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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혼, 이번 생엔 제가 할게요-37화 (37/233)

37화. 평범한 티 파티인 줄 알았는데

“어머 어머나, 동생아?”

사이나의 몸이 뒤로 쏘옥 빠졌다.

어느새 키얼스틴이 다가와 사이나를 당겨 안았다.

“중간에서 이렇게 사야를 빼돌리면 못써. 왜 여태 안 오나 했더니 말이야.”

키얼스틴이 카이언을 향해 눈을 흘기더니 사이나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쓸고 나서 한 번 더 흘겨보았다.

“게다가 이렇게 상처까지 입히고. 뽀얀 이마가 빨개졌네, 응?”

“아니, 이건 제가 잘못해서 그런 거예요…….”

키얼스틴이 사이나의 이마에 호 입김을 불며 손가락으로 매만져 주는데 기분이 매우 이상하다.

키얼스틴의 손가락 끝은 너무도 부드러운 데다가 품 안에서는 아찔한 꽃향기가 풍겨 났다.

전에 키얼스틴으로부터 받았던 초대장에서 났던 것과 같은 향기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키얼스틴의 품 안에 있으려니 점점 얼굴이 발개지는 기분이었다.

“가자, 저 허술한 동생 놈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누나!”

“넌 좋은 연고랑 차가운 수건 좀 챙겨오렴. 예쁜 이마에 상처라도 남으면 어쩔 거야?”

“……알았어.”

“그 정도로 아프진 않아요! 괜찮아요.”

까지거나 베인 것도 아니고 부딪힌 것뿐인데 민망했다. 이마와 턱이 부딪혔다면 턱이 더 아픈 게 맞지 않나?

“턱 아프지? 미안.”

“가자, 사야. 쟨 신경 안 써도 돼. 가진 거라곤 튼튼한 몸뚱이밖에 없단다.”

카이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 언니밖에 없을걸요…….

사이나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하며 카이언에게 미안하다는 눈인사를 남겼다. 카이언은 피식 웃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야, 그러는 거 아니야.”

“…네?”

“애크로이드가에 왔으면 제일 먼저 날 보러 와야지. 카이언 따위를 먼저 볼 게 아니라.”

“그게,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났어요.”

“쯧쯧. 사야. 정말 넌 그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

우연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카이언은 때마침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는데.

뭘 더 물으려다가 티 파티가 열리는 룸의 문이 열리고 있어서 사이나는 입을 다물었다.

“안녕.”

“뭐야, 왜 이제 와.”

“망할 카이언 녀석이 중간에서 사야를 홀랑 가로채서는 독점하고 있지 뭐야?”

툴툴거리며 키얼스틴은 사이나를 이끌어 티 테이블 한쪽에 앉혔다.

“안… 녕하세요.”

사이나가 상상한 것은 평범한 티 파티였다.

키얼스틴이라는 인물 자체가 좀 비범하니 참석자나 진행 방식은 평범과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틀은 티 파티의 기본 형식일 거라고 생각했다는 뜻이다.

이런 건 상상의 범주에 없었다.

“놀랬네. 이 아이.”

“후후후. 사야, 놀랐어?”

고작 4인이 모인 소소한 사모임일 줄이야.

“……제가 너무 차려입고 온 거 같은데요.”

여자들이 잔뜩 있는 곳일수록 더 완벽하게 입고 가야 한다는 마르다의 등쌀에 아침부터 온갖 마사지에 목욕을 거쳐 잔뜩 꾸미고 왔는데, 이리되니 약간 민망해졌다.

“아니, 완벽해. 너무 예뻐.”

언제나처럼 키얼스틴은 사이나에게 녹을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밑도 끝도 없이 칭찬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미모의 소유자인 사람이 저리 말하니 딱히 크게 와 닿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나도 아직 너의 면면을 다 모르는데, 그걸 다수와 공유하라고? 흐응, 아깝지, 아까워.”

“…네?”

“당분간 넌 내 거야. 바깥에 내놓을 생각 전혀 없다구. 그러니 티 파티 인원이 좀 적더라도 이해하렴.”

내 거니 뭐니 하는 발언은 좀 부담스럽지만, 저런 플러팅 넘치는 대사도 여러 번 듣다 보니 좀 익숙해지는 것 같다.

사실 사람 많은 모임보다는 이런 소소한 모임이 사이나로서도 더 환영이었다.

“네, 괜찮아요. 오히려 환영인걸요.”

나름 긴장하며 참석했는데 그 긴장감이 약간은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키얼스틴이 가장 가까이 지내는 사람만 참석한 작은 티 파티는 그저 친한 친구들끼리 모여 깔깔대며 수다를 떨기 위한 목적처럼 보였던 것이다.

거기에 사이나가 낀 것이 행운이라고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처음은 처음이라 약간의 서먹함이 있었다. 얼굴을 안다고 친한 것은 아니니 당연한 데다, 네 명 중 한 명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 명은 키얼스틴의 절친인 에비앙 드미트리. 그녀야 예상한 바라 놀랍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이 의외였다. 소개 후 이름을 듣고 놀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애버딘가의 플로리아.”

…애버딘? ‘그’ 애버딘?

‘그럼 애버딘 공작가의 영애란 말인가?’

애버딘 공작에게 나이 터울이 꽤 나는 늦둥이 여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황도에서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리라곤 생각 못 했기에 얼떨떨했다.

“세상에, 애버딘 공녀시군요. 반갑습니다. 전 드보프가의 사이나입니다. 얼마 전 건국제 때 데뷔했어요.”

“네.”

플로리아는 이름처럼이나 어딘가 보송하고 곧 피어날 것 같은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소녀였다.

