쳤다.
“손! 대지 마세요. 무례하시네요.”
잠깐 닿은 손이 썩는 기분이었다.
날 선 그녀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퍼트가 등장했다.
그래. 이제 그녀는 언제 어디나 호위기사를 대동해 다닌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이자가 무슨 짓을 했습니까? 제압할까요?”
평소 껄렁하던 자세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루퍼트가 조지 홀랜더를 노려보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기세에 조지 홀랜더가 움찔했다.
“흠, 흠.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조지 홀랜더는 양손을 머리 옆으로 들어 펼치며 자신은 무해하다는 듯 어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