수면에 비친 물결 같은 은회색 눈동자에 녹을 것 같은 연분홍색 머리카락. 전체적으로 옅은 색소를 가지고 있는 데다 눈은 동그라니 컸고, 약간 쳐진 강아지상이라서 꼬옥 안아주고 싶은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허리를 세우고 도도하게 앉아 짧게 대답하는 태도에서 공녀는 공녀로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말 놓으세요. 공녀님.”

“…….”

어딘가 약간 뚱해 보이는 것이 초반에 낯을 좀 가리는 타입이거나, 그게 아니면 사이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인상 자체가 굉장히 호감을 주는 강아지상이라 데면데면한 그녀의 태도에도 사이나는 딱히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에 대한 흥미로움을 숨기기가 힘들어 자제해야 할 정도였다.

왜냐?

‘그 애버딘가의 영애라니!’

사이나로서는 호감을 느끼지 않기가 더 어려웠다.

“사야?”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사이나는 꾹, 볼을 찔리고 말았다.

뭔가 봤더니 바로 키얼스틴의 손가락.

자신의 손가락이 사이나의 우측 볼에 묻힌 형태를 보며 킥, 웃은 키얼스틴이 보드라운 볼을 몇 번 더 살짝살짝 찌르고는 앵돌아진 투로 입을 열었다.

“첫 참석부터 나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관심 주기 있어?”

아무래도 자꾸 플로리아를 흘끔대는 사이나의 기색을 눈치챈 모양이다.

“아. 그게 아니라.”

괜히 민망해져서 슬쩍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자 키얼스틴이 더 호들갑을 떨었다.

“사야, 정말 이러기야? 내가 플로리아 공녀에 비해 뭐가 부족하지? 말해 봐!”

키얼스틴이 정말 속상하다는 듯 툴툴대자 에비앙이 시니컬하게 이유들을 읊었다.

“흠. 나이가 너무 많아서?”

“헉.”

키얼스틴이 충격받은 얼굴로 에비앙을 돌아보았다.

“너무 들이대서?”

“허억.”

“고작 후작가 영애라서?”

“허어억.”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에비앙이 혀를 차는 모습에, 더 충격받은 얼굴을 한 키얼스틴이 손으로 자신의 볼을 감쌌다.

“사야, 정말이야? 그래서 그래?”

“…네?”

연극 조에 가까울 정도로 극적인 표정 변화와 대사를 보며 사이나는 약간 싸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공녀가 아니라서 플로리아가 더 좋은 거냐고.”

“…….”

대화의 방향이 왜 이런 건지? 키얼스틴이 공녀인지 아닌지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침묵은 긍정 아니야?”

“그렇지, 그렇지. 그러니 포기해, 키키.”

키얼스틴과 에비앙이 주거니 받거니 계속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냥 뒀다가는 점점 더 산으로 갈 것 같아 사이나는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음. 애버딘이잖아요.”

사이나의 대답에 키얼스틴과 플로리아의 얼굴은 더 굳어졌다.

“애버딘이면 뭐 어쨌다는 거지?

“‘그’ 애버딘이요.”

“…….”

플로리아가 마시던 찻잔을 탁, 소리가 날 정도로 티 나게 내려놓았다. 그녀의 예법을 생각할 때, 의도적으로 낸 소리일 것이다.

“흠. 사이나 영애. 우리 오빠 만나고 싶어?”

플로리아는 어딘가 삐딱한 표정으로 그리 물었다. 순둥순둥한 얼굴로 삐딱한 표정을 지으니 무섭다기보다 더 귀엽게 보인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애버딘 공작님이요? 네,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그러고 싶죠.”

머리 색 때문인가. 애버딘 공작이라는 말에 순간 오는 길에 서점에서 만난 남자가 떠올랐다.

‘에이, 아니겠지.’

애버딘가의 퍼레이드 때마다 사이나는 에렌혼을 보느라 정신없어서 애버딘 공작의 생김새가 분홍색 머리라는 것 외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런 경박한 남자가 애버딘 공작일 리는 없지 않은가. 잠깐 떠오른 가능성을 금세 지워버렸다.

“…얌전하게 생겨서는 다른 누구보다 더 대놓고 야심만만하네? 다른 영애들은 그래도 아닌 척, 그냥 나와 친해지고 싶은 것인 척, 초반에 연기라도 하던데 말이야.”

“……네?”

“나와 가족이 되고 싶은 거라면 먼저 내 비위부터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가족이요? 제가 왜 공녀님과 가족이….”

사이나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공작부인이 되고 싶은 거잖아!”

플로리아가 발끈한 얼굴로 외쳤다.

아, 그동안 공작부인이 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플로리아에게 접근한 여자들이 많았나 보다. 갑자기 그녀의 태도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사이나는 그제야 슬쩍 미소 지으며 플로리아를 향해 말했다.

“아, 공녀님. 그런 걱정은 마세요. 전 비혼주의자인걸요.”

“…뭐?”

“결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답니다.”

플로리아가 아직 가시지 않은 불신과 혼란함이 뒤섞인 얼굴로 사이나를 보며 되물었다.

“그럼 왜? 뭣 때문에 우리 오빠가 보고 싶다고 한 건데?”

“그거야 당연히 ‘애버딘’이니까요.”

사이나는 왜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플로리아는 당연히 이해가 안 간다는 기색이었다.

“유니콘이요! 유니콘을 가진 애버딘!”

애버딘가의 수호령은 정말 숨 막히게 아름다운 유니콘이다. 그것을 가까이서 자주 볼 수 있는 애버딘 영애가 당연히 부럽지 않겠는가.

사이나의 대답에 갑자기 키얼스틴이 깔깔거리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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